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에의 질주 - Running On Empty]
감독 시드니 루멧 / 출연 리버 피닉스, 크리스틴 래티, 쥬드 허시 / 러닝타임 116분
허공으로 질주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질주할 수도 없으며 또한 허공을 질주할 수도 없습니다.
이 불가능하고 공허한 상황을 영화는 너무도 침착하고 담담하게 잘 그려냅니다.
열 일곱 살 대니는 베트남 반전 운동을 하던 부모가 젊은 시절에 네이팜탄 실험실을 폭파한 혐의를 받고 십수년간 FBI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생활에 배어 자신의 꿈과 미래까지 모두 저당잡힌 채 반쯤은 절망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사춘기도 거의 끝나가고 지금부터는 막 창창한 미래가 펼쳐지려는 대니에게는 무척 힘겨운 짐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6개월마다 한번씩은 머리색깔과 눈동자 색깔까지 바꾸며 살아가야하는 대니의 가족은 그래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또한 참아가며 서로를 보듬어 주며 긴장의 삶을 잘 이어갑니다.
물론 그 사이사이 위기도 오지만 어떤 인생, 어떤 가정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 위기는 모두 감수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 날, 마이클로 이름을 바꾸고 정착한 한 마을에서는 새로 전학간 학교의 음악교사인 필리스 선생님이 그의 천부적인 피아노 재능을 알아보고 줄리아드 진학을 권유합니다.
단지 권유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니를 위해 줄리아드 진학을 노력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대니는 필리스 선생님의 딸인 로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자기 가족의 비밀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며 자신을 감추기만 하다가 로나의 실망까지 사게 되자 결국 로나에게 자신과 가족의 비밀까지 털어놓고 맙니다.
울먹이며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말하던 대니를 로나는 오히려 껴안으며 위로하고 그 때 대니는 독립을 결심하게 됩니다.
아들의 미래를 필리스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된 어머니는 14년간 단 한번도 찾지 않은 자신의 부친을 만나 외손자인 대니를 부탁하지만 대니의 아버지인 아더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FBI의 추적 때문에 결국 이별할 수 밖에 없는 가족의 처절한 상황이 이들을 절망으로 내몰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살리고 아들의 삶을 자유로이 놓아주기 위해 결국 대니를 독립시키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리버 피닉스의 매력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산됩니다.
아마도 이 배우만큼이나 이 역할, 그리고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배우는 드물었을 것입니다.
당시 조니 뎁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밤새 키아누 리브스와 술을 마셨다더니 어쩌다 리버 피닉스 혼자만 새벽녘에 변사체로 발견됐다는데... 참 아까운 나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버려서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만 드는군요.
백인 상류계층을 경멸하며 실내악 연주회에 초대한 로나와의 데이트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아버지에게 '권위에 도전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대니는 단 한 번 아버지의 권위에 반항하는데 그 강렬한 인상이 바로 이 영화를 더욱 깊은 사색의 통로로 만들기도 합니다.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불순하고 과격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덮어놓고 빨갱이 짓이라고 질타하기도 하는데, 지금이야 대통령을 허접쓰레기처럼 대하지만 불과 2~30년전만 해도 대통령을 임금님처럼 생각했던 우리네 정서로 본다면 나이 지긋할수록 아주 않좋은 시선으로 볼 수 밖에 없을 듯도 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되짚어 보더라도, 제국주의 시대에 미국과 일본이 서로가 필리핀과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삼기로 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가쓰라-테프트 비밀 조약을 체결한 직후, 그 즉시 우리 나라에서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던 선교사들은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강조하여 가르쳤던 역사가 있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길들여졌던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논점 한가지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 싶습니다.
왜 당시 선교사들은 그런 논리를 폈을까요?
그들이 그런 주장의 근거로 삼은 것은 로마서 13장 1절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이 구절을 지금까지도 한국과 미국의 교회들은 국민들에게 정치권력에 굴복할 것을 요구할 때마다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는 치졸한 이중잣대이자 권력과 결탁한 교회의 추악한 그림자가 드리운 역사적 오명일 뿐입니다.
본래 신약성경은 헬라어, 즉 오늘날의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사용했었던 고전 헬라어이고 또 하나는 시장통에서 일반 시민들이 사용했었던 코이네 헬라어 입니다.
그중 신약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록에 사용된 단어들의 용례와 본래 뜻은 당연히 코이네 헬라어식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합니다.
고전 헬라어와 코이네 헬라어의 해석은 단어에 따라 미묘한 차이에서부터 정반대의 차이까지 매우 다양하게 그 차이점이 보입니다.
위에 인용된 로마서 13장 1절은 고전 헬라어식으로 해석된다면,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니 국민들은 닥치고 복종하라' 로 해석될 여지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코이네 헬라어 식으로 해석하자면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으니 권력자는 함부로 횡포를 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로 해석되는 기가막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즉, 본래 뜻은 정치권력자 밑에 있는 백성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정치 권력자를 향한 엄중한 경고인 셈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구절만 잘못 해석되어져 우리 나라와 미국의 기독교가 거의 100년가까이 정치권력자와 결탁한 교회에 의해 많은 국민들의 입을 막으며, 그들의 외침을 외면하며, 신의 이름을 팔아가며 전횡을 저질러 온 것입니다.
그러한 악습이 지금까지 잔재가 남아 여전히 국가는, 학교는, 교회는, 기업은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억압합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대니는 자기 부모가 왜 국가 권력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왜 이렇게도 힘겹고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국가 권력이 네이팜탄이라는 무기를 죄없는 민간인들에게까지 사용하여 베트남에서 대량 학살을 한 옳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부모는 불의한 권위에 도전하여 올바른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간격과는 관계없이 대니는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은 대니를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힘겹지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허공(虛空 ; empty)은 결국 마지막에 창공(蒼空 ; sky)으로 바뀌어 아무 것도 없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대니의 절망의 미래가 자유로이 훨훨 날아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소망의 미래로 날개짓 하게됩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은 우리 나라에 알려진 영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어떤 영화 전문지에서 미지의 명감독으로까지 소개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연출합니다.
그러다보니 범작도 태작도 많습니다.
그러나 천재는 단 한 편의 걸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장 뤽 고다의 말을 인용해본다면 이 감독은 이 한 편의 걸작만으로도 충분히 거장의 반열에 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 10편 중의 하나이자 무엇보다 리버 피닉스를 기억하기에 이 영화만한 작품 또한 없다고 생각하는 수작이기도 합니다.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제게 있어서는 "아이다호"가 아니라 "스탠 바이 미"일 것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어쩌면 그런 깊은 내면의 연기가 사람을 끌어당기는지...
이미 오래전에 우리 나라에 비디오로 출시 되었으나 보유하고 있는 대여점도 많지 않고 테잎도 많이 손상되어 한때 희귀 비디오로 분류 되기도 했는데 지난 2001년 9월에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서 새로 재출시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나마도 보유하고 있는 대여점은 흔치 않습니다.
어쨌거나 좋은 영화 한 편 보고싶어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분들에게 꼭 한번씩 보라고 권유하고 싶은 영화기도 합니다.
(물론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일단 찾아서 볼 수만 있다면 들인 노력이 절대 아깝지 않을 수작입니다. 왜 좋은 영화들은 이다지도 찾아보기가 힘든지 참 아이러니 합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슬프지만 이들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또한 답답한 현실의 짐을 벗어나는 순간은 가슴 깊은 곳 영혼을 깨우듯 감동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억지스럽고 때로는 눈꼴사나운 헐리웃식 해피엔딩을 싫어하지만 그동안 제가 보아왔던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기억에 오래남는 아름다운 해피엔딩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대사는...
"Guitar is my life..."
PS. 제목 "Running On Empty"는 우리 말로 단순 번역하자면 "허공에의 질주"가 되기는 합니다만 원래 영어권 사람들이 평소에 이해하고 있는 뜻은 "연로가 바닥날 때까지 달린다"는 뜻이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