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의 호위 사찰이 있었어요.
동 불암사, 서 진관사(津寬寺), 남 삼막사, 그리고 북쪽에는 승가사.
이를 사고사찰(四固寺刹)이라고도 하는데 4군데서 도성과 궁궐을 지킨다는 뜻이겠죠.
눈발 이는 휴일, 승가사 갑니다.
세검정 지나 구기터널을 들머리로 하더라도 승가사 까진 50분이면 충분.
구기동 승가사 등산로 초입.
이곳에서 셔틀을 탈수도.
물론 길이 좁고 경사가 커 눈오는 날은 운행 불가.
1.5키로 정도니 걸으면 더 좋겠죠.
지난 가을이 생각나요.
등산로 진입하고 10여분.
평범해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통화하며 내려오고.
일순간 스쳐지나는데 많이 본듯한...아하!
"안녕하세요,선생님!"
바이올리리스트 정경화.
애완견과 승가사 등산길을 산책하다 내려오는 중인듯.
워커힐 광장동에서 구기동으로 거쳐를 옮겼나 봅니다.
선생님은 이미 저만치 내려가고 강쥐 한마리(?)가 뒤따르는데 귀티가 좌르르.
그럼 이 둘의 이름은 뭘까요?
클라라와 슈만?
정답은 클라라와 요하네스(브람스)
찌르르 한 특유의 목소리에 기침소리가 섞여 들리고,나를 10년 전으로 백투더퓨쳐!
(당시 음악회 후기가 있군요.무려 10년전...리바이벌)
때는 2012년 12월,예술의전당 콘서트홀.
She is back!
6년만의 바이올린 독주회로 손가락 부상 후 실제적인 재기 무대.
(1년 전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예당에서 영국 필하모니아,아쉬케나지 조합으로 손을 풀었고)
그런데 초장부터 사단이 나고 말았으니~~~
첫곡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인 ' 21번' 이어
1년전 작고한 모친이 가장 좋아한다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에 들어갔는데.....
감정이 격해졌는지,아니면 감기 때문이지 사레가 들어 연주가 멈췄다는.
몸을 돌리고 연이여 콜록 콜록,,, 3분여를.
2부에선 부친 작고 후 한동안 연주 못했다는 'G선상의 아리아',
그리고 프랑크의 '바이올린소나타 가장조'.
무사히 연주가 끝나자 환호,기립박수에 외침들,'사랑합니다!'.
그녀는 두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객석으로 날리고.
분위기에 한껏 취한 그녀는 앙코르를 6곡이나.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바이올린 정경화
https://www.youtube.com/watch?v=StGHCdQKdqQ
그녀 나이 74세.
세월에는 장사없고,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했던가.
그녀의 현에 예전의 날카로움이 다시 체워질 수야 없겠지만
이렇게 북한산 자락 한켠서 유유자적을 보니 순간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한적한 등산로에 웅웅웅~~
캐터필러 구르는 소리네요.
베낭을 살짝 꽁무니에 걸어 놓고
몸만 따라 오릅니다.
일주문 현판엔 삼각산 승가사
승가사가 창건된 때는 삼국시대.
조선 후기 민비와 엄상궁 시주로 중창도 했고.한국전쟁 때 전소.
삼각산이 북한산으로 불릴 때가 1710년대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이니
당연 '삼각산 승가사'가 되겠네요.
승가사란 이름은 당나라 때 생불로 여겼던 승가(僧伽)에서 왔고.
현재 비구니 사찰.
뒤에서 본 일주문
올라갑니다
몹시 미끄러워요.
협소한 땅에 초대형 석조 계단은 금방 나를 질리게 하고.
호젓한 산사를 생각하고 들르는 이는 촬영 세트장 같은 분위기에 실망할수도.
기존 도상(圖像)하고는 아주 먼 뒤죽박죽 9층석탑.
종로3가 파고다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비슷.
근래 작품으로 배율도 좋고 정밀하지만 정감은 안가요.
협소해 축대를 쌓아 겨우 땅뙈기좀 얻은 산사에 뭔 석탑은 저리 큰지.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대로
비좁은 산사에 걸맞는 3층이나 5층석탑이면 될듯.
비탈진 곳에 절이 들어서다 보니 석축으로 평지를 경영하고.
측면으로 난 계단을 타고 오릅니다.
대웅전
대웅전 바로 뒤에 그 유명한 마애불이 있어요.
대웅전 마당이라곤 50여평 내외.
마당 끝에 범종각이 딱하고 버티고 서있어 시야가 막히네요.
아래 9층탑 인근으로 옮기고 의자좀 놓고 하면 진짜 좋을듯.
삼성산 호압사 등 서울 근교 사찰 중엔 방문자 전망을 고려해 그런 곳이 꽤 있어요.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외부자 시각.
사용자 입장에선 주야로 타종도 하니 저곳이 편하긴 하겠죠.
저 범종각 위에 올라서 보는 눈맛이 좋아요.
지난 늦여름 사진으로 대체.
코 앞으로 북악산 산마루의 도성 성곽라인도 보이네요.
그 뒤로 남산타워,타워 뒤로 청계산도.
바로 앞이 북악산,우측이 인왕산
멀리 왼쪽이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
중앙이 청계산,우측 끝이 관악산,청계와 관악 사이가 수원 광교산.
관악산 왼쪽으로 낮게 소가 눕듯 산줄기가 이어지죠? 우면산(牛眠山)이네요.
한눈에 우면산은 관악산 지능선임을 알겠고.
움푹 파인 사이가 남태령.
한양 도성~한강(동작)~남태령~수원 광교산 일직선 라인!
정조가 초기 수원 화산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 참배 루트가 왜 저 라인이였는지 알수 있네요.
조선 초 한양 도성에서 남대문 지나 충청・전라・경상의 삼남지방으로 가는 '삼남대로'이기도
포클레인이 저기에 와있군요
대웅전 마당서 바라보니~~~
참 크다 커.요란하기 그지없고.
경전의 도상이란건 사라지고 온갓 좋다는 것은 다 모아놓은듯
한때 세속에서의 모토 '클수록 좋다!'는 물질주의의 반영?
이제 승가사의 하일라이트 마애불로 향합니다.
대웅전 바로 뒤.
중간에 맛뵈기로 승가굴이 있어요.
승가굴
보물로 지정된 승가대사상이 저 안에.
첫발자국.
오늘 첫 친견자는 나.
고려시대 초기.
높이 6미터.
마애불 바로 뒤가 바로 비봉.
추사 김정희가 최초 해석한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그곳.
비봉의 정기를 마애불이 이어받는 형국.
비봉 북쪽엔 진관사,남쪽에 승가사가 있네요.
입상이 아니라 좌상.
압도적인 크기와 수준 높은 조형으로 고려 왕실이나 한강 일대 호족 발원으로 추정.
밝은 표정에다 자태는 안정되어 있고.
섬세하게 표현된 위쪽의 상호나 대좌와는 달리,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음각으로 간략하게 처리.
비슷한 시기 작품으로 승가사 너머(북쪽)로 삼천사 마애불 입상이 있어요.
고려는 지방 호족들의 연합으로 세워진 왕조.
개경 중심 호족 중 특히 영향력이 드센 곳이 광주,양주 등등의 한강유역.
승가사 마애불도 그 호족들이 발원한 것으로 추정.
고려 현종이 1024년에 승가사를 중수할 때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네요.
이제 저 마애불 좌상을 보니 의문점이 하나 풀려요.
절집이 왜 이리도 협소한 곳에 들어섰을까? 하는 점.
바로 마애불이 조성된 후 그 유명세로 인해 절집도 커지고 커진 것.
이제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갑니다.
비봉~사모바위~문수봉~대남문 향해.
문득 생각이 들어요.
' 석조계단만 치워도 사격(寺格)은 두배로 오르겠다'
승가사 일주문을 나와 비봉(碑峰)으로
비봉 지나 사모바위
저마다 좋은 그림을 그리며 찰칵!
호젓하니 좋네요.
확실히 겨울엔 등산인구가 확 줄어요.
이길도 꽃피는 4월이면 성시를 이룹니다.
승가봉
바로 아래 승가사가 있어서 승가봉
간이의자 펴교 간식에 커피 한잔 합니다.
북한산 비봉 능선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곳.
전후좌우 드넓은 파노라마를 보여줍니다.
특히 정상 백운대 뷰!
멀리 백운대가 보이고(이전 사진)
앞의 좌우 긴능선은 의상 능선..우측 끝에 문수봉이(보이진 않고)
정상 백운대 우측으로 빼곰히 인수봉이,그 옆으로 만경대가 보이고.
정상과 앞능선 사이가 북한산성 영역.
앞 의상능선 산마루의 실금 보이시죠? 북한산성입니다.
뒤로 더 물러나 비봉 쪽에서 뷰!
앞 능선이 바로 응봉능선으로 평지와 접하는 지점에 진관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봉 좌우에 북한산 사찰의 원 투,승가사와 진관사가 있다는.
둘다 비구니 사찰.
그리고 1.21사태 때 김신조는 저 응봉능선을 탄 후
비봉 인근 사모바위서 마지막 일박하고 승가사~세검정 거쳐 청와대로.
문수봉 초입.
여기에 서면,특히 겨울엔 고민들좀 하죠.
쉬운 길,어려운 길...선택으로.
겨울 산행에 익숙치 않은 분이라면 무조건 쉬운 우회로를 택해야.
현 위치를 승가봉에서 보면 아래!
산마루 왼쪽 V홈이 청수동 암문.
우회로는 계곡 따라 청수동 암문으로 들어가고
정공법을 택하면 우측 암릉길을 타고.
참고로 청수동 암문은 이리~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 고갯마루에 위치.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
이제 문수봉 암릉구간을 오릅니다...결국 스릴을 택한 것.
지금 문수봉 일대는 눈바람으로 오리무중.
오늘 이 코스에서 스친 사람은 단 1명.
이 겨울,더우기 이런 꿈길이라면 한번은 듣고 가야겠죠.
물씬 눈폭풍의 광야가 그려지는 곡.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서디 18변주
철난간 부여잡고 조심조심
이 즈음에선 긴장 안할수가요.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
자체가 서스펜스,스릴에 어드벤쳐.
15분여 부여잡고 무사히 통과
이 지점서 백운대 정상 뷰가 환상이어요.(자료 사진)
백운대 정상 앞으로 노적봉,우측은 만경대,인수봉은 뒤로 숨었고.
우측 문수봉에서 흘러내려온 산성 석축 보이시죠?
왼쪽 고개마루에 청수동 암문이 있고.
10여분 꿈길같은 길이 이어지고
산성이 보입니다.
이 코스에서 만난 유일한 분.
문수봉 정상
승가봉이 그러하듯 바로 아래 문수사가 있어요.
'명산엔 명찰이 있다?'
이 명제가 맞는다면,명찰의 로케이션에 있어 가장 특이점은 뭘까?
뒷편으로 초대형 암릉군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는 것.
암릉이 없으면 우뚝 솟은 봉우리라도.
음악이 그러하듯 절집에서 그 베이스의 중요성이란.
우리의 전통 산수관의 사고체계 이래요.
산줄기를 통해 흘러온 기는 봉우리에 응축되고(특히 암릉),
그래서 그 아래에 집을 지으면 사는 사람이 그 기를 받는다는 것.
당연 사찰이 들어서면 기도발이 최고조에 이르겠죠.
백운대 정상서 서남쪽으로 10여키로 산줄기를 따라 흐르다 문수봉에서 응축되고 그 아래엔 문수사가,
다시 비봉으로 이어지면서 비봉 아래는 승가사가,
다시 비봉은 서북쪽으로 가지를 하나 뻗어 매봉 능선을 만들었으니,
매봉 아래는 진관사(전통 사찰음식 종가로 질 바이든 여사가 들렀던)가.
다시 문수봉에 서서 돌아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비봉은 능선은 S자를 두번 그리며 구비치고~
비봉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네요.
좌 멀리 가장 높은 봉우리가 비봉.
그 뒤쪽 아래로 비봉능선 출발점인 족두리 모양의 족두리봉(불광동),
비봉 앞으로 중앙에 비스듬이 선 바위가 사모바위..그 옆 능선이 응봉능선.
사진 바로 앞 암릉이 승가봉.
승가봉 좌측 계곡 중간 즈음 승가사가 보이고.
승가봉이 비봉능선 중 최고 풍광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수 있네요.
문수봉 바로 암릉 구간까지 포함하면 이리(이전 사진)
중앙 멀리 비봉 보이시죠?
또 하나를 느끼게 됐어요.
진흥왕 (534~576) 이 왜 한강 일대를 접수한 후 순수비를 저곳 비봉에 세웠는지를!!!
비봉능선서 가장 고도가 높은 비봉에 오르면
한강유역은 물론,인천 앞바다에 강화,그리고 개경 아래 임진강까지 훤하게 들어옵니다.
서해,한강 유역 일대로 들어오는 적들의 동태가 훤하게 파악된다는.
그런데 비봉에 오르는 건 위험해요.
사람이 오르는 데도 위험한데 당시 비를 어떻게 끌어올렸는지 경외감이 들 정도.
산에 오르면 역사가 보입니다.
그것도 입체적으로.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문화재청에 유감 하나!
위험성으로 현재 비봉 오르는 걸 금하고 있어요.
그래도 전망이 너무 좋고,
1500년 전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이라 몰래 몰래들 올라갑니다.
북한산 내 수많은 철제 데크가 있는데 비봉에도 설치하면 될터.
창령비,함초령비,마운령비,북한산비...
지금도 생생하게 외울수 있어요.그러나 암기만 하고 있을뿐....
진흥왕이 신라 영토를 확장하고 세운 척경비를 입이 아프도록 외워본들
이곳 비봉 한번 오르는 것만 못할 겁니다.
'역사란 무었인가'
비봉에 올라서면 역사 인식론 자체가 바뀔지도.
확신해요,
대한민국서 가장 생생하게 느끼고 배울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하나 꼽으라면?
북한산 비봉!!!!!
碑峰의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원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1816년 추사 김정희는 비봉에 올라 진흥왕순수비 라는 사실을 판명한 후
다시 찾았다는 기록을 옆면에 그의 필체로 새겨놓았고.
동북쪽을 향하니 백운대 정상이 보이고.
우측 실루엣은 도봉산.
문수봉 아래 문수사.
아랫 길은 구기동,평창동 가는 길
좌측 성곽은 대남문 지나 대성문으로 이어지고.
문수봉서 10분 거리 대남문 도착
아래 계곡이 북한산 중심인 중흥계곡.
계곡 따라 행궁,총융청,어영청 별관,승군사찰,각종 창고들이 들어섰네요.
이제 중흥계곡 따라 북한산성 정문인 대서문으로 하산합니다.
옛 석축들
대남문~대성문~대동문에서 중흥사에 이르는 중흥계곡엔 옛 석축이 많이 남아 있고.
평창동(平倉洞)의 유래도 바로 북한산성 주둔군인 총융청(摠戎廳) 식량 창고가 있어서.
북한산은 수도 한양의 진산이다 보니 조선 개국 이래 많은 이가 올랐죠.
그러다 1711년 숙종때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대대적인 북한산 산행 붐이 일어나요.
당시 사대부들의 북한산 등정 후 남기 유산기를 보면 북한산성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했음을 알수있고.
당시 사대부들의 북한산 등정은 풍광도 즐기고,
북한산성 내 성곽,성문,장대,행궁,사찰,병참기지도 구경하고,
산영루에 올라 한잔도 하며 시회도 열었다는.
그래서 요즘처럼 당일치기가 아니라 보통은 2박3일...혹자는 일주일.
북한산성 축조 이전엔 보통 1박2일.
주된 숙소는 중흥사,태고사,용암사 등등 승병이 거주하던 사찰.
등정 루트는 당연 도성서 가장 가까운 코스를 택했겠죠.
북소문인 창의문(지금의 자하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온 후 세검정 ~승가사 거쳐 비봉에 이른 후,
승가봉의 비봉능선을 타고 청수동 암문으로 들어간 후 대남문 거쳐 중흥계곡으로.
그리고 중흥계곡 상류에 있는 행궁을 들러본 후 중흥사,태고사,용암사 등지에서 숙식을 해결했네요.
당시 이들에게 중흥사는 베이스 켐프같은 곳.
신명현이 1796년 2박3일 북한산을 유람한 루트를 보면 이들의 유람 성격이 잘 나타나요.
1796년 신명현의 2박3일 북한산 탐방 루트
<사대부, 산수유람을 떠나다>(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암벽 구간이라 오르기 힘든 인수봉,백운대,만경대 등 정상 인근은 피하고
주로 북한산성 탐방루트 중심으로 북한산을 오른 것.
축성 후 숙종은 중흥사 거쳐 동장대 까지 올랐는데
당시 동장대는 달맞이 최고 명소가 되었습니다.
북한산성 내 최대 사찰 중흥사.
한국전 때 다 타고 터만 남아있던 곳에 새롭게 중축.
당시 중공군 주둔지가 바로 북한산.
b29 폭격기 폭격으로 산성 내는 쑥대밭이 되었고.
중흥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매월당 김시습.
매월당이 21살 때 이곳 중흥사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단종이 삼촌 세조에 의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유량길에 올랐고.
유랑을 거듭하다,
결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경주 금오산(현 남산)에서 썼네요.
당대 시인묵객들의 북한산 내 최고 인기를 누렸던 산영루(山映樓).
산그림자가 계곡물에 비췬다는 뜻.
매월당,추사,다산 등 수많은 사대부들이 들어앉자 마시고 놀고,
시회도 열며 시작(詩作)을 하던 곳.
북한산성 총괄 우두머리격인 총융사의 재임시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오매불망비 등등 23여기 산재.
한국전쟁 때 총상으로 홈이 패이고 부러진 비도 많고.
중성문.
평지에 가까운 대서문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이중성.
북한산성이 낙성되자 숙종이 행궁에 행차했어요.
그리고 명하죠.
"노적봉~의상봉을 잇는 성을 하나 더 쌓아라!"
노적봉이 보이네요.
중성문 성곽은 저 노적봉까지 이어집니다.
중성문 문루에 올라
대서문에서 바라본 정상.
북한산탐방지원센타(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동)에 이르니 어둠이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