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작은 꽃잎 한 장에 천 개의 분홍을 풀어놓은 제비꽃, 저것을 절망으로 건너가는 한 개의 발자국이라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물어지는 빛들과,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또 누구의 무덤이라 한다면
바이올린과 기타와 회중시계가 들어 있는, 호루라기와 손풍금과 아쟁이 들어 있는 액자 속을 고요라 한다면
층계마다 엎드린 저 납작한 소리들을 또 불운한 누구의 손바닥이라 한다면
하루 종일 꽃잎 곁에서 저물어도 좋겠네 절망절망 건너는 발자국마다 분홍 즙 자욱한 삶의 안쪽
손바닥으로 기어서 건너가도 좋겠네
세상은 슬픔으로 물들겠지만 꽃잎은 이내 짓무르겠지만 새의 작은 가슴은 가쁜 호흡으로 터질지 모르지만
슬픔으로 물들지 않고 닿을 수 있는 해안은 없었네 짓무르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세월은 없었네
눈부신 분홍, 한때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 민음사, 2015년, pp.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