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에서 2 0분만에 도착한 도솔암 주차장.
도솔암 직전 능선까지 군 작전도로가 나있어요,,, 택시도 가능 .
도솔암 까진 800미터,정상까진 6키로 정도.
능선 타다 정상에서 미황사로 하산합니다.
도솔암은 잠시 아껴두고 10여분 남진,
멀리 남해 땅끝이 들어오는 도솔봉으로.
도솔봉에서 바라본 땅끝!!
길고 긴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저기서 바다로.
한반도 땅끝이라는 데서 이는 상념은 어쩔수 없고.
정면으로 사자봉 전망대
보이시죠?
백두대간에서 분기된 낙동정맥이 부산 몰운대서 바다로 빠지듯,
호남정맥에서 분기된 땅끝기맥은 월출산~두륜산~달마산을 거쳐 땅끝 사자봉서 빠집니다
몰운대가 동해와 남해의 기준점이듯 사자봉을 기준으로 우측은 서해 ,좌측은 남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우리나라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 북은 함경북도 은성부로 잡았네요.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 국토를 정말 사랑했던 육당 최남선이 처음 사용한 조어(造語)입니다.
그는 '조선상식문답'에서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은성까지를 2천리,
도합 한반도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불렀다는.
왼쪽 보이는 뒷섬이 고산 윤선도 (尹善道,1 587~1671) 의 이상향 보길도 .
그는 병자호란 때 가솔 수백명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했 어요.
그러나 이미 청군에 길이 막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배를 돌려 귀향 중 태풍에 밀려 정박한 게 보길도.
고산은 51~85세 까지 한양을 오가며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
우리말로 쓰여진
가사문학의 최고봉 '어부사시사'도 저기서 탄생.
고산의 흔적은 해남 완도 강진 등 서남해안,그리고 후대에 크게 미쳐,
증손자가 공재 윤두서,윤두서 손녀가
바로
정약용 어머니.
오우가를 쓴 금쇄동도 이곳 달마산과 지척.
고산의 다섯 벗 이야기, 오우가,,,그 시절 회상하며 한번 읊어보죠!
- 오우가 ( 五友歌 )-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구름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위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 서리를 모르는다
구천에 뿌리 곧은 줄 글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도솔봉에서 서해,,,, 길다란 섬이 진도.
바로 앞 만이 땅끝 77번 국도가 지나는 송지해수욕장.
허준 유배지도 저기에.
도솔봉에서 동쪽,,, 완도.
왼쪽 멀리가 강진 마량으로 앞바다가 강진만.
백해 본격 산행 시작합니다.
북으로 북으로!
앞 해안가 농토 일부는 간척지.
이미 고도 4백미터 능선길 까지 차로 이동했기에 도솔암까진 산책하는 기분 .
지금 가는 방향은 남행이 아니라 북행.
계속 가면 정상 거쳐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으로 이어집니다.
현호색
산길 주변이 순간순간 환해져요
바위산에 양지바른 능선길이라 봄꽃들은 더욱 화사 .
산자고(山慈姑)
난초과,,,정갈하고 길쭉한 잎에 눈길이 더 갑니다.
여러 튜립 야생종 중 하나로 한반도엔 산자고 한 종만 있는 토종.
꽃말은 봄처녀 & 가녀린 미소.
푸릇한 잎들이 받쳐주니 더욱 싱그럽고.
능선길 기준 서쪽은 해남군 송지면
불꽃이 이는듯 .
기도발 잘 받는 산을 '화체(火體)의 산'이라 합니다.
불꽃처럼 끝이 뾰죽뾰죽,
불산의 전형이 달마산.
남도의 금강산,,,,맞죠?
481m 낮은 표고에도 불구하고 산세가 수려합니다.
그런데 암릉들이 유별나게 희네요. 설악산 암릉하곤 또 다른.
화강암이겠지 생각했는데 규암이라네요.
규암은 눈처럼 흰색에 각이 진 절리를 지니는 특성.
석영질을 80% 이상 함유하고 있어 눈처럼 하얗다는.
설악처럼 가을 단풍은 하얀 암릉을 배경으로 했을 때가 가장 현란해요.
눈같이 흰 규암으로 이루어진 달마산의 가을 이 더욱 멋진 이유.
오우가 처음과 끝 소절
.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아래 구불구불 길 보이시죠?
저 길을 타고 주차장 까지 올라왔고.
능선길이 동쪽 사면으로 치우치니 눈맛이 상큼.
우측으로 다도해 섬들이 줄곧 따라오고.
완도가 보이네요.산 아래는 해남군 북평면.
완도
정상엔 봉화대가 있는데 이곳 달마산 정상 불썬봉으로 이어집니다.
좌우 시야가 가리지 않아 더욱 좋고.
주차장~도솔암 8백여미터는 정말이지 사색길로 손색 없어요.
택시나 승용차로 주차장 까지 이동만 하면
도솔암~정상~ 미황사까지 산행은
누구에게나 열린
남도
여행길 환상의
피날레가 될수도.
멀리 보이는 봉우리 너머가 불썬봉,,, 불썬봉?
'불 피우다' 이곳 방언이 '불 쎄우다'랍니다,,이게 불썬봉으로.
도솔암이 지척.
도솔암( 兜率庵)
독특한 풍광을 갖고 있어 드라마,cf 명소.,,추 노 각시탈 등등.
직접 가보지는 않았어도 화면이나 사진을 통해 간접 경험 정도는 했을 터.
전국에 도솔암이 참 많아요,,,선운사 도솔암이 특히 유명.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다나.
정면,측면 각각 한칸,,,겨우 암자 구색을 갖췄다는 .
정유재란 타버리고 현대에 와서 지어졌고.
앞쪽으로 의상대
아래는 의상대서 바라본 도솔암
전설이 없을리가.
도솔암을 받치고 있는 암릉 밑으로 마르지 않는 용담(龍潭)이.
용담에서
천년을 기다린 용은 천년이 되는 날 승천했고.
생각보단 전설이 밋밋.
도솔암 작은 안마당에 서면 해남 앞바다가 멀리.,,보이는 섬은 진도.
김 양식 발들이 보이고.
도솔암 앞 바다는 남해와 서해의 경계 .
그래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
.
도솔암에 이르는 방법은?
1. 도솔암 주차장에 차를 대고 15분 가량 걸어오든지(사색길)
2.미황사에서 도솔암까지 1시간 30분 산행하 던지(달마고도라는 테마 길이 잘 닦여있음)
능선 따라 북으로 북으로.
산행 길 내내 완도를 벗삼고.
산자고,,,, 잎이 예술.
산길 주변은 산자고, 진달래 천지.
남산제비꽃,현호색도 간간히 보이고.
남산 제비꽃
남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남산제비꽃이라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분포.
꽃에서는 향긋한 분 냄새가 난다는데 허리숙여 코를 댈 엄두는 안나고.
비슷한 꽃이 하나 있어요,,, 그러나 잎이 판이한.
남산 제비꽃
태백제비꽃
태백산에서 처음 발견되어서.
남산과 태백의 잎 차이가 분명하죠?
네!! 어느 시인 말대로,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갑니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희디 흰 순백에 검색의 손길이 가는 거는 어쩔수 없네요.
춘란
봄을 알려주기에 보춘화(報春花)라고도 합니다.
노루귀가 무더기로
노루귀
파설초(破雪草) 라고도.
破雪草 한자에 노루귀의 뜻하는 바가 다 들어있네요.
노루귀는 다양한 색상으로 꽃을 피우죠.
얼레지와 같이 꽃말은 '바람난 여인'
숲에서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은 볼 수 없는 꽃이기도 .
키가 작고 바닥에 바짝 붙어있기 때문.
그런데 왠 노루귀??
노루귀가 꽃처럼 생겼나?
아뇨! 잎을 보 면 노루귀란 이름에 끄덕끄덕들 합니다.
갓 움트는 잎들이 짐승의 귀를 닮았죠.
귀 주변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한 것도 그렇고.
영락 없는 동물 귀를 닯은 노루귀잎.
순대국 좋아하시는 분들은 금방 느낌 오실듯
달마산이 특이한게 동쪽은 바위산,서쪽은 흙산,,,그리고 너머는 바다.
산자고 군락지.
정상은 저 봉우리 너머에
왼쪽으로 완도대교
오던 길
우측으로 땅끝 사자봉 전망대가 보이고
능선길 좌우 동백 터널도 통과.
봄에 피니 동백 아닌 춘백.
오늘 주인공은 단연 산자고
남산 제비꽃
정상 불썬봉(481)
이름이 특이하죠 그래서 더 반갑고.
불썬봉?
'불을 썼던(켰던) 봉우리'라는 뜻.
해남에는 모두 7개의 봉화대 가 있었다네요 .
땅끝 갈두산(사자봉) 봉수대는 해남의 진산 금강산 봉수대로 연결되고,
이곳 달마산 봉화는 코앞으로 보이는 완도 봉화대로 부터 신호를 받아 관두산 봉수대로 연결 .
북쪽으로 멀리 두륜산
분하구처럼 연봉들이 빙둘러쳐 있는 것 보이시죠?
그 안에 대흥사가 있습니다.
땅끝 전망대도 보이고.
백두대간은 호남정맥을 낳고,
호남정맥은 땅끝기맥을 낳고,
장흥서 분기한 그 땅끝기맥은
월출산~다산초당의 만덕산~주작산~두륜산을 거쳐 이곳 달마산에서 마지막 용트림을 .
그 여진이 이어져
땅끝 사자봉에서 바다
로.
(땅끝기맥은 당연 분수령을 이뤄 비 오면 능선 동쪽은 장흥 강진의 탐진강으로,서쪽은 영산강으로)
지구는 자기장 덩어리.
지구 내부 외핵은 철,니켈 성분의 액체,,, 온도 차이는 대류를,,, 대류는 자기를 만들고.
나침판이 남북을 가리키는 이유.
자기장은 상공 수십키까지 퍼져 태양풍이나 우주 입자를 막아주고.
당연 그 기는 지구 표면에도 있을 터.
(주: 이하는 과학적 근거 없음)
그 기는 흙산이 아니라 바위 산에 풍부하고.
바위 중에서도 맥반석,화강암 순으로.
그래서 기운을 받으려면 바위산으로 가야.
이게 무속인들이 계룡산,월출산,금강산,설악산 등 바위산을
선호하는 이유
.
아래로 미황사가 보이고,,, 보이는 섬은 진도.
신라 경덕왕 (749) 때 돌배가 저 앞 포구에 닿았어요.
의조화상이 꿈을 꿨는데,
귀인이 나타나 인도에서 귀한 배가 올터이니 어서 사자포구(현 갈두항)로 가라했답니다.
가보니 정말로 경전과 불상을 실은 금인(金人)이 탄 돌배 (石舟) 가.
의조화상은 금인에 큰 절을 올리고는 경전등을 소 등에 싣고 돌아왔고.
그러나 도중에 갑자기 소가 드러눕고 울며 움직이지 않더라는.
'아,이게 부처의 뜻이구나!' 여기고 그곳에 절을 지으니 곧 미황사!!
美
黃寺~~
'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에서,'黃'은 금인(金人)의 황금 빛에서 유래
.
이는 1692년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는 '미황사사적비'에 나온 얘기.
보통 불교는 고구려 때 북방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되어있죠.
그러나 서남해안엔 남방전래설을 믿게하는 설화,전설이 많아요.
미황사 설화도 바다를 통한 남방전래설 중 하나.
그래서 인지 미황사 부도,전각엔 바다 생물을 조각한게
많고.
그런데,
소의 눈,울음소리는 현대인에겐 슬픈 그런 이미지.
그러나 옛사람들은 그러지도 않은 듯.
우명산(牛鳴山)이란 이름이 몇 있어요.
선사들은 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그리고 절이 있는 산이름을 우명산(牛鳴山)이라.
결국 그 시절 소가 중요했다는 얘기!
먼저 사진 우측 공재 윤두서 고택 마을좀 보실레요?
고산 윤선도,다산 정약용은 누구나 알지만 공재는 많치 않을 터.
하지만 이 자화상(아래)을 내밀면 아하! 하시겠죠.
국보 240 호 , 윤두서의 자화상
공재 고택이 있는 저 일대가 현산면 백포리로 마을 전체가 죄다 조선시대 간척지.
간척 주간 사업자는 바로 고산 윤선도 등 윤두서 선대및 후대.
공재는 간척과 농장 관리 차원에서 간척지에 별서를 짖고는 본가인 녹우당을 오가며 살았고.
공재고택 (중요민속자료).....해남읍 현산면 백포리
미황사 아래로 저수지도 많이 보이죠?
해안가 일대 지역이 간척지였다는 간접 증거.
강화도 1/3은 간 척지였어요.
지금은 강화도 본섬에서 마니산은 뭍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선 조 지도엔 사이에 바다가.
간척으로 본섬과 붙은 것이죠.
교동도도 예전엔 여러 섬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간척으로 하나의 섬이.
간척의 역사는 고려 몽고항쟁기 부터.
강화도로 몽진한 조정은 농지확보를 위해 대규모 간척 사업을 시행하죠.
석모도,교동도,영종도 등등.
공재 가 백포리 바닷가에 별서를 짓고 살았던 것도 바로 간척지 관리 때문.
별서(別墅)는 보통 별장을 뜻 하는데
더 정확한 의미는 농장이나 들에 지은 집으로 농장 관리가 주 목적.
공재 고택 주변은 죄다 공재 소유지(간척 사업은 윤선도 증조부 때부터).
공재는 백포 별서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백포별서도(白浦別墅圖)도 그 하나.
해남윤씨 별서나 정자가 한때 20개 까지 있었다는 데 이는 간척지 관리가 목적이였을 터.
해남을 넘어 완도,진도,고금도,강진만 일대에도 해남윤씨의 간척지가 있었습니다.
-공재 윤두서 (1668~1715)-
공재 삶엔 스토리가 참 많아요.
공재 얼굴을 다시 한번 보죠.
회화사 불후의 명작,자화상의 효시.
동서양 초상화 통틀어 인간의 내면을 가장 형형하게 표현한 명작.
고산 윤선도의 증손(종손).
공재 손녀가 다산 정약용 어머니.
(요즘 같은 장수 시대라면 그는 다산 어린 시절을 보았을 수도,,,그러나 48세 졸)
겸재 정선,현재 심사정,공재 윤두서,,,이리 3재라.
실학의 선구자. 사실주의 회화의 맨 앞 자리 .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남인이라는 이유로 성균관 입학을 포기하고 한양을 오가다 향촌에 은거.
(남인 조부 윤선도는 송시열 카운터파트로 13년을 유배생활)
출세 길에서 소외된 옥동 이서(녹우당 현판 씀) , 성호 이익(둘은 형제) 등 남인 학자들과 절친.
공재 위상은 성호 이익이 찬한 제문을 보면 알수있으니,
/우리 형제는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노승도 (老僧圖),윤두서, 149.5 × 50.4 cm
늙은 고승이 먹빛 가사를 입고 긴 지팡이를 짚고 가는 광경을 그린 그림 .
숙달된 솜씨로 매우 빠르게 그린 듯 흘러내리는 먹선 이 아주 자연스럽고 .
선종화 처럼 붓질을 되도록 아끼면서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의 요점을 간략히 묘사 .
마치 뒤편에서 바람이 불어 댓잎도 진행 방향으로 날리는 듯하다(옮김)
공재 또다른 대표작으로 노승도 (老僧圖)가 있네요 .
자화상 처럼 선승의 표정이 리얼하고 디테일.
여기서 관심사는 그림의 예술적 성취도가 아니라 미황사 관련.
저 배고픈 노승이 미황사 스님 아닐까 하는 .
쑥캐는 여인,목기 만드는 촌부,짚신 짜는 노인 등에서 보듯 공재는 서민, 스님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리얼리즘 경향에 이는 김홍도 민속화 풍속화로 이어지는 선구적 작품.
(조선 후기 회화사는 겸제정선의 진경산수, 남종화 그리고 단원 김홍도,혜원 신윤복으로 대표하는 풍속화 이리 셋.
그리고 이 셋의 꼭지점이 거슬러 오르면 만나는 이가 공재라는.)
공재는 한양,본가인 녹우당과 백포를 오가며 문사,예인적 삶을 살았는데
특히 대둔사(대흥사) 스님과 교류가 많았다는.
저 노승도는 대흥사,아니면 미황사 스님이 모델 가능성이 크겠죠 .
공재는 종가인 녹우당에 거주할 때는 가까운 대흥사,간척지 백포에 머무를 때는 미황사를 오갔을 터.
역사는 흘러 원교 이광사,다산 정약용,추사 김정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 의
유배지 삶이 대흥사와 밀접했던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고.
또한 조선 후기는 다시 사찰이 지역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던 시기.
완도대교
왼쪽 바다 건너가 강진 마량면.
가운데 좌우로 길쭉한 섬이 고금도,,,모두 다리로 연결.
왼쪽 깊숙한 바닷길이 강진만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다산초당&백련사가.
조선 대 마량은 제주도 가는 중요 바닷길.
마량 (馬良) 이란 지명도 제주도 말이 육지로 온 후 적응기간을 보냈기에.
고려 때 강진청자를 실은 개경행 배의 출발지도
마량항.
미황사로 하산합니다.
소나무는 거의 없어요.
활엽 상록수 절반은 동백 혹은 사스레피나무.
나머지는 참식나무, 후박나무, 광나무, 붉가시나무.차나무
사스레피나무군 (차나무과).
동백과 더불어 달마산의 대표적인 난대상록활엽수.
꽃들은 아기 손톱만합니다.
암수 따로인데 이건 암꽃.
(2018년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생강나무
하산길이 온통 동백나무 숲
산 속 이여선지 때깔이 더욱 곱고
달마고도(達磨古道)
2017년 열린 달마고도(達磨古道)를 아시나요?
미황사에서 시작하는 '달마산둘레길'로
달마산 허리를 한바퀴 도는
17키로
힐링 루트,,,6시간 소요.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장비 사용 없이 사람의 손으로만 개척 .
미황사 주지인 금강 총감독에 당시 이낙연 전남지사 지원.
길은 흙길로 미황사 까지 이어집니다.
구글 어스로 본 달마산&달마고도(達磨古道)
땅끝기맥 마지막 줄기가 바다를 향해 깊숙히 밀고 들어감 형국.
왼쪽이 남해,우측은 서해.
300여미터 고도에서 달마산 허리길을 빙돌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서해 진도,땅끝 사자봉,남해 완도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스레피나무
미황사 동부도
어?? 예전에 없던 당우까지 들어섰네요.
미황사가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사세도 덩달아.
아랫쪽엔 서부도가 있습니다.
승탑 몸돌에 새겨진 조각 보이시죠?
청설모,화병 속 연꽃,거북이 등등.
해안가 사찰의 특성.
청설모인듯
거북
오리
게와 망둥이
길이 넓어 진거 보니 다 온듯.
절마다 '참선수행중' 푯말은 참 많아요.
달마고도 출발점, 미황사 도착
편이상 동선을 진입로 부터 정리!
일주문
사찰 입장료가 없네요.주차도 공짜.
이런 곳 없습니다.
계단의 자연석은 일일이 쪼고 다듬은 것.
미황사 내 계단 등은 기계가 아닌 거의가 직접 석공의 손으로.
진입로 좌우는 대표적인 동백 군락지.
동백이 특이한 게요?
꽃들이 참 개별적이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피어요.
때문에 개별적인 선명성에도 꽃들이 한눈에 들어오질 않고.
사진 찍기도 힘들다는 얘기.
입장료도 안냈으니 저 찻집서 차 한잔.
계단 넓이도 사람 보폭에 맞췄고
미끄럼 방지,,, 정으로 쪼고.
자하루 (紫霞樓)
앞 서해 바다 낙조가 멋들어져서.
미황사&대웅전 지붕이 보이고
응진전도 보이고
앞 마당에 올라서면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죠
기암괴석의 화려한 베이스,달마산이 미황사를 뒷받칩니다.
병풍 의 좌우 길이는 7키로 ,높이는 481미터, 한반도에서 가장 긴 자연 병풍.
저 병풍 위를 좌에서 우로 걸으면(남행) 땅끝에 이릅니다.
대웅보전(보물)
한반도
육지 가장 남쪽의 절,,,미황사.
몇년 전 어느 여름날이였어요.
땅끝서 77번 국도를 타고 귀경하는데 우측 멀리 달마산이.
순간 가자!,,, 하고는 운전대를 꺽으니 미황사.
(그때 한 스님이 자하루 계단 공사 감독 중이였데 알고 보니 현 주지인 금강스님)
땅거미 질 즈음이라 경내 분위기는 그윽해지고.
놀다 보니 어둑 어둑...갈길이 멀고 돌아가려던 차.
아쉬움에 뒤돌아 보기를 몇번.
세상에나!
달마산 정상 위로 둥근 달이 빼꼼이 .
아아~~
달은 달마산을 넘 고 대웅전 처마 윗까지
........
경험 만큼 느낌니다
정면,측면 각각 세칸의 작은 전각이지만 달마산에 전혀 기죽지 않은.
팔작지붕은
질세라 한껏 날개짓을.
만약, 여기에 대흥사 전각처럼 수수한 당우들이 들어섰다면?
언밸런스!
그리고 들어사는 사람도 구경온 자도 달마산 기세에 풀이 죽을 터.
반대로 부드러운 두륜산에 저 화려한 전각이 들어서면 이또한 이질적.
단아,정 갈,,,, 섹시함까지.
대웅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여서서... 스킨쉽이라도.
정말이지 보고 보아도 실증나질 않아요.
우리네 인생 저리만 늙어가면 한이 없을듯 하고.
고운 피부에 탄력까지.
빛바랜 단청이 어디까지 더 고울 수있는 지를 보여주는.
그렇다면 나이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 병화로 불에 탔어요.
1982년 중수할 때
1754년(영조
)에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니 300살 이상
.
단언컨데,
미황사는 대웅전 하나만 보고 와도 만족.
주춧돌도 참 멋스럽고
주춧돌 위에 올라 탄 생물좀 보실레요.
게
급히 올라가네요.
거북이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오르려 기를 쓰고.
'대웅전=반야용선(般若龍船)'
반야용선은 중생들 태우고 서방정토 극락의 세계로 항해하는 구명선.
석공의 해학과 스킬~~
급히 용선에 승선하려는 중생들을 게,거북 모습으로 의인화 했고.
원경,중경 ,근경,,,, 뭐가 먼저 시야로 들어오나요?
난 가운데 상록수림이 들어오네요.
만약 가운데로 두툼한 상록수림이 없다면?
골산 달마산의 화기가 그대로 미황사에 밀려들 터.
네,저 상록수림이 완충역할을 하고 있어요.
보는 이의 시각적 안정감도 채워주고.
이런게 비보풍수 아닐까하는...
그러면 저 나무 정체는?
궁금해 스님 한분에 물어보는데 모르시더라는.
검색해 보니 난대성 상록활엽수 후박나무.
미황사 내 후박나무
대웅전 뒷쪽
응진전(보물)이 살짝 보이네요.
응진전(보물)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촐하지만 이또한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미황사 내 주요 당우들은 맛배지붕이 아닌 팔작지붕.
당연히 화려한 달마산과 조화를 고려한 것.
응진전 앞 수선화
그러고 보니 대웅전의 '꽃 버전' 이 바로 수선화!!
응진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게 바로,
계단에 걸터 앉아 서해 진도 앞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을 감상하는 것.
한반도에서 석양이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가 미황사 응진전 낙조.
서방극락 정토를 보는 방법 중의 하나가 석양을 보는 것이라죠.
사람은 일출에서 기를 받지만,일몰에서는 위안을 받죠.
연인 혹은 가족 동반하고,,,혼자면 더 좋을 지도 .
응진전 계단에 걸터 앉아 서방정토를 미리 감상하시길.
홍매와 잿빛 기와,,,, 참 잘 어울리네요.
요며칠 왼손 등이 많이 부었어요.
저 홍매 찍으려고 들이대는데 벌 하나가 손등 장갑 위로 앉았고.
갑자기 따끔!! 이렇게 아픈 벌은 처음.
장갑 중 붉은 부분이 있었는데 매화로 착각하고 꿀빤듯.
산에서 원색 엔 벌듯이 잘 붙더라는. 특히 노란 참외 같은 향긋한 과일에는 더.
조심들!!
중국 해안 지역에서도 해남 달마산이 꽤 유명했나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달마산 얘기가 나와요.
/고려 고종 1218년 중국 남송의 배가 표류하다 달마산 동쪽 바다에 정박했는데,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하여 마지 않았더니 와서보니 가히 달마가 사실만하다'며 참배를 했다.
그리고
달마산을 화폭에 담아갔다/
미황사엔 보물이 하나 더 있는데 1727년 제작된 괘불탱.
높이 12m, 폭 5m로 기우제 용으로 많이 이용해 효과좀 봤답니다.
인디언 기우제 그런게 아닌.
-중창불사의 모범답안 미황사-
1.3천원 입장료도 없다.
2.주차료 조차 받지 않는다.
3. 절 안 세심당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차를 건넨다.
4.지역 초등학교 등
주민들의 어려움을 어루만진다.
미황사의 지난 30년을 보면 절 주인의 마인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수 있어요
미황사는 1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스님 40명의 큰 절이었다죠.
1897년 중창불사 용 시주 위해 남해안 일대로 군고패 순회공연을 떠났으나
완도 청산도 바다 에서 폭풍을 만나면서 쇠락의 길을.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절은 방치되다시피한 상태.
전국적으로 사찰에 시주다운 시주가 들어올 때도 90년대 이후 일.
80년대 후반 금강스님(현 주지) 중심 몇이 미황사에 들어오면서 지금의 미황사로 변신.
중장비를 직접 운전하면서 30여년을 가꾸었고 . 석재는 사람이 직접 쪼고 깍고 등등
그 결과가 지금의 미황사
,,,
중창 불사의 모범답안.
현 주지는 금강스님!
80년대 후반 미황사에 들어와 지금의 미황사를 가꾼분 .
최근 17키로 달마고도 둘레길을 만들어 낸 인물도 금강.
1987년 6.10 항쟁 때는 집행위원으로 참가.
imf 실직자가 급증하자 사회 동참 일환으로 단기 출가 프로그램을 실행해 효과를.
이때 다른 사찰에서는 분위기 망친다며 거부 .
사하촌 송정초등분교가 폐교 직전에 이르자 직접 나서 정상화.
지금은 분교가 아닌 정식 초등학교로...등등
-남도여행 피날레는 달마산&미황사에서-
위로를 받고 싶은 자 대흥사로 , 기운 받고 싶은 자 미황사로!!
흙산은 위안을 골산은 기를 줍니다.
둘은 승용차로 15분 거리. 먼 길인데 한 곳만은 억울하죠.
먼저 대흥사 들러 위안 받고, 미황사서 기를 받으면 되겠네요.
혹 해남,강진,완도 쪽 남도여행을 계획하신다면 피날레는 미황사에서,,,가능하면 달마산까지.
1.미황사 뒷 길로 달마산 정상 까지 다녀와도 왕복 3 시간이면 충분.
2.미황사에 차를 세워두고 택시(콜하면 금방 ) 로 도솔암 주차장 까지 이동 후,
도솔암~능선 ~ 하숙골재(하산)~동부도~미황사로(2시간)
3.하숙골재 지나 정상 까지,그리고 아래 미황사로(3시 간 30분 ).
4. 도솔암에서 바로 하산하 면 달마고도 둘 레길,그 길 따라 미황사로(1시간 30분)
도솔암 주차장 까지 택시로 이동만 하면
거기서 부턴 수평 능선길,하산길이니 별 어려움 없고 (바위라 좀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