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게슈탈트가 고안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는 '빈 의자 요법'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빈 의자에 앉아있다고 가상하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가상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상대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처해있던 불가피했던 환경을 이해하게도 된다. 더불어 실제에서는 한번도 터놓고 얘기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 꺼내놓음으로 인해 그야말로 정신적인 자유를 맛볼 수 있기도 하다.
마흔에 들어서면서, 딸 아이들만 넷을 키우면서, 나에게 늘 마음의 짐처럼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의 화해였다. 여러가지 피치 못할 환경으로 인해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엄마와 내 곁을 떠나가셨던 아버지를 나는 사십 평생 동안 한번도 제대로 용서하거나 털어버리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준 사람과 직접 만나 화해를 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용서는 내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내게는 용서도 화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나는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는 줄도 모르고 다방에서 차 한 잔씩을 마주하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던 엄마와 아버지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두분의 대화가 다 끝나고 다방에서 나오자마자 아버지는 급히 볼일이 있으시다고 우리 모녀와 문앞에서 작별을 하셨다. 저녁에 일찍 집에 오라는 내 말에 빙긋이 웃으시며 엄마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시고는 황급히 반대쪽으로 걸어가셨다.
엄마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저만치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도 나처럼 혹시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버스가 올 때까지 내내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사라져가셨다. 그게 우리 부녀의 인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참 오랜 뒤에 알았는데 그때까지 나는 밤마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칭얼대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다시는 못 만나게 될 아이를 위해 한번도 뒤를 돌아다 보아주지 않았던 아버지...그로부터 30 여년이 지난 후 나는 늦가을의 허름한 강의실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내 앞에 놓여진 빈 의자에 아버지는 다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젊고 기운이 넘치던 환한 미소 속의 내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더 할말이 없고 이제는 나를 위해 목마를 태워줄 수도 없고 나를 업고 동네 한바퀴를 돌아줄 수도 없는 노인일 따름이었다.
한국말 반...영어 반...그렇게 아버지에게 내 설움을 쏟아내고, 내가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내가 한 질문에 답을 하고 하면서 그토록 미워하고 원망했던 아버지를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워했는지 미처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친구들이 아빠의 손을 붙잡고 나들이를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각종 졸업식 때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결혼식 때에도 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지 못하는 신부로서, 내 어린 시절을 온전히 기억해주는 아버지를 아이들에게 외할아버지로 보여주지 못하는 엄마로서 나는 늘 가슴에 멍이 들도록 아버지를 그리워 했던 것이다.
30년 동안 한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가슴아픈 단어 '아빠'를 입밖에 내는데 목이 메었다. 재혼하신 아버지께는 늘 아버지라고만 불렀지 한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질 않았다. 그 잊혀진 '아빠' 소리를 한국사람이라고는 한사람도 없는 강의실에서 부르니 내 순서가 끝나고 친구들이 물어왔다. '아빠'가 무슨 뜻이었냐고...
아빠를 잃어버리고 살아오면서 긴 세월 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내 아빠를 찾기 위해 갈등하며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늦깎이 공부로 심리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살아오면서 생겨난 나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제대로 파헤쳐보고 싶어서였다. 상담의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만나면서 아버지와의 문제로 갈등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얼굴은 웃고 있어도 내 마음은 눈물바다가 되어 있어야 했다.
올해로 결혼 생활이 16년째에 접어든다. 16년 동안 나는 남편을 누구로 대하고 있었을까. 나보다 두 살 많은, 함께 사십 줄에 접어들면서 삶에 지치고 가장이라는 무게에 눌려 힘겨운 한 남자에게 나는 어쩌면 아내가 되고 싶기 보다는 딸이 되려 애를 쓰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내 아버지를 남편에게서라도 느껴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도 모른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안기며 반기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그 아이들로부터 내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저렇게 뛰어가 안길 아빠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나이 사십에도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믈 물리고 아이들을 재우려고 채비를 하다가 막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은영이 누구 딸이야?"
"아빠 딸!"
두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에 나오는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은영이 엄마 딸 아니야?"
"아니야, 나 아빠 딸 할거야!"
인상까지 찌푸리며 자기는 아빠 딸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를 가슴에 대고 꼭 안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은영이는 아빠 딸이야. 아빠 딸이라니까!"
아이는 아버지가 키운다. 키워 줄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은 평생동안 누군가 그 아버지를 대신해줄 사람이 없는지 찾아 헤매이는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딸은 남편에게서 아버지를 찾으려 애를 쓰느라고 가장의 역할만으로도 버거운 남편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아버지가 없는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줄 선배와 상사들 사이를 헤매이며 다리품을 판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등 두드려 재워주는 엄마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자식은 혼자서는 키울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꽃밭에서 (39) 아빠를 찾아서|http://blog.naver.com/kmchoi84/90019462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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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찾아서
동경미 |
조회수 : 2,090 |
추천수 : 257
작성일 : 2009-09-16 22: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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