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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대흥사

| 조회수 : 5,542 | 추천수 : 2
작성일 : 2019-04-17 01:15:20




해남 두륜산 대흥사 갑니다.

대흥사 초입 주차장 5분 거리에 케이블카가 있어요.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여덟 봉우리 중 하나인 고계봉까지 올라가죠.


윗 승강장 도착


전망대 향해


 고계봉 정상 까진 10여분 걸어야.

나무 데크라 누구나 쉽게


상투를 뜻하는,,,계(髻)

아랫 마을서 보면 상투를 튼듯 우뚝하나 봅니다.


청명한 날엔 제주도 까지 볼수있다네요.

능선 따라 가면 땅끝 사자봉.


바로 앞이 정상 가련봉


멀리 철탑이 두륜봉.

앞 능선길 우측 아래 쪽에 대흥사가 있고.

이곳 고개봉(638 m)~ 노승봉(老僧峰)~가련봉(迦蓮峰 )~두륜봉(頭輪峰)~ 도솔봉~연화봉(蓮花峰)~

혈망봉(穴望峰 )~ 향로봉(香爐峰 )등 8개의 암봉이 대흥사를 빙돌아 감싸고 있어요.

그래서 頭輪,,,머리가 둥근 바퀴 형상.

이게 대흥사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전화를 입지 않은 지리적 환경이기도. 


정상 가련봉서 바라본 두륜산 연봉들


백두대간은 호남정맥을 낳고,

호남정맥은 땅끝기맥을 낳고,

그 땅끝기맥 등줄기는 사자봉에서 남해 바다로 빠집니다.

땅끝기맥은 장흥서 분기하는데 월출산~다산초당의 만덕산~주작산~두륜산~미황사의 달마산~땅끝 사자산까지.

그러니까 비가 오면 땅끝기맥 능선 동쪽은 장흥 강진의 탐진강으로,서쪽은 영상강으로 흐릅니다.

보이는 큰섬이 고금도,,,왼쪽 희미한 게 신지도,,,고금도 왼쪽이 강진만,,,고금도 우측으로 살짝 보이는게 완도.

이들은 최근 다리로 완전 완결.

보이는 철탑 너머로 미황사 달마산 이어 사자봉 땅끝.

고금도는 추사 부친 김노경이 4년간,

신지도는 원교 이광사가 12년간 유배된 곳.

김노경은 해배 후 귀향길 대흥사 초의선사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정상 가련봉(703)


가련봉에서 바라본 서남쪽. 아래로 대흥사가 보이고.우측 멀리 진도.

다산 정약용도 초의선사,제자 황상과 함께 대흥사에서 출발 두륜산에 올랐다는.

이제 내려가 저 대흥사로 갑니다.


북미륵암 보이시죠?

저기에 대단한 작품 하나 있어요. 잠시 후 확인해보죠.



오던 길 북쪽,,, 해남군 삼산면 일대.


고산 윤선도(1587∼1671),증손자 공제 윤두서의 녹우당이 있는 덕음산을 넘어서  저 일대가 죄다 해남 윤씨 소유.

윤선도 고조부 때 해남 정씨인 처가 재산이 윤씨 집안으로(남여 균분상속).

퇴계 이황의 부가 처가로 부터 왔듯이.

이어 '재산 몰아주기' 장자상속을 통해 부가 집중되었고. 윤선도는 강진만 간척 사업까지.

한때 해남 일대엔 윤씨 소유 정자만 20개가 넘었다는.

그가 가까운 보길도에 럭셔리 별원을 짓고 이상향을 만들 수있었던 것도 이런 물적 토양 때문.

윤선도는 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태어나(가사 '오우가'와 함께 표지석도 있 음) 어려서 백부 양자로 입양.

멀리 영암 월출산이 보이고.


주차장서 대흥사 일주문 까지는 약 2,4키로 숲길.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가을길이 예술이죠.

이런 길은 차가 아니라 꼭 걸어서.



                                           

우리나라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여관,유선관이 보이고.






진입로 일대는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九林里) 장춘동 (長春洞)~~

장춘동 계곡을 옆에 끼고 아홉구비의 숲길을 걸어갑니다.

일대 왕벗나무 두그루는 천연기념물.

 

일주문이 보이고

한반도에서 가장 늦게까지 가을 정취를 느낄수 있는 곳은?

당연 땅끝인 이곳 대흥사 진입로에서 시작되는 두륜산 일대.




두륜산(頭輪山) 대흥사

백두산과 중국 곤륜산에서 한자씩 떼어 두륜산이,,,그래서 예전엔 두륜사.

뒤쪽으로 부도밭이 보이네요.





승탑,탑비가 얼마나 많으면 밭이라 했을까요?

지나는 이마다 " 멋있다" 라고 할만한 그런 곳. 사찰 답사자들이나 사진작가들에게는 명당.
그윽한 숲속 아래로 고만고만한 부도와 탑비들이 오밀 조밀하게 들어차있어요.
죽음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진리를 확인이라도 하듯 서산대사 이하 모두가 그러합니다.
서산대사도 뒤켠에 있는듯 없는듯.

그리고 부도밭 속엔 대흥사를 상징하는 인물 둘이 있으니...아니 셋!

청허탑,,,서산대사 승탑(보물).


조선시대 최고 승병장으로

현 조계종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서산대사라는 발원지를 만나죠.

서산대사 4대 제자들의 가지가 퍼지고 퍼저 현 한국불교가.


죽음도 대단히 선적이였네요.

죽음에 다다른 서산대사,

자신이 그려진 초상 영정에 자서(自書)하기를,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80년 전에는 네가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초의선사 승탑

草衣塔,,,보이시죠?

탑명과 탑비는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가 썼습니다.


원쪽 부터 초의선사,서산대사 탑비.

그럼 우측 앞은???

다산초당 시절 다산이 많이 의지했던 10년 연하 아무개 입니다.

아무개 정체는 글 끝 부분에서.




해탈문


사천왕문이 있어야할 자리에 해탈문이네요.

절집에 사천왕문이 없다구요??

천관산(동),선은산(서),달마산(남),월출산(북)이 동서남북 감싸며 보호하고 있어서랍니다.



글씨는 원교 이광사 작품


들어서면 정말이지 누구나 해탈입니다.

확인해보죠


스크린 속 한 컷같은



멀리 곡선을 그리는 두륜산 연봉들이 먼저 다가옵니다.

 연봉들의 선율에 취하노라면 사실 저 당우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요.  

 그냥 서성거리기만 해도 마음은 부자가 됩니다.


그냥  편해요.

작년(2018) 양산 통도사,영주 부석사,보은 법주사,공주 마곡사,순천 선암사,안동 봉정사와 더불어

대흥사가 '산사(山寺)'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이기도.

신을 모시는 '신사'가 아니라 산에 있는 山寺!!


마치 고택들이 산속 분지에 모여있는 마을같은.

깊은 산속에 이리 넓은 분지가 있다는게 믿기지 않고.


고백하건데 언제부턴지 산사에 대한 취향이 변했어요.

미황사,부석사 같은 호방함 보단 이런 그윽 함이 좋은.

참 오랜만에 온 대흥사입니다.

10년도 넘었네요,그때도 대흥사 거쳐 미황사로 .

당시 적이 실망을,,,그리고 미황사의 그 호방함에서 보상 받았던 .

가시적으로 대단한 예술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장관도 아닌,,,

그러나 너무나 편한.

10년은 강산도 사람도 바뀌게 합니다.



능선쪽  암릉들 보실레요?

마치 부처가 누워있는 와불같은,,,우측이 부처 머리,,양팔을 배 위에 살포시 얹어놓고.

그때가 생각나네요.

대웅보전 앞에서 원교가 쓴 편액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한 보살이 다가와요.

글씨만 보지 말고 저 산 위 부처님을 보라네요.

찾아보지만 뭉퉁한 암릉만 보일 뿐 부처는 없었고,,결국 실패.

오늘은 한눈에 들어오네요.

 대흥사가 너무 좋아 1년에 한번 한달을 머문다는,대구서 왔다는 그 아지매....

그 한달의 의미를 오늘에야 이해합니다.


아늑함은 사찰 뒤쪽에도 있어요.





사 찰 뒤편에서 바라본 정면.

뒷편에도 넓은 공간이 있어 경내는 널널합니다.

정상 뒷봉우리들은 일정한 고도를 유지한채 측면을 돌고 돌아 정면 까지 연이여져요.

그리고 산사 전체를 포근이 감싸안고 있죠.



뒤쪽서 바라본 남원 구역 뒷태.


이것만이 아니여요

산사로 들어오는 길조차 깊게 감춰 놓았네요.

멀리 정면으로 입구 해탈문 보이시나요?

해탈문 너머 우측으로 장춘동 계곡 따라 2.5키로 진입로가 이어집니다.

아홉구비 숲길 구림리(九林里)에 긴 봄,,,장춘동 (長春洞).

이보다 더 그윽하고 널널한 사찰은 없을 겁니다.


頭輪,,,,머리가 둥근산.

연봉들이 산사를 둥근 바퀴처럼 빙 감싸고 있다는.(두륜산의 또 다른 유래)

이게 바로 서산대사가  금란가사와 발우(밥그릇)를 대흥사에 안치하게 한 이유.

그는 전국을 운수행각하면서 대흥사의 이런 지리적 장점을 알고 있었던 것.

三災不入之處

萬年不毁之地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이요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니라.


그런 두륜산에 두륜사(대흥사)입니다.

그런데 대흥사는 지리적으로 따져도 멀고 멀어요.

북쪽 오랑케에겐 한반도 땅끝이요, 동쪽 왜구에겐 서쪽 끝.

거기에다 사찰은 높은 산 깊숙히 숨어들어가 앉았고.


쌩뚱맞죠?

위는 석가탑인데 아래는 다보탑 흉내를,,,웃음이 절로,,,위치도 그렇고.

대흥사에도 저런 몰이성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 성보박물관이 그러하죠.

군사정권 시절 군 관련 인물(서산대사) 성역화 일환으로 무지막지한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어요.

저 탑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마인드가 꽤 오래 간듯.


경내 중심지 남원 앞 무염지(無染池),,,, 화재 대비 차원이기도.


시,서, 화,차,범패,원예,단청 등등에 능했던 초의선사가 조성.

경내가 워낙 넓어  크게 세개 영역으로 구분되네요.
경내는 북쪽으로 치우친채 금당천이 흐르는데 이 금당천을 경계로 해,
1.천불전 일대를 남원(南院)
2.대웅보전 일대를 북원(北院)
  3.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表忠祠),대광명전,동국선원이 있는 별원으로 구분.

먼저 정 중앙 남원 구역

천불전 등 25개 당우가 들어서 있고.


가운데 솟을대문 안쪽에 천불전 등이,,,마치 종가댁 고가를 본듯.








적묵당 앞 수령 200년 매화 나무

초의가 심은 것.

경내 뒤쪽에서 바라본 남원 구역


멀리 해탈문이 보이고.

진입로는 해탈문 너머 우측 계곡.

그래서 진입로 따라 일주문 까지 들어와도 곧바로 경내가 보이질 않아요.12 0도는 꺽어야.



우측 구역이 대웅전이 있는 북원(北院)

그곳으로 갑니다.


북원(北院)

금당천이 남원,북원 사이를 흐르고

어?? 둥~둥~~둥 마치 장갑차가 굴러가는듯한.

소리 찾아 발길 재촉합니다.




금당천을 넘으니 침계루네요

말 그대로 계곡을 배게삼았다는.

침계루 현판은 원교 이광사 작품.


침계루 안쪽.

아아~~ 2층 법고 소리네요.




법고가 이리 웅장하고 깊은 소리인지 처음 알았고.


대웅보전

신라말 삼층석탑(보물)


대웅전 뒤쪽

두륜산 주 식생은 동백,후박,차나무등 난대성 상록활엽수.


아는 만큼 보인다,,,,!!

그 시각적,인문적 교육의 장으로 최적이 바로 대흥사.

서산대사,고산 윤선도,공제 윤두서,다산 정약용,초의선사,원교 이광사,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위당 신관호,아암 혜장,소치 허련,의제 허백련,,,등등.

특히 조선 후기 문사,예인들 간 얽히고 설힌 스토리를 읽다 보면 엔돌핀이 솟죠.


대흥사를 즐기는 여러 테마 중 하나가 조선후기 서체의 전시장으로서 대흥사!!

대웅보전, 원교 이광사(1705~1777)


大자 보실레요?

성큼성큼 걷고 있는 형상을 표현한 것.

더 리얼한 표현은 인근 강진 백련사(다산의 그 백련사)에 있어요.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원교 이광사.


곧곧한 자세로 머리는 앞으로 두팔을 휘젓고.

힘차게 오르는 용의 기세로 조선의 기개를 표현한듯한 .

원교가 참 시대를 잘못 타고 난게 바로 후생이 추사 김정희.

추사체에 밀려 원교의 향토색 짙은 조선의 동국진체가 가려졌다는.

그러나 현대에 와서 다시 재조명.


대웅전 옆 요사체 백설당.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작품

백설당은 해사 김성근 작품,,,,김씨는 당시 동학혁명 진압 전라도 관찰사.

.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1786-1856)

유배 길 대흥사에 들러 초의에 써준 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은 하나 더 있어요.


예산 화암사에 있는 무량수각,,,, 해배 1년 전 작품.


  63세 작품으로 해배 1년전 고향 화암사 요청에 따라 상량문과 함께 써준 것.

그는 젊은 시절 화암사에서 보냈고,문중 원찰이기도.

이렇게 추사의 무량수각은 둘,,,추사체 변천사를 알수있는 작품.

대흥사는 제주도 유배 직전,화암사는 해배 직전으로 7년의 차이가.

즉 화암사는 추사체 완성 작으로 볼수 있는데 흔히들 기름기(기교)가 빠졌다고들 합니다.



동국선원

현재 주지스님 처소인 일로향실(一爐香室)에 걸려 있고. 

대흥사 별원(別院)지역인 동국선원(東國禪院)에 걸려 있던 것을 복원한 것.

왼편 완당이라는 제호가 보이고.


대웅보전,원교 이광사(1705~1777)


천불전,원교 이광사


침계류,원교 이광사


백설당, 해사 김성근(1835∼1919)


일제 강점기 친일 귀족으로 작위까지 받으며 영화를 한껏 누렸죠,,,,서재필 스 승.

싹수가 노랬던 게 동학혁명 때는 전라도 관찰사로 진압 담당.

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사찰 현판을 많이 썼고.


가허루,창암 이삼만(1770~1847)


창암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통해 동국진체의 진수를 터득한 후 자신만의 창암체를 완성.

서체로 호남지역을 석권하고 당시 추사와 더불어 조선 3대 명필.

그러나 추사의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케이스.

원교는 사후에 추사의 그늘에 가렸다면,청암은 생전에 가린 불운의 서예가.


추사 제주 유배길 일화(1).....창암 이삼만편


당시 추사는 조선 최고 지성.

추사의 제주도 유배길은 전주~남원~나주~영암~대흥사~완도 루트.

창암은 전주에 도착한 추사를 뵙기를 청했나봅니다.

청했다기엔 좀 웃긴게 창암보다 16살이나 어린 추사에게 자신의 글씨를 내놓고 평을 부탁한 것.

그러나 돌아온 건 굴욕적인 추사의 이 한마디!

 /노인장께선 시골에선 글씨로 밥 굶지는 않겠습니다 그려./

창암 제자들은 노발대발했지만 창암은 조용히 돌아갔다네요.

유배가 풀리고 추사는 사과 차 귀향길 창암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창암은 이미 3년 전에 사망.

추사는 붓을 들어 창암의 묘비명을 씁니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간 어질고 위대한 서예가가 누워 있으니

후생들아,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표충사,정조대왕

정조가 내린 표충사 편액.



어서각,위당 신관호(申觀浩,1810~1888)

임금님의 글씨가 있는 곳이라는 뜻.


대광명전, 위당 신관호( 1810~ 1888)


그는 추사의 제자로 한성판윤 까지 지냈어요 .

 추사 제주도 유배 중일 때는 해남에 전라우수사로  부임해 왔는데 추사의 제주도 생활  편이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이때 추사는 신관호에게 대흥사 초의를 만나게 합니다.소치 허련도.

대광명전은 초의가 위당 신관호,소치 허련과 함께  유배중인 추사의 해배와 축수를 기원하며 지은 것.

참고로,대흥사 12대 대강사는 아암 혜장(兒庵惠藏 1772~1811), 13대 대종사는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혜장은 두륜사(대흥사)에서 대강사 거쳐 백련사 주지로 있을 때 다산을 만남.

대흥사 이해의 키워드 인물이 몇 있죠. 그 중 한사람이 원교 이광사.

두륜산 정상 너머에 그의 총 23년 유배 중 12년을 살다 죽은 신지도가 있습니다.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린  원교 이광사(1705~1777) 초상.


대흥사를 얘기하는데 추사,초의,원교를 뺄수는 없겠죠

원교는 서체에 있어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

회 화에 겸제 정선의 진경산수가 있다면 서예에는 동국진체.

동국진체란 말그대로 중국이 아닌 조선의 서체로 향토색 짙은.

그가 동국진체를 더욱 숙성하고 세상에 퍼트린 것도 귀양지에서.

 부친은 예조판서,왕족 후손인 원교는 51세 때인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연루돼 회령에 유배됩니다.

다시 진도로 이배되었다가 결국 신지도로 옮겨 12년 후 생을 마쳤네요.

두륜산을 넘으면 바로  보이는 게 완도요,그 옆이 신지도.

(지금은 완도~고금도~신지도~강진 마량과 다리로 연결)

동국진체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옥동과 친구),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에 의해 집대성.

대부분의 유배객들이 그러했듯 그도 서당에서 애들을 가르쳤다는.

인근 사찰등에서는 글과 글씨를 많이들 요구해 왔고(당연 반대급부가)

이게 바로 전남 서해안 일대 사찰에 원교 현판이 많은 이유.

구례 천은사엔 <지리산 천은사>·<극락보전>·<명부전>,

강진 백련사엔 <대웅보전>·<명부전>·<만경루>,

고창 선운사엔 <정와>·<천왕문>, 부안 내소사엔 <대웅보전>·<설선당> 현판이 있습니다.

대흥사의 대웅보전,해탈문,침계루,천불전도 이리 탄생하죠.

현 호남 서예는 원교가 뿌리로,

남도를 예향이라 칭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원교 동국진체를 이어받은 서예,

그리고 추사 애제자 소치 허련의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한 남종화 등이 어우려졌기 때문.



추사 제주 유배길 일화(2)....원교 이광사


너무나 유명한 얘기지만 추사는 제주도 들어가기 직전 동갑내기 친구 초의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엘.

추사는 대웅전에 걸린 원교가 쓴 대웅보전을 보더니만 '조선의 글씨는 원교가 망쳤다!'며 당장 내리라고 성화를.

그리고 무량수각 현판을 써주고는 대신 달게 했고.

청나라의 선진문물에 열광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인 추사의 눈에 원교체는  조선적인,쉽게 말해 촌스럽다는 것.

(6,70년대 미국을 대했던 우리처럼) 

그도 그럴 것이 연행길 청나라 최고 지성 옹방강이 추사를 해동제일로 치켜세웠으니 세상 보이는 게 없었던 거죠.

더불어 원교는 소론,추사는 노론이라는 반대 당색 영향도.

당시 예단의 절대자 추사의 이같은 평가는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쳐 원교가 평가절하되고 말았네요.

그러나 반전이 있었으니,

해배 길 대흥사를 들른 추사는 당시는 자신이 잘못 보았다면 원교 것으로 다시 바꿔달게 했네요.

혹독한 유배 9년을 통해 추사체의 완성과 함께  인간적 성숙을 가져왔던 것.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대웅보전 현판과 설선당의 무량수각 현판입니다.

귀경 길 창암 이삼만 추모 글을 쓴 것도 같은 연유겠죠.

지금은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향해 그 아래서 추사 무량수각이 읍하듯 걸려있습니다.


금당천을 건너 다시 북원 영역으로 갑니다



5백년 느티나무 연리근


500살 느티나무 두 그루의 뿌리가 만나서 하나가.

키는 20m, 둘레 4.4m로 크기 나 품세 면에서 타의 추종 불허.
나무 둘이 붙을려면 속살끼리 닿아야 한다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세포조직까지 서로 붙고.
두 몸이 하나가 되듯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가능한 일이다 보니 예부터 귀하게 여겼고.           
             유래는 백거이가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읊은 '장한가(長恨歌)'랍니다.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원한다/

대흥사엔 유명 느티나무가 하나 더 있으니.


만일암터,1200~1500년 느티나무


높이는 22 m, 7층 건물 높이.둘레는 9.6 m.

이 땅 느티나무 중 최고 수령.

만일암터는 최초 대흥사가 세워진 곳으로 두륜산 7부 능선에 있습니다.

전라도 상징 천년수로 지정되었네요.

전라도란 이름이 탄생한지 작년(2018)으로 1천년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는 나무로 지정된 것. 

1018년은 고려 현종 때로 전주목과 나주목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 지명이 탄생.

댕~~댕~~댕~~

어디지?




저 스님 어느새 범종루에 와 있네요.

댕~댕~~부처의 소리는 두륜 연봉 안에서 충만하고.


이젠  표충사 영역으로 갑니다.

표충사 삼문(三門)

            현재의 대흥사를 있게 한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

사찰 내에 유학의 상징인 사당이 있는 이 역사의 아이러니.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대사를 기리는 사당

표충사는 1669년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

표충사(表忠祠) 편액은 정조가 하사한 친필.


일찍이 두륜산은 서산대사가 점찍은 명산이였어요.

서산대사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3천 승군을 거느리고 명나라 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할 때가 73세.

1604년 묘향산 원적암에서 85세로 입적 직전 마지막 설법을 한 서산대사.

그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합니다.

(가사와 밥그릇은 스님들의 정신적 상징)

제자들이 이유를 물었어요,,,답은 이리.

三災不入之處

萬年不毁之地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이요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이니라.


육신은 다비 후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에,영골은 금강산에,그리고 발우와 금란가사는 두륜사로.

 이후 지방의 작은 산사였던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으면서 대찰로 성장합니다

현재 대흥사는 조계종 22교구 본사로 서,남해 지역의 상징적 사찰.

당시엔 인근 6개 군의 수령들이 합동으로 봄,가을 제향을 지냈다는.

사찰 내 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은 셋.

대흥사의 표충사,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酬忠祠),,,서산대사를 기림, 1794년(정조)

 밀양 표충사(表忠祠),,,서산대사 제자 사명대사를 기림.

왜 西山大師나구요?

주로 묘향산에 기거했기에.


표충비각


표충사  부속 건물들

제향 때 진설할 음식 만들고 제관인 관료가 머물고 하는 그런 용도.


삼문으로 표충사를 빠져 나갑니다.

바 로 옆 성보박물관(군사정권 때 세워진 무지막지한 콘크리트 건물)에는 서산대사 유물이 일괄해 보물로 지정되었고.

서산대사의 염주, 금란가사, 옥 바릿대, 수저 등등.  

1602년 서산대사를 ' 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으로 임명한 선조 교지도 있어요.


동국선원은 사찰 가장 위쪽에,,,지금 중창 불사 중.


표충사 위쪽 대광명전을 놓칠수 없죠

문재인 대통령이 1년여 공부한 7번 방이 여기에.

저분 포커스는 7번방



'26세 청년 문재인 염원의 결실을 이룬 곳'


문대통령 七번방


동국선원 지나 40여분 오르면 북미륵암이.

여기엔 매력 넘치는 작품이 하나 있어요.

북미륵암 전경
 

북미륵암의 미륵불좌상(국보)

가로 8m, 세로 6m 자연 암반에 주불만도 4.2m 크기

석굴암 본존불은 3.2미터.


석굴암에서 느끼는 경외감 그런.


자연 암반을 있는 그대로 활용.

강도가 커 조각이 힘들지만 종교적 무게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화강암만한 재료가 없죠.

최근에야 국보로 지정됐다는 게 이해안될 정도.

풍부한 양감에 유려한 선률들...

하단 양쪽 공양 천인상을 보노라면 에밀레종이나 상원사 동종 의 그 천인상을 옮겨놓은 듯한.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옮겨가는 시기 작품.


우측하단 세부도,,, 연꽃을 공양하는.


좌측 하단

얼굴이며 가슴골이며 천상 여인상.

이 대단한 작품에 전설이 없을리가요

  천년느티나무(만일암터 그 느티나무) 에 해를 붙잡아두고 천녀가 조각했다는 전설이.

                     

미륵불좌상 앞 동삼층석탑


북미륵암 앞에는 동서 두개 석탑이 있는데 서탑은 보물이나 동탑은 지방문화제.

하지만 동탑이 훨 멋져보인다는.

자리매김이 예술이어서죠.

암릉 끄트머리에 세워져 앞 능선들과 시원하게 매치를 이룬다는.

그것도 자연암반 형태를 따라 기단석을 깍아냈다는,,그랭이 기법.


일지암(一枝庵)

대적광전 위쪽 6부능선에 있습니다.

보통 산행은 대흥사~북미륵암~정상~일지암~대흥사 원점 회귀.

산세가 부드러워 4시간 정도 큰 힘들이지 않아도 가능.



일지암 주인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


차문화  바이블 동다송(東茶頌),그리고 다신전(茶神傳)을 집필하고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확립한 다성(茶聖).

일지암은 초의가 39세인 1824년에 지어 40년을 은거하다  81세 에 입적한 다문화 성지.

초의 입적 후 얼마 안가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의재 허백련이 그린 일지암도가 남아 있어 그림을 토대로 1970년대에 복원.

마치 초의가 그린 다산초당도를 근거로 현 다산초당을 복원한 것처럼.

의재 허백련은 소치 허련의 방계 혈통으로 남종화 대가.

당나라 때 한산(寒山)이라는 승려가 있었답니다.

 /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에 나무 끝 한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

초의는 평소 이 시승(詩僧)의 시를 즐겼는데 일지암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



&&&...... 별책부록

-  '카페 드 플로르'는 땅끝에도 있었다 -


만덕산 백련사에서 바라본 강진만...다산초당 까진 800미터 산길.

강진만 일부는 고산 윤선도가 간척,,, 건너가 고려 때 청자 80%가 생산되던 곳


올리기 직전,사진 검색하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아암 혜장의 묘비가 대흥사 부도전에 있다는 사실,,,승탑은 없고 탑비만.

그것도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사이에.

18년 다산에 있어  가장 큰(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자는 혜장이였을 겁니다,,,둘은 딱 6년 교류.

초의에 가려져선지 혜장은 일반 대중에 알려진 것이 별로 없어요.

부도전을 들르는 이도 서산대사와 초의대사 비만 찾고는 돌아가고.

구글링,,, 역시나 혜장 부도비 사진은 거의 없네 요.

한 사진을 보니  혜장 탑비 앞에 꽃다발 두개가 놓여있었고.

아마 다산과 혜장에서  숙명같은 걸 느끼신   분이셨을 터.

순간 필을 강하게 ,,,글이 다시 이어 지는 이유입니다.


다산 유배가 촉발시키고 다산초당과 대흥사에서 꽃피운  지역 문화 르네상스!

중앙 유배객과 지역 지식인 사이에서 펼쳐지는 문예 네트워크,그리고 땅끝 사랑방!!

  '카페 드 플로르'는 땅끝에도 있었습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한다'는 뜻의 '보정산방'

추사가 강진 귤동마을의 다산 제자에게 써준 것.

'다산동암'은 다산 글자를 집자.

다산은 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을 이곳 동암에서 집필했고.


1.(약)무강진,무다산!


네,강진이 없으면 다산도 없었다는 얘기네요. 방대한 다산학은 18년 동안 강진에서 실현되었으니.

그럼 무혜장,무다산!,,,하면 돌 날라올려나요?

당시 저간의 사정을 알면 결코 그러지 못할 겁니다.

다산(1762~1836)이 다산초당에 정착하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할수 있는 계기가 혜장을 만나서 부터였으니까요.

1801년 신유사옥에 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정씨 집안은 풍지박산.

세째형 약종은 장살되고 약용은 둘째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약전은 흑산도(그곳서 16년 만에 사망),다산은 강진으로.

다산은 강진읍성에 도착했지만 다들 피하는 상황에서 동문 밖 주막 노파의 배려로 주막 협칸에 정착.

4년 후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유배생활도 좀 여유 생겼으니,

다산은 인근 노인과 함께 반나절 거리 만덕산 중턱 백련사로 봄놀이를.

그곳서 운명의 혜장(惠藏,1772~1811)을 만납니다.

그때 다산 44세,혜장 34세로 둘은 정확히 10년 터울.

당시 혜장은 백련사 주지로,30세 때는 대흥사 12대 대강사였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가 있었고.

한눈에 둘은 반했는지 그날밤을 백련사서 묵었어요.

 다산 입장서는 혜장은 변방의 보기 드문 식견 소유자, 혜장 입장에서 다산은 중앙의 대학자.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데 이후 6년간 오간 편지 등을 보면 동성애 착각이 들정도.

다산은 생필품 지원에 불경을,혜장은 다산으로 부터 주역 유학 다도를 배우고.

젊어서 진사 합격연을 수종사에서 열만큼 다산은 이미 불가에 대한 이해폭이 있었고.


드디여 혜장은 1804년 우이산 고성사 암자에 다산의 거처를 마련해 줍니다.

얼마나 고마웠겠어요,다산은 보은산방(報恩山房)이란 현판을 달고  1년을 보냅니다.

혜장은 밥시중,차시중 드는 젊은 중까지 한명 붙혀주었는데 당시를 수체화처럼 그린 시 한편이 남아있어요.

/ 대밭 속의 부엌살림,

중에게 의지하니
  가엾은 그 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
이제 와선 불가 계율 모조리 팽개친 채
  싱싱한 물고기 잡아다가 국까지 끓인다오./
(다산의 시, 다산화사(茶山花史) 中)


혜장은 정이 넘쳤지만  거칠고 니힐리스트적인 성격.

다산은 노자의 가르침 중 '부드럽기를 어린애처럼 하라'는 뜻으로 아암(兒庵)이라는 아호를 줍니다.

다음은 혜장이란 사람을 알수있는 다산의 시 한수.

/굳은 의지에 어질고 호탕한 사람
  이따금 표연히 산 속을 나간다네.
눈 녹은 비탈길 미끄러운데
  모랫가의 들집은 깊이 잠겼네.
얼굴에는 산중의 즐거움이 가득하고
  변하는 세월에도 몸은 편하다네.
말세의 인심 대부분 비루하고 야박한데
  요즘에도 그런 진솔한 사람 있다네/
( 다산의 시, 혜장이 찾아오다,1807년 초봄)

다산은1806년 가을부터는 제자 이청의 집에서 살다,

1808년 봄부터는 외가인 해남윤씨 윤단의 산정에 정착합니다. 해남윤씨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 .

(제자들은 수많은 책을 펴내는데 큰 힘이 됨 .분업으로 누군 자료 모으고, 필사하고,교정보고, 제본하고 등등.)

본격 10년 다산초당 시대가 열리고 둘의 밀착은 본격적으로.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는 초동들이 다니던 800여미터 산길이 있었어요.

혜장은 곡주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허리에 찬채 초당을 찾곤했는데 둘은 밤에도 아예사립문을 열어놓았다는.

당시 글을 보면  기다리는 심사들이 절절합니다.


그런데 만덕산 주변엔 야생차들이 많았어요.

다산은 한양 시절 부터 차를 즐겼기에 당장 혜장이 마련해준 차가 절실했고.

나중에는 다산이 직접 차잎을 따서 제다(製茶)까지 합니다.

당시 차는 음료를 넘어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여기던 시절.

다산도 갖은 속병에 시달렸기에 차의 집착이 컸고.

소식이 돼지고기로 화병을 다스렸다죠,다산은 차로 화병과 속병을 다스립니다.

다산이 1804년 혜장에게 차를 청하는 편지가 그 유명한 '걸명소(乞茗疏)'!!


/나그네는 근래 차 버러지가 되어 버렸고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란게 묘한 것이 나로 하여금 육우의  다경(茶經)을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몸은 누에인양(다산) 마침내 노동(당의 시인)도 남긴 일곱째 잔을 마르게 하였소 (...)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 보내 주시는 정다움 비는 바요
듣건데 죽은 뒤, 苦海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영약)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풀어 주소서/

                                      

  숫제 혜장을 '차의 임금님'으로 여기고 소(疏)를 올리고 있다는 .
  노동의 시와 육우의 다경 등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다산은  이미 차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 음을 알 수 있고.


백련사 동백나무 숲,,, 혜장은 술병으로 동백꽃인양 불혹에 요절합니다 .

https://youtu.be/qM7Py_fQdD8

Beethoven - Piano Sonata No.23 in f minor, Op.57 'Appassionata'

Sviatoslave Richter

왜 열정인가? 아암....


5년이 흐르고 다산이 그리 의지했던 혜장은 술병이 깊어지면서 대흥사 북암에서 세상과 등지네요.

 1811년 가을, 아암 나이 40세.

아래는 입적을 슬퍼하며 다산이 쓴 만시(輓詩).

 

/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후략)/


다산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는 흑산도 형 약전에 보낸 글에서도 알수있으니~~


대둔사에 어떤 승려가 있었는데 나이 마흔에 죽었습니다.

이름은 혜장 호는 연파,별호는 아암인데 본래 해남의 미천한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법을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주역의 원리를 들을 때부터는 몸을 그르쳤음을 스스로 후회하고 실의하다가

 6,7년 만에 술병으로 배가 불러 죽었습니다.

그가 죽을 무렵 수차 혼잣말로 무단히,무단히(방언으로 부질없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내게 보내준 시는 이랬습니다.


백수(柏樹,참선) 공부를 누가 힘써 할 것인가
  연화세계(극락)는 이름만 있는 것이지
  광폭한 노래들이 근심 속에서만 불려지니
  술만 취하면 맑은 눈물이 흐르네.

시대에 부합하지 못하는,한 아웃사이더 지식인의 전형을 아암에서 보게된다는.

아암이 죽고 1년 후 대흥사 아암 제자들이 다산초당을 찾아옵니다.

아암 승탑명과 비문을 다산에게 부탁한 것.

이렇게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이라는 탑명과 탑비가 탄생.

탑비는 지금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비문은 다산이 써준 그대로 인데 탑비명은 '兒菴藏公塔銘'이 아니라 '동방제십ooo대사'여요.

왜 일까? 유교적 탑명보단 불가식으로 바꾼거겠죠,,,불가의 자존 때문일 터.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을 수시로 드나들자 대흥사 측에서 환속 염려로 견제가 있었듯이.


가운데 꽃바구니가 혜장선사 탑비. 우측은 초의선사,왼쪽 뒤는 서산대사 탑비.


다음은 다산이 찬한 비문 마지막 부문~~~

빛나던 스님

아침에 피고는 저녁에 시들었네.
훨훨 날던 금시조(용을 잡아먹는 다는 새,아암을 상징함)
앉자마자 날아가 버렸네.
슬프다. 그대의 아담하고 깨끗함이여,
글로는 표현해줄 길이 없어라.
그대와 함께 연구해 나간다면
오묘한 진리, 깊은 이치도 열어젖힐 수 있었으리.
고요한 밤에 낚싯대를 거두어 들면 달빛만 뱃전에 가득해라.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세월에서 그대 입 다무니
산속마저도 적막하기만 하다오.
이름까지 나이 먹은 어린애인데
하늘이 수명만은 인색했네.
이름은 중이지만 행실은 유학자이니
그래서 군자들이 더욱 애달파하네.

-정약용(丁若鏞) 찬(撰)-


2.무다산,무초의


다산이 없었으 면 초의선사도 없었을 겁니다.

아암 혜장이 죽기 2년 전인 1809년, 혜장은 24세 초의를 다산초당에 대려옵니다.

혜장이 초의 보다 14살 연상. 다산 나이 48세.

다도의 역사에 있어 중요 순간이죠.

이후 초의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차,유서(儒書),시학(詩學)을 읽힘 니다.

보통은 초의가 다산에 차에 대해 일러주는 것으로 아는데 반대라는.

 다산을 얼마나 극진하게 모셨는지는 '탁옹(다산)선생에게 드림' 이란 시를 보면 잘 알수 있어요.


부자는 재물로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진이는 말로써 떠나보내네.

지금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저는 마땅히 드릴게 없습니다.

 먼저 공경하게 누추한 마음 펼쳐 은자의 책상 앞에서 말씀드리리라.

하늘이 맹자 어머니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네.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요.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시네.

 편안히 머물 때도 항시 의로움을 생각하고 실천에 나서면 어짊을 보였네.

 이미 넉넉하면서도 모자란 듯 하였고 항시 비우고 남을 포용하였네.

 내 이런 도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와서 정성을 드립니다.

 이제 또 헤어지는 자리에 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수레가 떠나갈 때 주신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띠에다 써두렵니다.


아니,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한다네요!!!

둘은 얼마나 가깝게 지냈냐면, 1812년 가을엔 초의와 다산은 영암 월출산엘 가요.

 초의는 백운도(白雲圖)를 그렸고, 다산은 청산도(靑山圖)를 그립니다.

시서화 차,건축,단청,원예,범패,장담그기,,,등등 못하는게 없는 초의였고 .


월출산 백운동도.....1812,초의선사


그리고 같은 해 초의는 다산초당도를 그리죠.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1812,초의선사


현 다산초당 복원은 초의가 그린 茶山草堂圖가 모태.

다산은 대둔사(현 대흥사) 스님들과도 긴밀했는데 1823년에는 대둔사지 편찬에도 참여해요.

 다산이 필사를 했다는데,최근 발견된 자료를 보면 아예 다산이 총감독.

다산,혜장,초의 3인의 공동참여!

대둔사지(大芚寺誌)~~

조선후기 불교사 이해의 귀중한 자료이자 가장 신빙성 있는 사지(寺誌)로 인정받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찰 사지들을 보면 과장 일색.
많은 사찰이 어떤 실증적 근거도 없이 근원을 의상,원효,자장까지 올립니다.
실학자 다산에 혜장,그리고 불가의 실학자로 평가 받는 초의선사 3명이 참여했으니 저간의 사정을 알말하고.
다산은 제자들과 함께 만덕사지(백련사)를 편찬한 경험이.
혜장은 사지 편찬 시 대둔사 기원을 기존 주장인 6 세기로 올리는 것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며 무시하 고 
잔존 유물에 근거해 통일 신라말,고려 초로 잡아요.
다산이 대흥사 스님에 보낸 편지13통이 2009년 발견되었는데 다산의 실학자 다운 실증적 자세를 볼수있습니다.
수신자는 1통을 제외하곤 모두 완호대사 상좌인 호의(1778~1868)스님.
1813~1815년까지 3년간 다산초당에서 대둔사로 발송한 것.

1813년 8월 편지에는 이리.

 1.대둔사지 편찬을 위해 ‘소가 땀을 흘릴 만큼’ 절에서 잔뜩 보내왔다

2.그러나 각종 기록에 믿을 만한 사료가 하나도 없다.

3.옛 탑을 헐어서라도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신뢰할 만한 문적(門跡)을 찾아오라 했다.

(그렇치 않으면 대둔사지 편찬은 불가능하다)

4.북암과 상원암, 진불암과 도선암 등 네 곳에 있는 판기(板記)를 베껴와라 했다

 5.불교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전등록' 전질을 구해오라.등등.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아예 차를 만들어 마시기 사작합니다. 

 다산초당에는 약천,다조 유적등이 이를 증명하죠.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절목'에는,

제자들과 찻잎을 따서 덖고, 바쁠 땐 동네 아이들의 노동력을 빌려 찻잎을 따오게 한 기록도 나오고 .

다산은 1810년에 이미 자신이 만든 차를 선물도.

1815년에 호의 스님에게 떡차 10개,1816년에 우이도로 떡차 50개를 보낸 내용의 편지가 남아있다는.

이렇게 조선 후기 다도(茶道)는 다산에 서 시작해 초의가 완성합니다.

추사는 주변 문사들과 꽃피우고 .


노원구 수락산 학림암(현 학림사)

추사와 초의는 1815년 이곳서 추사 동생 김명희를 만났는데 이때 추사도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는.

600년 노송은 둘의 처음 만남을 보았을 것이고. 


3.유불의 만남...추사와 초의(둘은 동갑)


초의에게 중요 순간이 다가오는데,

다산은 초의에게 한양 사대부들과 직접적인 연을 이어줍니다.

확언컨데 이게 없었으면 지금의 초의도 없었을 겁니다.

먼저 큰 아들 학연을 통해 초의는 추사를 만나요 .

그러면 추사와 소치의 첫 만남은 언제 어디였을까?

초의가 한양에 올라가면 약현이 살고 있는 마재(양수리)를 거쳐 인근 수종사나 수락산 학림암에서 머물렀어요.

(당시 사대문 도성 안으로 중은 출입금지!)

1815 년 학림암(현 수락산 학림 사)에서 초의는 학연 소개로 추사와 추사의 동생 김명희를 만납니다.

초의차라는 이름을 붙혀준 장본인도 학연으로 학연은 수차례 아버지 다산을 뵈러 강진과 한양을 오갔죠.

 초의차가 경향 각지에서 유명세를 급속히 탄 것도 추사의 역할이 절대적.

추사는 24세 때 청나라 연행 시 완원의 별서  태화쌍비지관을 방문하는데

 그가 끓여 내온 용단승설차를 맛 보고는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했다는 .

당시 차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했는데 유통이 길어 비쌌고 가짜도 많았어요.

그러다가 초의차를 맛본 추사는 깊이 매료됩니다.

추사가 제주 유배 중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그토록 졸랐던 이유도 그만한 차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도 차 이야기를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

그는 수차 회유,협박(?),구슬러서 차를 얻어냈고 댓가로 글씨를 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자 소치 편에 보낸 '일로향실' (아래 사진)과 '명선'.

당대 예단,문단에서 추사가 차지한 위치가 독보적이였기에 초의차의 명성 또한 덩달아 올랐고.

초의선사는 1. 다산 을 만난 후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기 시작하고,

2.추사를 만나면서는 '초의차=명품'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경향 각지로 퍼져나갑니다.

 

초의는 1830년엔 스승 완호대사의 사리탑명과 비문을 받기 위해서 한양엘 갔어요. (1830년대만 3번 한양을)

 학연,학유 형제를 비롯하여 자하 신위,홍현주를 만납니다.

학 유는 초의와 동갑.다들 차 메니아들이죠 .

자하 신위(1769-1845)는 당대 최고 시인으로 연경을 다녀온 후 차 매니아가 됩니다.

말년 관악산 자하동천에 은거. 

이때 홍현주 (1793-1865) 는  초의 차를 맛본 경험이 있어 자신의 별서인 동대문 밖 청량산방 에서 시회를 열어줍니다.

이날 자하 신위,학연도 있었는데 학연과 홍현주는 친구로 이날의 감동을 초의는 글로 자세히 남겼어요.

결국 홍현주의 소개로 자하 신위로 부터 완호대사 탑명과 비문을 받고

폐백으로 답례한 게 장흥 보림사 죽로차로 결국 초의가 만들 차가 매개체가 되었다는.

당연 다도의 바이블 동다송(東茶頌)도 이들을 만나면서 탄생.

동다송을 쓰게한 장본인이 바로 홍현주.

동다송 원본을 보면 홍현주 명(命)이란 문구가 나옵니다.

홍현주(1793-1865)는 정조의 외동 사위로 차시만 110편을 쓸 정도로 당대 최고 다인. 

그렇다면 당시 초의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범해선사는 초의차를 마신 후에 초의선사가 차를 만드는 과정을 시로 남겼습니다.

/곡우에 이제 막 날이 개어도

노란 싹 잎은 아직 펴지 않았네

빈 솥에 세심히 잘 볶아내

밀실에서 아주 잘 말리었구나

잣나무 그릇에 방원(方圓)으로 찍어 내어

대껍질로 꾸려 싼 다음 저장한다네

잘 간수해 바깥 기운을 단단히 막아

한 사발에 향기 가득 떠도는구나/

- 범해선사,〈초의차>-


그리고 추사는 제주도 유배길을 떠납니다.

초의는 추사 가 제주도서 보낸 편지가 얼마나 많았던지 이를  묶어 '영해타운' 이란 책을 펴내기도 .

영해타운(瀛海朶雲)?

'영해( 瀛海 )'는 큰 바다 즉 제주도를 뜻 하고, 타운( 朶雲 )은 남의 편지를 존칭하는 말.

추사로 부터 제주도에서 발신된   편지를 엮은 것.

추사 유배 전 어느날 일지암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어요. 추사의 부친 유당 김노경(金魯敬)이였죠.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일지암의 초의가 어떤 인물인지 보고 싶었을 터.

완도 고금도에서 유배가 풀린 후 한양으로 가기 전 잠깐 들린 것 .

고금도는 대흥사 두륜산 정상 너머로 지금은 완도~신지도~고금도~강진까지 연육 교로 연결되있어요.

신지도는 원교 이광사,고금도는 추사 부친의 유배지,약전도 흑산도 유배 전에 신지도에 잠시.

절친 부친이 해배길에 들렸으니 지극정성이였을 터.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에서 이 만남을 적어놓았습니다.

 /유당 어른께서 이곳 자우산방(紫芋山房: 一枝庵)에서 하룻밤 묵고

유천 물을 마시며 소락(酥酪)보다 맛이 좋구나 하셨다/



대흥사 동국선원 내 일로향실(一爐香室),,,지금은 성보 박물관에,추사 김정희.

양산 통도사를 비롯해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 이 전해짐.



4.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 (1809~1892) & 위당 신관호( 1811~ 1884)


추사의 초의차 요구는 말 만이 아녔다는.

추사는 글로 폐백했으니 대표적인 게 바로 일로향실(一爐香室)과 명선(茗禪).

추사 애제자 소치 허유(허련)는 나올 땐 편지를,들어 갈 땐 차를 들고 3 차례 드나들었는데 총 1년을 제주도에.

언젠가 소치의 뭍으로 향한 배편엔  일지암에 걸으라며 추사가 건넨 일로향실이 있었네요 .

(초의는 위로차 제주도로 건너가 추사와  6개월을 머문 적이 있었고)

초의는 추사의 해배,그리고 건강을 축원하며 위당 신관호,소치 허련과 함께 대흥사에 대적광전을 짓기도 .

당시 신관호는 해남에 전라우수사로 부임해와 있었고 수시로 배편으로 생필품을 보내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초의가 죽자 초의탑명과 탑비를 찬하죠 (현재 부도밭에).

이렇게 추사 유배시절 빼놀수 없는 인물 이 위당 신관호와 소치 허유(허련),,그리고 초의.

이들 4인의 족적이 대흥사에 많이 남아 있는데 이들 만남은 추사 해배 후에는 한양에서 지속됩니다.

결국 초의차는 한양에서 히트치고,소치는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등 전국구 화가가 되죠.

소치는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말기 두 거장으로 평가받 듯 변방 예인이 중앙 무대서 우뚝섰다는.


완당선생 해천일립도(阮堂先生海天一笠圖)...소치 허련.


소치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스승 김정희의 모습을 그린 것.

북송의 소식(소동파)이 해남도에 유배당했을 때 나막신 신고 삿갓 쓴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동파입극도>를 번안한 작품.

바다 건너 섬으로 유배를 가서 낮선 풍토와 더위에 고생하는 추사의 삶을 소동파에 투영한 것이죠.


소치는 진도에서 태어났지만 선대가 허균으로 양천 허씨 퇴락한 향반.

초의는 28세 때 소치를 대흥사에서 처음 만난 후 그의 그림 실력을 알아보고는

윤선도 해남 녹우당에 있는 공제화첩을 접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일지암서 함께 3년을 기거.

초의가 금강산 유람 후 한양에 들러 추사를 만날 때 소치 그림 한점을 내밀어요.

드디여 34세 때 소치는 추사 집에 거주하며 애제자가 됩니다 .

추사는 원말 4대가의 한명인 황공망의 대치(大癡) 에 빗대어 '소치(小癡)'라는 호를 지어주며 한마디 하는데,


/ 원(元)의 황공망(黃大癡)은 크게 어리석은 자라며 자신을 낮추는
대치(大癡)라는 호를 갖고 오히려 빛나는 화가가 되었네. 
대치보다 더 크란 의미로 소치라 지었네.
이제부터 이 별호가 그림과 함께 조선팔도는 물론
멀리 중국까지 뻗어 나가길 바라네./


그는 추사 제주도 유배 때는 뭍을 오가며 스승 수발을 들어요.

이런 소치에 대한 추사의 소치 평.

  鴨江以東 無此作矣

/압록강 이동 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


40세 되던 1847년 에는 낙선재에서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영광을 누립 니다

1856년 추사가 71세로 세상을 뜨자 49세 때 낙향, 고향 진도에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은거를. 

이후 몇번 한양을 오가며 대원군 등 과 교유하다 85세의 일기로 추사와 초의의 곁으로 .

그의 남종화는 4대를 거쳐 의제 허백련(무등산 증심사에 화실)으로 이어져

남도 가 예향의 고향이라는 아명을  얻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소치와 두 살 터울 위당 신관호 (1811~1888).

신관호는 헌종 금위 도사,전라우수사,한성판윤을 지낸 정통 무관으로 추사의 제자.

전라우수사로 있을 때 추사가 초의선사에 연결시켜줘 대흥사에 그와 관련된 얘기,유물들이 많아요.

초의탑명 및 탑비문도 그의 작품.

신관호는 한양에 있을 때는 소치를 헌종 어전에 설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수종사 등등 한양  시회 때는 초의,홍현주,신위,김정희,김명희,

학연,학유,황상(다산 강진 애제자) 등과 한패가 되어 어울렸습니다.




두물머리 세미원에서


언젠가 여름 두물머리 세심원엘 갔는데  다산 관련 해설판들이 많이 세워져 있데요.

 그중 초의선사 관련이 있어서 사진 찍고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18년 만에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초의선사를 그리워했나 봅니다.

또한 다산초당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으니,

강진 제자들에게 띄운 편지에서 이리. 

/내가 능히 다산에 돌아가지 못하니 죽은 사람같구나/

다산은 해배 후 마재와 지척인 운길산 수종사를 자주 들러 차를 마시곤 했어요.

수종사는 21세 진사과 합격 연회를 수종사서 열만큼 연이 깊은 곳.

다산,초의,추사,다산의 두 아들인 학연,학유 그리고 홍현주,신위는 

수종사에 모여 다회,시회를 열기도 했고 .(이런 연으로 수종사 찻집 삼정헌이 유명)



다산은 18년 유배 후 고향 마재서 18년을 더 살다 1836년 생을 마칩니다.

그리고 바로 5분 거리 뒷산에.

유배 10년이면 거의가 폐인되죠.

그러나 다산은 역경을 되치기합니다,,, 아니 역사를.

참 낙관적인 성격인게 18년 유배를 산 인생이였지만  이리 자평을.

/불행도 있었고 행복도 있었던 삶 이였다.그러나 행복이 더 많았다/

유택에 서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는 두물머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ps, 외국인 친구가 한국의 산사 하나만 추천하라면

예전이라면 선암사를 먼저 생각했겠지만 이번에 좀 바뀌였어요.

그윽한 대흥사!

그리고 세트로 묶어 호방한 미황사까지.

대흥사서 승용차로 20분 거리

이제 그 달마산 미황사&도솔암으로 갑니다.<계속>






  

2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예쁜솔
    '19.4.17 1:26 PM

    줄거리 탄탄하고 흥미진진한
    대하 드라마를 본 듯한 기분...

  • wrtour
    '19.5.11 12:33 AM

    예쁜솔님!
    늘 감사하고 있어요

  • 2. 망곰
    '19.4.18 6:15 PM

    작성자님 모시고 답사 가고 싶습니다. ^^

  • wrtour
    '19.5.11 12:33 AM

    그런가요 제가 영광이죠 ㅎ
    언제나 행복하시길

  • 3. 사랑
    '19.4.19 5:30 PM

    긴 역사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대흥사
    저도 원글님 모시고 탐방하고 싶습니다.
    올려주시는글들 고맙습니다

  • wrtour
    '19.5.11 12:37 AM

    환갑이나 지나고 하면 안될까요? ㅎ
    사랑님! 감사합니다

  • 4. 견도성
    '19.4.19 8:03 PM

    대흥사..정말 가고싶은 곳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초의스님이 그린 백운동도에 후손이 살고있지요?

  • wrtour
    '19.5.11 12:39 AM

    초의스님 태어난 곳이 무안이던데
    백운동에 후손들이 살고 있군요
    저도 이번에 초의 관련 서사를 많이 알게 되었답니다

  • 5. hat
    '19.4.19 9:05 PM

    내일은 삼정헌에 가서 차를 마셔야 겠네요

    이 글을 생각하며-

    고맙습니다

  • wrtour
    '19.5.11 12:43 AM

    이번 겨울,
    팔당역~예봉산~운길산 거쳐 수종사 까지
    산행하면서 삼정헌에도요
    신행 중 들르는 산사라 시간상 거의 찻집에 못들르는데
    많은 서사가 깃든 곳이라 들러지게 되더군요

  • 6. 화니맘
    '19.4.20 1:27 AM

    경기도 끝자락에서 문득 해남 강진으로 달려가고 싶어집니다
    새삼 자신의 무지몽매함이 느껴지기도 한 밤이기도 하구요
    잘 읽었습니다

  • wrtour
    '19.5.11 12:49 AM

    이렇게 게시물 정리하다 보면 여행을 두번 다녀온 듯해요.
    아니 비로서 여행이 마무리 된 느낌.
    이러면서 저도 많은 걸 배우네요

  • 7. 시원한
    '19.4.22 10:55 AM

    대흥사를 잠깐 일별하고 그 운동장 같이 넓은 절 마당이 볼품없어 보였어요.
    같이 간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여 되돌아 왔는데,
    아는 만큼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했네요.

    어제 해남 나들이로 몇 군데(미황사 포함) 다녀왔는데, 해남이 정말 좋더군요.
    이 글을 보니 대흥사도 다시 찾아가고 싶고, 힘들다고 포기한 도솔암도 가고 싶고
    조만간 다시 해남 여행을 계획해보렵니다.

    글 감사합니다.

  • wrtour
    '19.5.11 12:53 AM

    네,대흥사는 경내에 서서 사방팔방 빙돌며 부드러운 산세들만 바라다 봐도 좋았어요.
    가을이 특히 좋다는데 이번에 꼭 다시 가보려합니다.

  • 8. 에르바
    '19.4.22 1:58 PM - 삭제된댓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순례편 읽고 있는 중인데
    예전 삼십여년 전 뭣도 모르고 다녀온 사찰들에 이리도
    숨은 얘기들이 많았다니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로군요

  • 9. 재영
    '19.4.24 2:21 PM

    글만 읽어도 답사를 다녀온듯합니다.
    글도 잘쓰시고 사진과 여행코스도 너무나 훌륭하네요.
    30년전에 가봤는데 이 글을 보고 당장 떠나고 싶습니다^^

  • wrtour
    '19.5.11 12:58 AM

    30년이면 대흥사도 많이 변했겠어요
    지금 가시면 정말 아련한 추억 속으로 들어가신 거라
    더 감흥이 커질듯.
    꼭 다녀오세요!! R

  • 10. wrtour
    '19.5.11 12:57 AM - 삭제된댓글

    30년이면 대흥사도 많이 변했겠어요
    지금 가시면 정말 아련한 추억 속으로 들어가신 거라
    더 감흥이 커질듯.
    꼭 다녀오세요!!

  • 11. 윤신
    '19.5.15 9:59 PM

    정말 잘보고갑니다.
    대흥사란곳을 이렇게 세세하게 설명해주신데 대하여 고맙습니다.

  • wrtour
    '19.5.23 11:57 PM

    감사합니다
    저도 오랜만에 간곳인데 예전에 보이던 그 대흥사가 아니였어요
    사물을 보는 제 눈이,아니 가슴이 바뀐듯해요

  • 12. 그린
    '19.5.22 1:15 AM

    산사에 대한 해설을...
    그냥 보여주신것 만으로도 역사박물관에서 고급 해설가님의 인문강의를 들었습니다.
    귀가 더불어 맑아짐이 오래동안 마음까지 청명해지겠네요...
    환갑되시면 꼭 공개해주세요...
    찾잔들고 따라다니며 마음속에 녹음해놓고 계속 들을겁니다.

  • wrtour
    '19.5.23 11:59 PM

    감사해요!!!!!

  • 13. wrtour
    '19.5.23 11:57 PM - 삭제된댓글

    ㅎㅎ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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