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요몇년 한여름이면 한번은 가는 곳이 있었네요.
네, 세미원과 두물머리입니다.
주말 전철을 탔어요.
양수역서 내려 역앞 막국수집에서 점심을. 올 때 마다 들리는 곳.
양수역 옆 가정천~~
세미원옆으로 흘러 남한강을 만나죠.
양수역 뒷산 청계산에서 발원하는 데 그곳에 한음의 유택이 있어요.
네,오성과 한음의 그 한음 이덕형말입니다.
남한강과 합수하다 보니 호수처럼 보이고.
연꽃 구경으론 아직 이르네요. 도보로 5분 거리 세미원으로 향합니다.
일부 구역만 피였네요.
다음주 말쯤이나 만개할듯. 올해 많이 늦다네요.
다리는 서울~양평 6번 국도.
상여꽃이 백련이란 걸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연꽃은 저리 연밥과 동시에 피더군요.
+
이상은 연꽃~~
이하는 수련(睡蓮)입니다.
水蓮이 아닌 睡蓮임은 다 아실터.
저녁엔 꽃을 오므렸다 정오쯤에 활짝 펴기에 '잠자는 연'이라는 뜻의 睡蓮입니다,,,그래서 자오련(子午蓮)이라.
하루 내내 수련만 봤다는 모네,,,문자하면 수련의 생리를 잘 설명해주려나요??
15도 정도가 잘려나갔죠.물론 효과적인 부력을 받기위해.
수련의 특징이죠.
조형적으로 순천만 갈대가 연상되고.
이처럼 꽃줄기를 타고 꽃이 물 위로 높이 올라와 있는 게 열대 수련,
물 위에 떠있는 건 온대 수련이라네요.
물속을 들여다보니 우렁 세상~~
몇개를 꺼내 올려 보았습니다.
을지로 3가 골벵이 생각나시나요?? 생맥에 골벵이 무침.
어떤분의 점토인형전이 수련 속에서~~~
남한강 줄기~
건너가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네요,우측 바로 옆이 분원리.
저 산너머엔 한국 천주교 최초 발상지 천진암(퇴촌면)이.
물론 저 산 주변이 사옹원 분원(分院)서 관리하던 왕실 직영 조선백자 생산지구요.
지명도 아예 이름을 따 분원리가 되었고.
땔감,점토에 남한강 수로를 이용한 물류 덕을 본거죠.
저 배다리를 넘어 두물머리로 향합니다.
작년엔 공사가 한창이더니 개통.
물론 인근 능내(마재)가 다산 정약용 생가여서 주교(舟橋) 아이디어를 냈겠죠.
정조 화성행차시 노량진 주교의 설계 및 설치 책임자가 바로 다산.
두물머리~~~
저분들 정태춘 박은옥의 '북한강에서'도 불렀을듯.
당산나무 400살 먹었다네요.
앞으로 족자섬이 보이고,멀리 남한산성이 있는 남한산도.
이쯤해서 어울릴듯한 음악 한곡!!
<Only Our Rivers Run Free>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EsXvDkJ7q4
James Last 악단 관현악 버전이라 잔잔하지만 실은 슬픈 투쟁의 얘기네요.
원곡은 아일랜드 독립을 갈구하는 내용.혼성합창 버전은 피끊습니다.
앞 섬이 족자섬입니다.
그런데 그냥 섬이 아니여요.많은 스토리 텔링이.
그리고 족자섬 너머 우측으로 마재,너머 용마산,그 너머 남한산,우측 끝으로 검단산이 겹쳤네요.
되돌아 보니~~
남한강 타고 내려온 땟군 뱃사공들 저길 등대삼았겠죠.
번 때돈은 투전판에 탕진, 주모는 탁주에 국밥말고 그랬겠죠.
아니 양평 해장국이였을려나요? 남한강 뱃길로 물산이 풍부해서 양평해장국이 생겼으니.
홍천화로구이,마포갈비처럼,,,다 수로와 관련된 음식문화입니다.
현지인엔 당산,성황당으로 치성올리는 성소였을 게고.
저 남한강을 바라보자니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 몇!
1)다산의 중형(仲兄) 정약전은 권철신이 주도한 천진암 강학회에 참가하기 위해 배타고 오르내렸고.
다산은 약전을 따라 놀러다니며 귀동냥을(둘은 죽이 잘 맞았음)
천진암 강학회가 열리고 18년이 지난 1797년 다산은 약전,약종 두 형과 천진암으로 놀러갔어요.
그리고〈유천진암기(游天眞菴記)>를 썼죠.
2)단종 영월 유배길이기도.
단종은 광진나루서 배를 탄 후 두물머리를 지났고 여주 이포나루서 내려 육로로 영월까지.
3)현지서 단종을 죽인 후 피부병으로 고생한 세조.
그는 조카가 거슬러오른 저 물길을 역으로 오대산에서 뱃길 따라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곳 두물머리서 1박을.
이때 전해오는 전승 하나!
비몽사몽 세조 귀에 멀리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알고보니 운길산 수종사 동굴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느낌이 온 세조는 水鐘寺라는 이름을 내리고 중창불사.
4)고려말 우왕도 저 물길을 거슬러 올라 결국 삼척서 불귀의 객이.
이성계에 팽당한 우왕은 예성강 타고 강화까지,그리고 한강 거슬러 올라 강릉에 위리안치된 후 삼척서 피살.
5) 고려말 이규보도 배타고 오른 후 소회를 시로.
6) 신경림은 장시(長詩) '남한강'을 쓰기 위에 뻔질나게.
7) 그리고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황장목 실고 떠내려온 정선,영월 땟군들.
무었보다도 특히,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여사!!!
당 시 나이 63세 비숍은 영국 선교사,조선 통역인,노꾼 2명 총 5명을 이끌고,
1894년 봄날 노량진 출발해 영사기만 한 육중한 카메라 실고 남한강을 거슬러 단양 영춘(온달산성 바로 앞)까지.
그리고 육로로 금강산으로.
40여일 남한강을 탐방기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 생생하게.
당산나무를 떠납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경 표지석있는 곳으로.
예전엔 비닐 하우스 등으로 접근 불가였는데 철거되고 정비되었네요.
저 끝이 바로 한강 10경 중 으뜸이라는 두물경(景) 조망처입니다.
앞이 족자섬,우측이 북한강,좌측이 남한강이네요.
두강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만납니다.
사진 가운데 멀리서 경안천이 흘러오구요.(경안천은 용인서 발원 北流)
족자섬 우측 막 뒤로 길게 보이는 구릉이 바로,
1)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태어나고 격동기 서학을,
2)장가들고, 출사하고 유배떠났으며
3)돌아와 18년 간 여생을 보내다 뭍힌 마재입니다.
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당시 광주군은 엄청 컸죠.송파,서초 일대도 광주군,,,광나루(광진)는 광주로 넘어가기에 광나루)
그리고,,,,, 사진 우측 끄트머리,두물경서 강 건너 마재 우측을 유심히 살피면 물가와 맞닿아있는 성채를 발견할수 있죠.
바로 중앙일보 홍석현 별장입니다.
세상은 좀 떨어져있을 때 잘 보이고 느끼고,,,그러나 봅니다.
강 건너서 마재를 보자니 한 일가(一家)의 파란만장이 여울지네요.
(아마 지금 내가 저 마재에 안에 들어있었다면 이 글은 안썼을지도)
조선 후기 다산 일가 만큼 시대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집안도 없겠죠.
그러나 그 소용돌이를 빠져나와 시대를 한방에 정리해버린,,,그래서 다산이 더 위대한.
결국 당대 정적들을 역사의 쩌리로 만들어버렸죠.
위당 정인보는 1938년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면서 다산을 조선 500년과 등치시킬 정도.
"다산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의 역사요,조선의 정신과 명예가 발전하느냐 쇠퇴하느냐에 대한 연구다"
다산의 아버지는 정재원(丁載遠,1730-1792)~~
본향은 압해(나주),,,한양에서 광주군 마재 입향조는 100년전 모모씨.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마지막으로 진주에서 사망.
재원의 딸이 정승 채제공의 서자와 혼인했으니 사돈지간.(둘은 기호 남인)
재원은 부인을 셋 두었는데 첫부인에게서 약현이,둘째 부인으로 약전,약종,약용,,그리고 딸 하나.
셋째로 부터 약황,,, 총 아들 다섯에 딸 다섯 10남매.
약전,약종,약용은 동복(同腹)으로 어머니는 윤선도 가의 해남 윤씨(조부가 공제 윤두서)
첫째 악현은 맏이로서 역할에 충실했지만 시대의 암운이 깊게.
약현 처남이 바로 광암 이벽!
이벽이 누구인가?? 한국 천주교 개국성조.
강학회 멤버인 이승훈을 북경 천주당에 보내 최초 세례를 받게했고.
권철신이 이끌던 천진암(天眞庵) 강학회 주요인물인 권일신,이가환,정약현,정약종,이승훈 등
강학회(講學會) 멤버들은 죄다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 교리를.
결국 30세 초반에 의문사.
전염병 때문이라 하나 가문의 이름으로 타살 가능성이(아버지 이부만은 대들보에 목을 달기도).
또한 약현은 딸을 황사영에 시집보냈으니 황사영은 약현의 사위.
황사영은 백서건으로 서소문서 참수.
조선 천주교인이 쓴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쓴 정약종은 서소문서 참수.
약종의 큰 아들 정철상도 아버지와 함께.
둘째 정하상은 이후 30년간 조선과 북경 천주당의 밀사로 활동하는 등 암흑기 조선 천주교 한축을.
그리고 아버지 약종이 참수된 그곳 서소문서,,,딸 정정혜도 이때 참수.
정약종 부인도 아들 정하상 건으로 감옥서 태형으로 사망,,,5명 모두 성인 추대.
정약전, 정약용은 약종이 참수된지 이틀만에 각각 포항 장기현,전남 신지도에 귀향.
다시 조카사위 황사영 백서건으로 결국 흑산도,강진에 유배.
유배 현지서 자산어보를 쓴 약전은 16년만에 흑산도서 사망.
다산은 18년 유배지서 목민심서,경세유포 등 저술에 전념,,,해배후 18년을 고향 마재서 시대적 저술 마무리를.
(18년 유배 후 58세 때 돌아온 후 첫 작업이 바로 서문을 써 목민심서를 완성한 것)
다산의 동복(同腹)인 여동생은 최초로 북경 천주당서 세레를 받은 이승훈과 혼인.
허나 이승훈은 정약종,이가환과 함께 서소문서 참수.아내는 노비로.
(이승훈,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은 지금 천진암에 뭍혀있음)
다산 삼형제는 외가 쪽과 정서적 교감이 컸는데 외종 육촌이 바로 윤지충.
윤지충은 부모 위패를 태우고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의 당사자.
이는 약용,약전이 천주교를 버리게 된 계기가 되었고.
여기서 천주교 관련 불편한 진실 하나!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 할것도 없고 최초 세례자 이승훈은 배교했다는.
둘은 현지 지방관으로 있을 때 천주교인을 잡아 옥에 가두는 등 조정에 자신의 포지션을 알리기도.
그래서 다산 자신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권철신,이가환의 묘지명(墓誌銘)을 써 후세에 둘의 억울함을 항변해지만
바로 윗형인 약종과 처남 이승훈은 쓰지않았다는.
그리고 이들 모두는 기호 남인(畿湖南人)이라는 것.
권철신 권일신 형제는 양평(천진암 인근),정양용 형제는 광주 마재,이벽은 광주, 이승훈은 한양,이가환은 여주.
이들의 정신적 스승은 성호 이익(경기 안산).
(이가환은 이익의 종손으로 정조가 다산과 더불어 정승으로 키으려했으니 정조 사후 노론이 가만둘리가).
당연 이들은 천주교를 빌미로한 노론 일당독재의 희생양,,,물론 그 노론은 친일세력을 거처 지금까지 이어지고.
정약용,적약전의 자산어보,정약종의 신유박해(1801),정하상의 기해박해(가장 많은 천주교인이 처형)
최초 세례자 이승훈,황사영 백서,윤지충의 진산사건,천진암 강학회,,,,고등학교 역사서에 다 나오는 얘기네요.
얘기를 돌려,
저 족자섬을 두고서 겸재(謙齋)정선(鄭敾,1676∼1759)을 빼놓으면 정말이지 앙꼬없는 찐빵이죠.
아래는 겸제가 270년 전 족자섬 일대 두물머리를 그린 진경산수.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겸제는 선지자였네요.
왠 선지자라구요???
독백탄(獨栢灘),견본채색, 20.2 x 31.3 cm, 간송미술관 소장.
겸제가 환갑 지나 양천 현감으로 부임했죠(80이 넘어서도 그림을 그렸음).
그는 두물머리부터 행주산성까지 한강 인근 경승지 찾아 실경을 그린 후 화첩을 꾸렸는데 바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그 경교명승첩엔 두물머리 인근도 둘 그렸는데 바로 독백탄(獨柏灘)이 그 하나.
바로 저 족자섬을 가운데 두고 남한강,북한강,마재, 예봉산,운길산을 그려넣었습니다.
그러나 구도의 중심축은 마재와 족자섬!
자 그러면 그림 따라 현재와 맞춰보죠.
가운데 섬이 족자섬,족자섬 뛰쪽 소나무 능선은 바로 다산의 고향 마재.
그러니 홍석현 별장은 마재 끝 소나무가 우뚝한 그 지점이겠네요.(독백탄 그림의 중앙에 해당)
그래서일까요,홍씨 쪽에서 간송미술관에 독백탄 매매를 타진했다는 풍문도.
자기 별서(별장)가 겸재를 통해 타임머신으로 생생화면을 탔으니 욕심 안날리가.
마재 능선으로 연결된 우측 먼 산이 운길산인데 중턱에 푸른 나무들이 보이는데 바로 수종사네요.
다산은 예빈산 즉 예봉산에 올라 관련 시를 남기기도 했으니 수종사도 자주 들러 차마시곤.
21세 진사과 합격연회를 수종사서 열었네요.
조선 후기 다도(茶道)는 다산~초의~추사로 이여지죠.
초의선사는 스승 다산과 40년 지기 추사를 만나기위해 해남서 한양에 오곤했는데 자주 수종사를 숙소로.
1830년에는 다산,초의,다산의 두 아들인 학연,학유,홍만주(정조 사위),자하 신위(추사,초의 제자)가
수종사에 모여 다회를 열기도했읍니다.신위가 관련 글을 남겼고.(연으로 수종사 찻집 삼정헌이 유명)
그리고 운길산과 대비를 이루는 왼쪽 산이 예봉산(앞쪽 지하로 중앙선 전철이 지나감)
왼쪽 멀리가 검단산으로 검단산과 예봉산 사이가 팔당댐입니다.
강은 저리 두 산 사이 협곡을 지나기에 이곳을 두미협(峽)이라 불렀죠.
두미협(峽)이라???
유래는 팔당댐과 검단산이 접한 곳이 베알미동(하남시)인데 그곳에 두미진(도미진)이 있어 두미협이.
하남백제(현 하남시 일대로 370년간 수도)의 개루왕과 도미부인의 얽히고섥힌 도미(두미)설화의 무대입니다.
배알미(拜謁尾)라??
단종이 팔당 두미협 물줄기를 거슬러 영월로 유배 시 백성들이 군졸 감시 때문에
멀어지는 단종 뒤쪽을 향해 배알했다해서 배알미동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어딜까요???
네,바로 족자섬 바로 앞 길게 강쪽으로 내밀고 있는 악어 꼬리 같은 그곳이네요,
그러니 외돗을 단 배가 떠있는 곳은 남한강,족자섬과 악어꼬리 사이가 북한강입니다.
옛날에는 족자섬과 마재 사이를 흐르는 내가 있었는데 이를 쪽잣여울이라 했다네요.
겸제는 이를 독백탄이라 했고,,,,탄(灘)은 여울.
그림이 그려지나요??
물론 겸제의 이젤이 놓인 장소는 아랫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붕어찜 마을) 쪽으로,
두물머리 당산나무 맞은편 남종면입니다.
이리 독백탄은 겸제의 선견지명일지도.
겸제 사후 3년 후 마재에서 다산이라는 시대의 석학,경세가가 태어났으니.
족자섬,찬찬히 보니 토끼가 누워있다는.
어,물새들의 활발한 움직임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남한강,북한강 그리고 저 아래 팔당쪽,,,,사방에서 죄다 족자섬으로 들어가요.
저무니 집 찾아드는 거겠죠.
네,족자섬은 여의도 밤섬처럼 물새들의 낙원입니다.
각종 오리류,기러기류,,,,왜가리,가마우지 등등.
겨울이면 고니,큰고니등 백조 때들로 이따금 '백조의 호수'가 되기도 합니다(이때 가시면 횡재한 거죠)
70년대 초 팔당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족자섬에도 민가가 있어 북한강에서 내려오는 뱃사공들의 쉼터였다죠.
(독백탄 보면 민가 몇채가 보임)
물새들의 낙원은 팔당댐으로 호수가 생기면서 족자섬에 생긴 변화입니다.
세미원부터 두물머리를 빙돌아 원점 회귀하니 어둠이.
운길산이 보이네요.수종사 저녁 종소리도 울리겠어요.
연밥 먹고 귀가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jSdmT7vN48&list=PL0F1D8858730CDFFF
북한강에서/정태춘,박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