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학생들과 DK 출판사에서 펴낸 철학책을 교재로 함께 읽기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고대 철학부터 시작하여 어제 밤 라이프니쯔와 버클리에 관한 것을 읽었으니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온 것이네요.
사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제겐 가장 준비도 많이 하고 부담도 많은 시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신에게 도전이
되고 수업을 마치고 나면 아쉬움도 있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궁리도 많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제 밤 이상하게 수업을 하고 나니 아이들도 저도 한단계 성장한 기분이 들어서 묘하더군요. 전 날 밤 자본주의 역사바로 알기를 읽은 시간에도 2년 넘게 함께 해 온 아이들의 성장이 눈부시다고 느껴서 행복했었는데 그 반의 느낌과 철학사수업은 또 다른 느낌이 들었거든요.
물론 깊숙하게 철학의 제 문제를 다루는 그런 책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한 철학자가 어떤
배경에서 태어나고, 그가 주로 관심갖는 문제는 무엇이고 그가 나오기 이전에 누가 비슷하거나 다른 사고를 지녔는가
그 뒤에 어떤 사람이 그로 인해 영향을 받았는가 이런 컨텍스트가 제시된 다음 그 사람의 글에서 중요한 인용구가
소개되고 마인드 맵식으로 그 사람의 주요 사상을 설명한 다음 본문을 해석하는 아이들의 번역에 무리가 있는 곳은
고치고 개념이 어려운 곳은 풀어서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어제는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를 비교한 글을 복사해서
함께 읽었습니다.
다음 부터는 차라리 한글로 그 철학자에 대해서 미리 읽고 수업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나오고 라이프니쯔의
글에서 미리 만난 말들이 한글로 소개되니 앗 이 말은 우리 교재에서 본 것인데 여기도바로 나오네 하는 감탄의
소리도 나오고요. 인터넷 강의 찾아서 들은 것이 좋았던 한 녀석은 오늘은 강의를 듣지 않는가 물어서 재미있는
반응이네 하고 놀라기도 했지요.
철학이라면 무조건 어렵게 느끼던 한 녀석은 학교에서 공리주의와 칸트에 대해서 배웠노라고 하면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볼 수 있는 영상은 없는가 물어서 남아서 보도록 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영어는 잘 하지만
인문적인 책에는 접근을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철학시간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녀석이 어제는 혼자서
다른 책 읽고 싶다고 하더니 수업이 끝나고 나서 물어보는 겁니다. 선생님 철학이 어렵긴 한데 학교에서도 배우더라고요.
그렇게 서두를 떼면서요.
학교에서 수업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교과서에서 조금 더 깊이까지 다루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그것이 기본이 되어서 아이들이 모르던 세계로 진입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하는 바램도 있고요.
어린 시절 세계사 시간이 정말 좋았습니다. 언젠가 가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세계 지도를 보면서 상상하던
시간들, 그래서 세계사는 제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창문 구실을 해주었고 그것이 공부라기보다는 새로운 공기의
호흡이라고 느꼈던 것도 기억나고요.
행복한 왕자에서 책읽기 모임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크리스틴님이 기꺼이 책 읽는 소파 두 개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아이들은 오면 서로 그 의자에 앉으려고 하더군요. 어제는 성진이가 와서 밖에서 읽어도 되요? 하더니 나가서 의자를
두 개 붙여 놓고 편안한 자세로 책 읽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왕이면 의자를 두 개 정도 더 구해서
본격적으로 책읽는 의자를 가동시켜 볼 시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평생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학습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견 있으신 분들은 메모해주시고 혼자서 하기 어려운 일이니
나도 돕겠다고 마음이 정해지신 분들은 그것도 역시 귀뜸해주시길 바래요.
철학사 책을 공연히 시작했나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하고 망서리고 후회도 되던 시간을 넘어서 ,이렇게 저절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할 일이 많아서 바쁜데
또 일을 벌이다니 제 정신인가 하는 목소리도 듣고 있습니다.제 안에서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리는 것을 보면 이 일이
벌써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싶더라고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는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
그런 일을 꾸릴 장소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여서 판을 벌이면 정해진 코스대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좋은 점들도 발견되겠지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희석되고 나니 하고 싶은 일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일까요?
공간을 좀 더 책 읽고 싶은 분위기가 나는 곳으로 꾸미는 일에도 많은 힘을 보태주실 분들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 히에로니무스를 골라서 보는 마음. 전달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