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산행 3단계!
등산로 초입 남연군 묘 들렀다가
능선길 지나
청벚꽃 절정 개심사로 하산합니다
25일 일요일 충남 예산군 가야산.
가야산은 예산군(동)과 서산시(서) 사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고.
산행 들머리는 동쪽인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정상 가야봉 거쳐 개심사 주차장까지 11키로 5시간 예상.
등산로 초입, 남연군 묘가 나오네요
남연군(南延君,
1788∼1836)
어디서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
그럼 오페르트 도굴은?
네,오페르트 일당이 저 남연군 묘를 파해쳤죠.
여기는 아들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치를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에 열을 올리게 한 그 현장!
남연군 음택이 이곳에.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요 고종의 할아버지.
1868년 남연군 파묘는 당시 국제적인 논란이 되었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세력에 몸을 사리던 시절,
2대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묘를 이곳 가야산에 이장.
이장한지 7년 만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어요.
12세 때,후사 없는 철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르니 곧 고종.
그리고 몇년 후,
역으로 남연군 묘가 파해쳐지고.
한말 정치,문화,종교,외교사....등등
조선 후기 시대상이 상징적으로 응축된 그런 곳입니다.
남연군 신도비(神道碑)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평생을 기록해 무덤 앞에 세운 비(碑).
남연군(南延君)은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가 흥선군 하응(1820~1898,대원군)입니다.
신도비는 고종 즉위 후 1865년에 세웠고,비문은 영의정 김병학이,
남연군 세째 흥인군이 글을,장손자인 이재원이 새겼네요.
특이한 건, 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 3대 모두 처가가 여흥(여주) 민씨.
영의정 김병학?
폐단이 극에 달하자
대원군과 함께
서원철폐령을 내린 장본인.
발굴조사 중.
포근한 가야산 옥양봉이 보이고
저 너머에 개심사,서산마애불이 있습니다.
가야사터
가야사는 당시 가야산 대표 사찰.
저 구릉 위에 남연군 묘가 있어요.
돌기둥 보이시나요?
망주석( 望柱石) .
당간지주에 깃발을 꽃아 사찰의 영역임을 알리듯 음택 앞엔 망주석을 세우죠.
뒤쪽으로 가야산 정상 가야봉이 보이고
우측은 옥양봉
망주석 뒤쪽으로는 주산인 석문봉(653)이 있어요.
주산을 좌우에서 지켜주는 걸 신장(神將)이라 하는데 여기선 가야봉과 옥양봉이 그 역할.
봉분 방향이 주산(主山)인 석문봉(653)을 향하지 않고 옥양봉을 향하고 있네요
무덤의 정향은 북향이니 그런듯.
여하튼 음택의 로케이션이 시원 활달.
여기에 서 있기만 해도 앞이 틔여 시원하고 사방은 적당히 막혀 안온합니다.
명산엔 명찰이,
명찰이 들어선 곳에서 전망은 의심의 여지가 없죠.
그 중 부처님이 거하는 대웅전 앞이 으뜸.
그러니 사찰에 가면 대웅전 앞에 서봐야.
그런데요?
바로 저 봉분이 있던 자리가 바로 가야사 대웅전 앞 석탑 자리랍니다.
그리고 앞 석등 같은 석조물은?
장명등(長明燈)입니다.
대웅전 앞에 석등을 세우듯 힘 있는 사대부 묘 앞엔 장명등을.
죽어서도 부처의 권위를 차용한 것.
상중하 각각 4면에 정밀히 새겨진 화초들을 보면 왕조가 기울인 정성을 읽을수 있습니다
하대석의 매난국죽 사군자는 기품이 절로.
왼쪽은 난초,우측은 국화
왼쪽으로 정상 가야봉이 보이고.
우측 불룩한 곳이 풍수에서 주산인 석문봉이 됩니다.
그래서 석문봉은 봉황에 머리,가야봉은 우측 날개,그리고 옥양봉은 좌측 날개가 되는 것.
망부석이 예사롭지않네요.
가야봉 오른 후 우측 능선을 따라 석문봉으로.
그리고 석문봉 너머 일락산 거쳐 개심사로 하산합니다.
석양(石羊) 보이나요?
조선엔 없는 양들이 왜?
조선의 묘제들이 중국에서 넘어왔기 때문.
발굽 까지 새겨겼네요.
왼쪽 망부석 뒤로 지맥이 흐르고.
사진에서 보듯 봉분의 지맥(혈)이 뒤쪽 옥양봉이 아니라
왼쪽 지능선을 따라 석문봉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수 있고.
그런데 그 지맥이 약하다네요.
그래서 호사가들은,대원군 후손 왕가가 고종~순종 2대로 끝났답니다.
일대는 가야사(伽倻寺)가 있던 곳.
봉분 터에는 애초 금당,석탑이 있었고.
정면이 상가리....더 나가면 덕산면 덕산온천 단지.
풍수에서 왼쪽 서원산 줄기는 좌청룡에 해당.
봉분 앞 장방형 돌 보이시죠?
혼유석(魂遊石).
한자 그대로 망자가 노는 곳.
묘제 때는 후손이 올리는 제수(祭需)를 저기에 앉아 흠향(歆饗)하는 자리죠.
어떤 이들은 혼유석 위에 제수를 진설하곤 하는데
이는 망자의 얼굴 위에 올리는 거나 진배없겠네요.
요즘은 제삿상에 피자도 놓는다죠
피자를 혼유석에 놓는다면?
흠,피자 바른 망자의 얼굴이...
이 대단한 로케이션!
좌청룡 동쪽 서원산 아랫 자락에서 바라본 남연군 묘 & 정상 가야봉 모습입니다.
죽은 남연군이 가야산의 모든 걸 가져갔네요.
발복 안한다는 게 이상할 정도.
무덤 주변 암반들 한번 보시죠!
화강암 암반층에 무덤이 들어섰다?
네,저 암반들이 그냥 바위가 아녀요.
정말 흥미로운 서사(敍事)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서사(敍事)...1
남연군엔 아들이 4명으로 막내가 흥선군 하응(대원군).
대원군 20세 즈음 경기도 연천서 2대천자지지(二代天者之地)의 명당이라는
지사(地師) 정만인(鄭萬仁)의 말을 듣고 가야산으로 이장을 합니다.
탈골된 부친을 실은 상여를 메고 이곳 가야사 북쪽에 일단 가매장.
(상여는 중요민속자료로 보존되어 있음)
문제는 자리에 가야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봉분 자리엔 금탑이.
결국 대원군 형제들은 일대 가야사를 불태우고,
금당 앞 석탑을 부순 후 아버지 봉분을 씁니다...이 때가 1845년.
당시의 상황은 매천 황현(1855~1910)이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전하고 있습니다.
매천 황현이요? 고향 구례서 은둔하다 매천야록을 남기고 경술국치 때 자결.
매천야록에 전한 내용을 정리하면,
1. 안동 김씨 일가의 세도정치에 숨죽이며 파락호(破落戶)로 지내던 흥선군.
지관 정만인으로 부터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명당자리를 들음.
2. 당초 정만인은 만대에 영화를 누릴 자리(萬代榮華之地)로 오서산(홍천)을 함께 알려주었는데,
흥선군은 2대 천자 자리를 선택함. 그 자리가 바로 가야사 금탑지.
3. 1844년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오층금탑 뒤 북쪽 기슭으로 옮김.
4. 그리고 전재산을 판 2만 냥 중 1만 냥을 주지에게 주고 절을 불태우도록 함.
(일설에는 충청감사에게 뇌물을 줘 스님들을 내쫓고,마곡사 승려들을 통해 불지르게 했다고 함.)
5.이듬해 5층금탑(석탑인데 금칠해서)을 부순 후 그 자리에 남연군 묘를 씀.
오층금탑에서는 사리함이 나왔다 함.
6. 마지막으로 도굴을 막고자 철 수만 근을 붓고 강회를 비벼 넣음.
석가가 열반해 있는 그 자리에 남연군이 들어감.
이런 대사건에 인근 민가에 전하는 얘기가 없을리가요?
가야사지 동쪽 2백m 서원산 인근에 '상기리 미륵불'로 불리는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어요.
입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가야사가 불 탈 때 분노해 돌아섰답니다.
실은 절터의 기가 골짜기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거나,
북쪽 계곡에서 들어오는 화마를 물리치려고 풍수적으로 조성했겠죠.
걸어도 5일...그럼 상여가 연천서 어떻게 가야사까지?
연천 인근 임진강~한강과 만나는 조강(祖江)~강화해협~ 서산 앞바다서 뭍으로...가능성이 크고.
서사(敍事)...2
대원군의 기개(?) 같은 것을 엿볼수 있는 일화도 매천야록에 전합니다.
4형제 중 형 3명이 금탑을 부수기 이틀 전 밤 똑같은 꿈을 꿈.
"나는 탑신이다.너희들은 어찌하여 내 거처를 뺏으려하는냐?
끝내 뺏으려하면 너희들은 급사할 것이다"
3형제는 일어나 꿈 얘기를 하며 주저하자,막내가 이리 맞받아 침.
"형님들,그렇다면 여긴 진정 명당이요! 인명은 재천인데 신이 죽으라 빈들 죽겠소?
형님들은 자식이라도 있으나 나는 핏덩이 하나 없소.두려울 것 없으니 헛된 망상들 마시요!"
그러고는 탑을 도끼로 깨부순 후 탑을 받치고 있는 바위도 깨려는데 튕기기만 함.
튕겨나가기만 하자 흥선은 하늘을 우러러 저항하는데,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단 말이요!?"
그러자 도끼는 튀지 않았다고 함.
묘를 쓴 후에는 도굴을 막고자 철 수만 근을 붓고 강회를 비벼 넣었습니다.
서사(敍事)...3
그리고 7년 후!
철종 3년(1852) 둘째 아들 재황(載晃)을 얻으니 그가 바로 고종.
남연군의 음덕으로 발복한 것.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음덕에 감사하고 가야사에 보답하고픈 게 인지상정.
대원군은 가야산의 좌청룡 서원산 자락에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큰 아들 재면을 시주자로 하는 왕실 원당 사찰 보덕사(報德寺)를 세움.
현재 보덕사는 비구니 사찰로 정갈한 절집이네요.
서사(敍事)...4
다시16년 후!
남연군 묘는 이장 23년만인 고종 5년(1868)
오페르트(Oppert, E. J.)가 파해치면서 역사의 현장이 됩니다.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죽은 남연군을 볼모로 잡으려 한 것.
1. 먼저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다국적 도굴단을 조직함.
2.오페르트는 자본가 미국인 젠킨스(Jenkins)로부터 지원받고,
3.병인사옥 때 탈옥한 프랑스 신부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로 부터 가이드 받음
4.조선인 2명, 백인 8명, 말레지아인 20명,필리핀 중국선원 등 140명에 이르는 도굴단 완성.
5.수백톤 증기선으로 상해를 출발해 아산만 행담도에 정박 후 베이스캠프로 삼음.
6.행담도에서 작은 증기선으로 갈아탄 후 지금의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 예산군 구만포에 상륙.
7.러시아군 사칭하며 덕산군청을 습격 후 도굴을 시작.
8.그러나 단단하게 비벼 넣은 석회 등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
9.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준 명당이라 대원군 분노는 하늘에 닿음.
이후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
10. 나아가 현존 왕가 도굴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킴.
11.젠킨스는 고발당해 기소(증거불충분으로 무협의 받음),기획자 페롱은 본국으로 송환.
이는 그리피스(1882~1911)의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Corea the Hermit Nation'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최초의 영문 저술로,
현지서 9판까지 찍어낼 정도로 인기 있었음.
일요일이라 등산객이 재법 되네요.
등산로 바로 옆이지만 남연군 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고.
명당이 괜이 명당이 아니죠
적어도 거기에 서면 전망은 타의 추종을 불허.
음택 풍수를 믿든 안믿든 왕을 만들어 낸 명당이라,
당대의 사고체계를 이해하는 측면서도 서볼 가치는 넘치고 넘침.
들머리 남연군 묘,가야산 산행,날머리는 개심사.
30여분 머물다 이제 본격 산행합니다.
겹벚꽃이 한창
가야산엔 저수지가 참 많아요.
서해안 쪽엔 큰 산이 없다 보니 농업용수가 부족해서죠.
우측으론 옥양봉이 보이고
사진 왼쪽 저수지 바로 위쪽에 현대 음택풍수가 손석우 음택이 있습니다.
앞쪽 비스듬이 사선으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석문봉 지맥으로
우측 지맥 끝에 남연군 묘가 있고.
계곡 따라 오르는 길이라 볕도 가려져 좋고
계곡물을 이용한 계단식 논.
지금은 경제적 가치가 없기에 방치되어있고
논두렁을 석축으로 쌓아 논배미를 만든 거죠
옛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읽히고.
중턱부터 따라오네요. 다 이유가 있더라는.
베낭에 들어있는 육류 냄세를 맏고는 그 사람만 에스코트 해요.
앞서 가다 기다리다를 반복.
"꺼네 좀 주시죠?"
" 조금 가면 되니 정상에서 줄려구요"
" 지금은 안되!"
목소리를 좀 높이니 금방 눈치를 채고는 사라지더라는.
그리고는 다른 등산객 에스코트 시작.
꽃은 아니고 당단풍 새순입니다.
바람꽃
정상서 기다리네요.
가야산(678m)..부처의 산이라는 뜻
내포 일대의 중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아래 상가저수지에서 올랐네요
앞 산이 서원산(481).
사진 우측은 예산군 덕산면.
서원산 너머에 추사 김정희 고택(예산군 신암면)이 있습니다.
오페르트 일당이 정박하고 들어온 구만포가 저 서원산 너머에.
그리고 덕 산을 거쳐 아래 상가리로 들어왔고.
상가 저수지 좌측 바로 아래가 남연군 묘.
포근하게 감싸인 게 한눈에도 명당이라는 느낌이 오고.
주산 석문봉은 봉황의 머리.
왼쪽 봉우리가 주산인 석문봉의 좌익 옥양봉.
내가 서있는 가야봉은 우익.
그리고 각각의 산세는 이어져 가야봉은 원효봉을 낳아 우백호.
옥양봉은 서원산(저수지 너머)을 낳아 좌청룡.
가야산 서쪽 서산시.
왼쪽 아래로 한서대학교 건물이 보이고.
더 멀리 희미하게 안면도와 천수만이.
앞 봉우리가 석문봉..그 뒤쪽이 옥양봉.
좌익 옥양봉..주 산(主山) 석문봉.. 우익 가야봉(내 서있는 곳)의 그림이 그려지나요?
능선 타고 석문봉으로 향합니다.
능선 우측은 예산군 덕산면,좌측은 서산시 해미면,운산면.
능선 너머 북쪽은 당진군으로 아산만과 접해 있고.
뒤돌아 보니 정상 가야봉
가야봉 뒤쪽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원효봉.
뒤로 옥계저수지와 덕산면이 보이고.
원효봉 너머에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이 있습니다.
덕숭산은 지맥이 가야산으로 연결되고.
가야산과 덕숭산 사이 45번 국도는 덕산에서 해미읍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덕숭산 너머에 충남도청이 들어선 내포신도시.
석문봉서 바라본 가야봉,원효봉
석
문봉(653)
멀리 천수만 방조제로 생긴 간월호가 좌에서 우로 길게 보이고
예전 일대는 서해바다로 바닷물이 가야산 지척 까지 닿았다는 것을 알수 있네요.
산에 오르면 산만 보이는 게 아닙니다.
생태학이,문화가,역사가 보입니다.
자연지리,인문지리는 더욱 선명해지죠.
결국 생태,지리,인문,문화,역사가 한가닥으로 묶여서 보인다는.
개인적으로론 산을 더욱 탐하게 된 연유이기도.
유발 하라리는 어떻게 인류 문명사를 그리 매력적으로 통찰해냈을까?
산에 올라 보면 더 많이 보이고,보이는 게 엮이고, 통찰되듯
그런 유형의 어떤 뭐가 있지않을까 하는...
석문봉서 바라본 서산시 일대.
앞 능선 아래쪽으로 바짝 붙어 좌우로 길게 늘어진 야산 보이시죠?
그 왼쪽으로 해미읍이 보이고.
늘어져 있는 야산 왼쪽 끄트머리가 해미읍성.
사진 왼쪽으로는 태안군 안면도의 천수만이 밀고 들어오고.
일대는 간척지로 예전엔 서해 바닷물이 해미읍성 앞 까지 들어왔어요.
그래서 해미읍성 정문은 왜구를 막아야 하기에 서문(西門)이 된 것.
해미읍성과 가야산 사이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는 데,
서산 지나 당진군을 가로 지른 후 아산만을 서해대교를 통해 평택으로 건넙니다.
서해대교 그 중간에 있는 섬이 오페르트가 정박했던 행담도.
중앙은 서산시
우측 멀리 당진군,좌측 멀리 태안군.
내포 지역을 흔히 비산비야라 합니다.
접시를 엎어놓은듯 좁은 벌판 사이로 낮 은 야산이 드문드문 드러나죠.
큰 산이 없다는 얘기.
요즘 충청도 하면 천안~공주~청주~대전이지만
옛사람에 충청도 상징은 이곳 가야산 주변 내포지역에 이었어요.
당대 최고 인문지리학자요 실학자인 이중환.
그가 1751년 편찬한 베스트 이자 스테디 셀러인 택리지(擇里志)에서 말했죠.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제일 좋은 곳이다.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진년과 병자년 두 차례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내포(內浦) 를 아시나요???
가야산을 알려면 내포를,내포를 알려면 가야산을 알아야죠.
괜히 홍성과 예산 사이에 내포신도시까지 만들며 충남 도청이 들어선게 아니라는.
내포를 모르면 충청을 안다고 할수 없죠.
충남의 정체성이란게 있다면 그 dna는 내포에서 부터.
여기서 내포란 가야산을 빙두르고 있는 10개 고을을 말합니다.
내포 출신 인물 한번 말해 볼까요? 놀라지 마시길!!
최영,이순신,성삼문,추사 김정희,면암 최익현,김옥균,김좌진,윤봉길,남노당 박헌영,
최초 신부 김대건,상록수의 심훈,만해 한용운,고암 이응로 등등.
內浦라?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온 지역의 포구를 말하겠죠.
가야산 일대에 그런 포구가 많아요.
가야산을 중심으로 해 12시 시계 방향으로,
당진군,예산군,홍성군,태안군,서산시가 에워싸고 있습니다.
지금은 간척으로 상전벽해지만 예전 일대는 서해 바닷물이 들어왔죠.
특히 당진군 북쪽으로는 아산만(서해 가장 큰 만)이 더욱 내륙 깊숙이 들어와
물길이 평택,아산시,예산까지 미쳤네요.
그 물길을 타고 오페르트 일당은 예산군 구만포까지 들어왔고.
그래서 아산만방조제와 삽교천 방조제가 만들어진 것.
(평택시 미8군 험프리 기지도 아산만 방조제로 인해 생긴 평택호에 접해 들어섬)
서산시 중앙은 가로림만이 내륙 안으로 길게.
태안군 안면도와 홍천군 사이의 천수만 물길은 해미읍성 입구까지 닿았고.
그래서 내포지역이라 불렀고,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다음은 택지지(擇里志)에서 평한 내포.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제일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이백 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는데,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 가운데 또 한 개浦가 있다. (…)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아울러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진년과 병자년 두 차례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산은 지역을 가르지만 통일하는 구심점이 되기도 합니다.
가야산은 내포문화권의 근본이 되고 예나 지금이나 내포의 중심.
가야산이 있음으로써 내포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결속되었습니다.
가야산 자락에 유난히 저수지가 많은 것만으로 봐도 가야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수 있고.
동쪽 자락의 상가저수지·옥계저수지,
서쪽 자락의 산수저수지 등 10여개는 내포평야의 젖샘인 거죠.
요즘도 충청남도 내포 지역 최대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식수.
왼쪽 멀리 천수만 간월호 물길이 들어오는게 보이시죠?.
중앙 좌우로 길게 늘어진 야산 왼쪽이 해미읍성
바로 산 아래 일락사도 보이고.
하산은 우측 옥양봉 능선을 버리고 앞 능선을 따른 후 우측으로 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