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질문에..얻어갑니다/
숙종이 정말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요
사랑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권력..ㅋㅋ
장옥정에서는 장희빈을..연심상대로..보는데.
과연....누굴까요
숙종.......질문에..얻어갑니다/
숙종이 정말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요
사랑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권력..ㅋㅋ
장옥정에서는 장희빈을..연심상대로..보는데.
과연....누굴까요
자기자신 아닐까요
그게 궁금...
합장 해달라고한 인현왕후일지..그냥 죄책감인지..
워낙 변덕이 심했다니..그때 그때 진심이었는지..ㅎ
조선시대에 저런왕도 계셔셔 역사가 조금은 로맨스물도 되는것 같네요..
사실......세종대왕님..시절은 재미가.반감.ㅋㅋ
어디서 얼핏보면..영조의 어머니 숙빈도 멀리했고.ㅋㅋ
참..장옥정보니..동이 생각나네요.
숙종의..본심은..뭘까요.
권력때문에..아내마져.이용했다면..참..불쌍하시기도하네요.
누구를믿을수없다는거네요..
그러보면 부인을 믿었던 사도세자는.ㅠㅠ
차라리 숙종이.현명했을까요
그냥 그 때 그 때 달랐을 겁니다.
누굴 사랑하다뇨.
왕은 자기 눈에 이쁜 여자에게 순간적으로 꽂혔을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 있었을까요?
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이?
세종대왕님...자식이 최고 많은 왕중 하나셔요..말그대로 다산왕...ㅎㅎ
알아요~~~~~
그 시대는 평탄해서..재밌는 사연이없다..이런거죠.
세종대왕에..장영실 어른정도가..소설같은사연이구요.
세종대왕님.넘완벽하셔셔- 고기덕후 ㅠㅠ 다산왕..운동싫어함 -
ㅎㅎ
자식대에는.....본인도 그런지 몰랐겠죠
이를 사랑했던거는 사실이었을듯해요.그 당시에는..
아니면 궁밖으로 쫒겨간 궁녀를 6년만에 다시 불러들였을까요? 다만 본인 성격의 변덕많음과 옥정의 분수를 넘은 권력욕과 당시의 분위기상...끝나버린 거겠죠.암튼 옥정을 한때 사랑은 했었다..는 사실이나..
정말 러브 오브 히즈 라이프...는 누굴지..그게 전 궁금해요..
숙종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었죠,
자기 권력을 위해서 여인들을 이용했을뿐
장희빈도 인형왕후도 숙빈 최씨도
권력을 위한 도구였죠.
사랑은 했었던 듯
단 그 사랑도 권력을 위해 이용했고
그녀를 만나고 십년간 거의 다른 여잘 후궁으로 취하지 않았죠.
새 후궁을 만든 시기도 그녀가 왕비로 있던 마지막 해에 생겼죠.
변덕이 죽 끓었던 그가 그나마 가장 오래 사랑한 듯
그러면..장옥정을 사랑했겠군요., 10년동안 후궁을 취하지않았다니..
흔치 않는일아닌가요..
조선 왕조사에요..
그냥........소설을하나 더 쓰면........ 넘 사랑했기에..미움이너무커져
죽이고 싶을정도로....미움감의배신감.
ㅠㅠ
숙종..그 분궁금하네요..ㅋㅋ
그런 사람을 남편으로는두고 싶지는않네요..
움직이는거죠
그리고 후궁이 없었다면 그건 책봉을 안한거겠죠
왜냐면 질투도 심했을거고,장희빈을 옹호한 세력들이 집권했을테니까요
그냥 하룻밤 상대들이요
사랑은 했겠죠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아니니까
사랑은 도구가 아니였을까
첩지 못받은 혹은 큰 사고 안일으키고 자식 못본 궁인은 실록에 기록이 없을뿐..
없었을 리가...
왕이 한번만 잠자리 하고 다시는 안찾은 궁녀들이 수두룩해요.이른바 승은 상궁...상궁으로 진급해서 질투와구박받으며 잊혀진..
옥정이 만나고 여자가 없긴요...-_-
인현왕후가 승은상궁으로 오래 머물러 있는 숙종이 자주 찾는 궁녀들 첩지 내려주는게 어떨지....하면서 숙종한테 건의하고 그랬는데요 뭘.
왕도 사람인데 사랑을 하긴 했겠죠,,
그게 당연하게 여러여자 사랑해도 괜찮은
합당한(?!) 권력을 쥐고있으니
이여자 저여자 취할수 있었던거고,,
여튼 옥정이를 무지막지하게 이뻐하긴 이뻐한듯,,
후세에 길이 길이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걸 보면ㅎ
정권 쟁탈전이죠.
인현왕후 세력과 장희빈 세력간의 이전투구.
세력의 주도권에 따라 폐비되고 복권되죠.
조선의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군왕이. 숙종이죠. 그 강력한 왕권을 위해 당을 좌지우지 해야 했고, 그 당에서 자기 세력의 여인을 왕후로 민거죠. 일종의 정략혼. 최후의 승자는 인현왕후도 아니고 장희빈도 아니고, 무수리 최씨.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았았던 무수리 최씨를 어머니를 둬야 했던. 영조는 평생을. 당파들 사이에서 줄을 넘나들어야 했고,
탕평책 이란 미명하게. 당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봐야 했죠.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여야 만 할 정도로.
그 여자가 명빈박씨에요.
승은상궁이었죠.
옥정이 만나고 여자고 없었다가 아니라 거의 10년간 다른 여잘 들이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정확히 10년은 아니긴 하지만요.
장희빈이 숙종의 여자가 된 것이 1680년이고
인경왕후가 10월에 죽고 11월에 승은을 입었다고 함
명빈이 숙종의 여자가 된 것이 1688년
기록엔 1688년이라고 안 나왔지만 복위된 인현왕후가
10년간 승은 상궁으로 있는 애 있으니 직첩을 내리자고 건의했으나
실제로는 직첩을 받은 것은 1698년 아들 연령군을 회임하고 나서에요.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균(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서궁(西宮: 경운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사사시킨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의 《가례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되었다.
위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를 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적을 남겼다.
14년간 집권한 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숙종은 45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이라 하였다. 환국정치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숙종 시대는 붕당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정책대결 속에서 국가발전이 가속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 초에는 왕권 강화를 주장해 온 남인이 집권하였는데,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복상논쟁에서 왕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大功)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의 승리는 현종 중반 이후 기반을 다져 온 허적 일파의 정치적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
숙종 즉위 초에 집권한 남인은 허적·윤휴 등 이른바 온건한 탁남이 주동이 되어 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기관을 부활시키고, 그 본진으로서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1676년)을 축조했으며, 한꺼번에 1만8천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아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과 강화도의 48개 돈대(망루)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의 재등장은 마침 1674년(숙종 원년) 청나라에서 오삼계의 반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인 정권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렸던 서인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영수 허적이 대흥산성의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윤휴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남인들도 축출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한다. 이 무렵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1683년).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 즉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강조하였으며,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한 점에서 정책적 차이가 있었다. 왕은 양파를 연립시켰으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노론으로서, 송시열과 삼척으로 불리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 · 김만기 · 민정중이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2] 그런데 인현왕후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그는 장희빈의 사사를 결심한다.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가 자신을 투기, 괴롭힌다는 호소 역시 장희빈 사사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2]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2] 숙종은 노론의 때아닌 존호 추상 요청을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해 수락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정유독대'를 실시했다.[2] 이때 숙종은 이이명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청을 하였는데, 사관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 독대 사건은 후일 신임옥사 때 이이명의 발목을 잡는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2]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2]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정승)을 사인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43년 7월 28일)”
숙종의 연잉군 추대 기도는 소론과 남인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된다.
그밖에, 숙종은 조선의 제2대 국왕인 공정왕에게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으며,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외롭게 죽은 노산대군과, 그 아내 노산대군부인 송씨의 복위를 청하는 주장을 받아들여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키고 각각 단종이라는 묘호와 정순왕후라는 시호를 올림(1698년)과 동시에 사육신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으며(1691년), 폐서인되었던 인조 적장남 소현세자의 아내인 소현세자빈 강씨를 민회빈으로 복위시켰다.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을 완성하였고, 《선원록》 《대명집례》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귀중한 책이 편찬되었다. 또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1718년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케 했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1720년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이명을 불러 사관의 입회 없이 연잉군 금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긴 뒤 사망했다. 이 유언은 신임사화의 화근이 되었다. 능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무덤 언덕 옆에 함께 잠들어 있다.
그는 1715년부터 노론 중신 이이명을 불러다가 비밀리에 독대를 하며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이를 근거로 노론은 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희순왕(僖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고, 그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왕권 강화 정책은 정치 세력을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에 그가 죽은 후 절대 왕권은 숙종의 치세에서만 끝이 나, 숙종처럼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은 다시는 나오지 않게 된다.
조선의 왕조 중 가장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로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태평안일했으며, 그의 애증의 감정 노출이 심한 것을 당인들이 교묘히 조종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재밌네요...
승천하지 못한 악귀가 되어 사도세자의 영혼을 갉아먹었다는 설이 있죠
무당옷 같은 거 입고 해괴망칙한 언행을 해대니,,, 문무백관들이 뒷담화를 까대고
가뜩이나 '어머니로 인한 출생의 열등감'으로 기죽어 있던 영조가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죠?
사약을 받으며 경종의 고환을 잡고 늘어져서 요절하게 했던 희빈 장씨~!
이건 딴 소리인데 장희빈이 사사되는 과정에서
숙종은 숙빈 최씨의 고변만을 듣고 그 어떤 증거도 없이 장희빈을 옥에 가두었어요.
그리고 장희빈이 사약을 먹고 죽은 다음
이후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는 없다는 전교를 내리죠.
여기서 숙종이 정말 무섭다고 느껴졌던 게...
이건 숙빈 최씨보고 한 소리였거든요.
만약 장희빈을 겨냥해 언급한 거였다면
이미 당사자는 죽고 없는 마당에 쓸데없이 말할 필요는 없는 거였거든요.
이건 숙빈 최씨에게 니 소원대로 장희빈은 숙청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라...
니가 아무리 노력한들 중전이 될 수는 없으니 정치게임은 그만하라는 일종의 경고였죠.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후 숙빈 최씨는 궁에서 떠나 기거하다가
환갑인가 칠순 때에 한 번 숙종의 얼굴을 볼 수 있었어요.
숙종은 적장자로 태어나 그 권위부터 남달랐고
저 위에 환국을 일으켜가며 정치파워를 조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부인조차도 그 세력이 강해진다 싶으면 내치고 다시 들이고 사사해가면서
그 힘을 조정하려 했어요.
어떻게 보면 숙종에게 과연 사랑이란 존재했을까 싶기도 해요.
조정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랑까지 정치 파워 게임으로 인식한 것 같아요.
장희빈의 영혼이 최무수리 손자에게 복수? 말이 되네요.ㅎㅎ
동이에서 똑똑하고 참한 여자로 묘사 되었지만(주인공은 ..ㅎㅎ 다 예쁘고 착함.)
의뭉스럽고 정말 정치적인 여자였다고 합니다.
숙종은 적장자로 태어나 그 권위부터 남달랐고 ---> 요기 동의하는데요.
자신의 강력한 권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때문에, 인현왕후에게도 폐서인 시킬 정도로
모질게,
장희빈에게도 모질게 했던 거라고. 원한을 가진 대왕대비로 남겨둬서 어린 왕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과하게 냉정한 결단을 내렸다고 분석하는 학자가 있더군요.
왕은 이쁜 여자보다 이쁜 권력을 사랑한다고.
본인요. 제왕의 교육과 든든했던 외가. 조선에서 보기드문 적통.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아버지인 현종의 유언처럼 누구도 믿지 않으려고 했었고,
왕권강화를 위해 사대부를 교체하면서 노력을 부단히 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