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난 아들을 데리러 한 학부형이 오셨습니다.
이미 아들은 가고 없어서
잠깐 틈이 나는 시간동안 그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매중 큰 아이인 그 아이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피시방 주인으로
하루 종일 실컷 게임을 했으면 하는 것이 머리속을 맴돌고 있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누군가 자신에게 설득을 할 수 있으면
공부하겠다고 말하는 약간 덜렁대는 녀석이지요.
우리 집 아들과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인데
어머니가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 수업 시간에 어때요?
글쎄요,수업중에는 그래도 태도가 많이 좋아졌지만
집에서 공부하는 정성이 부족한 것 같네요.
그래도 요즘 제게 기분좋은 일이 있는데
정말 오랜 세월 만나도 변화가 없다가 중학교 3학년 올라가면서 마음을 달리 먹고
이제는 정해진 수업시간 외에도 늦은 시간에 와서 공부하라고 하면
군말없이 와서 하는 아이도 있거든요.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와야지 밖에서 미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같아요.
그런데 그 마음을 어른인 우리가 줄 수는 없는 것 같고
어떤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자신속에서 우러나오길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집에서 엄마가 (엄마가 수학을 전공한 분이라 ) 수학은 도와주시는 것 같은데
다른 과목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그렇게 물어보니 방송을 듣게 하려고 한다고 대답하시더군요.
저도 마침 아들이 들을 방송 교재를 산 상태라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서로 이야기를 하던 중
동생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아이의 여동생이 공부하는 태도는 오빠와 너무 달라서
무었이든 마음 먹으면 해낼 여력이 있는 아이라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딸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가 울먹입니다.
집안이 어려워져서 혼자서 공부하는 중인데
오빠 대신 그 아이를 가르치고 싶다가도
그래도 오빠가 먼저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회사에서 나와서 자영업에 손을 댔는데
그 일이 너무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미리 말씀을 하지 그러셨어요?
함께 공부하다가 사정이 생긴 아이들이 그냥 오는 경우가 있으니
부담느끼지 말고 꼭 보내주시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니 꼭 보내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보이시면서 집으로 가는 뒷모습이 마음에 밟힙니다.
어린 시절의 안타까운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형제가 많아서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집안 형편이었는데
알고 싶은 것은 참 많았지요.
그 때 어린 마음에 생각을 했었습니다.
누군가 지금 나에게 그냥 원하는 지식을 그냥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바로 갚지는 못 하겠지만
커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으련만
그렇게 아낌없이 주지는 못하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갖고 있는 지식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을 한 날이었습니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이 마음속에 박히는 날이기도 했지요.
눈에 보이지 않으나 보려고 마음 먹으면 보아야 할 고통이 얼마나 많을까요?
한 집의 어른이 경제적인 능력을 상실하여 가족이 겪는 고통이 무섭기로는 가장 무서울 수 있지만
꼭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아이들 각자가 성장하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도 있지요.
한 아이 한 아이의 마음속에 회오리치고 있는 문제들에 좀 더 마음을 쓸 수 있는
그런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제 밤 늦은 시간까지 소설을 읽다가 자서
오늘은 조금 늦게까지 자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일찍 눈을 떴습니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몸을 움직이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가느다란 눈발이 보이네요.
어라?
그리곤 몸이 완전히 깨어버렸습니다.
아침에 모짜르트를 들으면서 보고 있는 화가는 코로입니다.
장 밥티스트 까미유 코로라는 긴 이름의 화가이지요.
그의 그림은 도판으로만 보면 그다시 좋은 줄을 모르겠던데
오르세에 가서 직접 보고 나서 느낌이 확 다르더군요.
그 뒤에는 가끔씩 보게 되는 화가중의 한 명인데
마치 캔버스에 가루를 뿌려서 은은한 느낌을 주는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요?
어제 밤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던 중 메릴 스트립의 대사중에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 있었습니다.
고통을 견디는 힘에 대한 것이었는데
우리가 못 견딜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통도 사실은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제가 정신적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사는 일이 가시방석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생각나더군요.
그 때가 마침 소설가 박완서님이 아들을 잃고 힘들어 하던 시기에 쓴 책이 한 권 출간된 시기였습니다.
수녀원에 가서 수녀님과 이야기하던 중
수녀님이 한 말이었는데
지금도 저는 어려움이 닥칠 때 그 말을 묵상하고 힘을 얻습니다.
왜 그 일이 내게 일어났느냐고 반문하지 마시라고
왜 내겐 일어나면 않되는 일이냐고 묻더군요.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왜 나는 나에겐 마치 인생에 아무 일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왜 내게 이런 일이라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행동하는가
그 때 이후 인생에 대해 어리광부리는 마음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다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는 일의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고 고통을 지긋이 바라보는 힘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지금 어려운 일로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말이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큰 아이가 사춘기를 겪을 때도
처음에는 왜 내 아이가 이럴까
마음이 볶여서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혼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요.
지금도 알고 싶은 욕구,하고 싶은 일이 다양한 제겐
거의 무기력하다고 할만큼 하고 싶은 공부나 알고 싶은 욕구가 적은 아이가
견디기 힘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학교가 끝나면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방안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때 마음이 지옥이란 것을 알겠더군요.
제 마음은 없고 아이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제 마음의 천국과 지옥이라니
그래서 이렇게 살아서는 둘 다 견딜 수가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과감하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냥 제스처가 아니라 마음을 놓는 일이 어찌 쉬웠을까요?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내 결정이 잘하는 짓일까
반문하기도 했었지요.
그렇게 한 일주일을 보내자 아이가 슬며시 말을 겁니다.
엄마 나를 포기했어?
왜 ?
공부하라고 말을 하지 않으니 좋긴 한데
엄마가 나를 포기한 느낌이 들어서 이상해
엄마가 원하는 대로는 못 하겠지만
예전처럼 공부하라고 말을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할께
엄마 나를 포기하지는 말아줘
그것이 우리 관계가 변한 시작이 되었지요.
지금은 아들이 정신적으로 크느라 생병을 앓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되풀이되는 시간
처음 겪는 것보다는 그래도 덜 낯설어서 낫지만
마음이 힘들긴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이다가도
그 아이도 크느라 얼마나 힘이 들까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독입니다.
잘 되는 날도 있고 더 이상 참기 어려운 날도 있지요.
너무 화가 나면 소리를 버럭 지르기도 합니다.
소리지를 때의 무참한 심정이라니
그렇게 살면서 조금씩 저도 변하고 아이도 변하고 있는 중이지요.
얼굴에 가득하던 반항기가 조금씩 빠지고
이젠 예전의 순진했던 얼굴 모습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놓는 일이 쉽지 않지만
놓아야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아주 가끔씩 체험을 합니다.
아침에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쓰다보니
벌써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군요.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고통
그러나 보아야 할 고통이 있으면 함께 나눌 수 있고
보이는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함께 나누는 그런 하루가 되길
기도하는 심정으로 성당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