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삼한지를 읽느라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벌써 8권,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다른 마음으로 백제를 치러 모이는 장면으로
8권이 끝났습니다.
지난 금요일 전주에 다녀왔는데 마침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역사의 시기마다
그 곳은 어떤 상태로 있었나를 유물로 보여주더군요.
마침 삼한지를 읽고 있는 중이라 좀 더 생생하게 상상하면서 전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역사책에서 수없이 읽는 지명,그래도 생생한 것이 덜 한 이유는 그 곳이 그저 지명이기가 쉬워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그러다가 정말 그 곳에 가보게 되면 다음부터는 그 지명이 그저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장이 되는 경험이 있지요.더러.
진덕여왕이 죽고 나서 화백회의에서 다음 왕을 뽑는 자리,
김춘추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알천에 대해서
역사책에서는 그저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만 읽었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알천이란 인물에 대해서 상당히 큰 비중을 갖고 다루었더군요.
인물의 크기에 놀라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대하소설은 제게 역사책에서 모자라는 점을 보충해주고
다시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책읽기가 과연 과거사에 관한 가이드로 끝나는가
그것은 물론 아니지요.
그것이 현재에 대한 길잡이,혹은 미래의 삶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지나간 일에 대한 회고취미에 불과하기 십상이겠지요?
수없이 많은 인물들,그들이 역사의 한 시기에 벌이는 경합이나 판단
배반과 우정,상호역할속에서 성장하는 것,
한 높은 정신의 크기를 지닌 인간을 만나서 변화하는 사람들
어떻게 이런 악한 인간이 있을 수 있나 눈뜨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사람들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정신이 있을 수 있었을까
연민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
그 속에서 그들은 지난 역사속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옆에서 호흡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하기도 하는 그래서 더욱 생생한 책읽기가 되고 있는 중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일요일 도서관에 나가기 전에 그림을 보고 싶은데 누굴 보나 하는 순간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문봉선님이었습니다.



강산과 들녘이 그냥 강산과 들녘이 아니게 보이는 시기라 그런 모양일까요?
전주의 경기전에 가서 본 대나무숲
규모는 적어도 제가 좋아하는 대숲을 보고 있으니
여름에 이 곳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보는 중에 죽림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어서 얼른 클릭을 해보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