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념(竊念)
손 탈까 차마 만지지도 못하는 꽃눈을
쌓이지도 못하는 풋눈이 희롱하네 속절없어
속절없어 봄이 오고 개화한 목련은
그 풋눈 비슷한 색
손 탈까 차마 만지지도 못하는 꽃눈을
쌓이지도 못하는 풋눈이 희롱하네 속절없어
속절없어 봄이 오고 개화한 목련은
그 풋눈 비슷한 색
땅을 뒹굴어 갈색으로 변한 바람을 보며
하얗게 질린 꽃은
흙으로 돌아가면 잎으로 다시 날 것을 모른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또 자라 꽃을 피울 것을 모른다
떨어지는 것은 바람에만 맡겨야 한다
팔이 없어서
그만 놓아버리지도 못 한다
차라리 누군가의 손에 꺾여 가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은 바람이 된다.
꽃
용천사(湧泉寺)
대웅전 밑
허리께 오는 작은 둘확 두 개
하나에는 물이 차 있고
하나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물 위에는 연보라 빛
부레옥잠 꽃 한 송이 피었다
나는 빈 돌확 안에 들어가
찬 바람을 견디다가
피는 꽃이고 싶다
매화
꽃잎을 보며 너의 손톱 같다며 웃는 그대는 이제 없다
지하도
달의 어두운 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쓰고 싶다
잠들어, 내 영혼은 집에서 빠져나와 담티역 지하도를 건너 구치소 어디쯤을 헤메고 있다
거기서 누군가를 찾는지 몰라, 그도 내 꿈을 꾸고 있을까 몰라
토끼 같은 눈을 감고, 자고 있다
벼꽃
시발!
농부들 욕 들어쳐먹어가며 피워놨더니
나랑 똑같은 유전자 가진 게 몇 억 개
시한부 인생,
무덤 밭에 구슬붕이는 술이라도 쳐먹지!
농약을 들이키며
조금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광기에서 멀어져가
만짐
새벽에 자꾸 깨는데 어찌하면 좋겠냐는 나의 말에
정신과 의사는 나가서 좀 걸으라고
새벽 다섯시에요?
그래
나는 해도 안 뜬 시각, 나가서
그날 처음 한 알 먹었던 섬망을 찾아 헤메다닌다
어제 저녁먹고 나서 먹었던 약 기운이 가시고
내 광기의 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질 무렵
나는 신천 위 다리 한가운데 쯤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
내 폰이 6시 반 알람을 울린다
이승열의 Why We Fail
대구은행역에서 경북대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잘 못하는 화장이나마 하고 그날 입을 옷을 찬찬히 고르기 위해 나는 6시 반에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차가 쌩쌩 지나다녀 알람 소리는 잘 안들리고,
나는 폰을 귀에 가까이 대고, 내 일상이 걸었던 음성 메세지를 듣는 것처럼, 알람을 듣는다
아침에 잘 못 일어나서, 사칙 연산을 해야 꺼지는 알람을 스마트폰에 설치했다던, 휴학하고 약대 입학 시험을 준비하던 과 동기
그리고 너의 알람은 무엇이냐는 말에, 이승열의 Why We Fail 이라고,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어서 좋다고, 농짓거리 하던 날이
나는 내가 지나온 다리, 차갑고 검고 음각된 다리 이름을 확인한 뒤에,
얼른 폰으로 이 시를 입력한다,
희망교
쇠창살
너는 나를 볼 수 있고
나는 너를 볼 수 있다
네가 안에 갇힌 건지
내가 안에 갇힌 건지
공간의 분리는
곧 완전한 분리로 이어질까
문이 따지고 네가 내 쪽으로 오면
우리 둘 다 갇히게 되는 걸까
둘 다 자유가 되는 걸까
애초에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감옥은 평화고 밖이 전쟁터이므로
너와 나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죄수이거나 간수인 채로
영원히 겹쳐질 수 없을까
네가 늑대 인간으로 변신해 쇠창살을 뜯어내는 상상을 한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성을 잃은 너에게 곧 물려 죽고 말 것이다
애초에 너와 내가 존재하기도 전에도 쇠창살은 있었고
삶은 로맨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쇠창살 너머로 너를 본다
마주 보는 눈빛만으로는 불충분하냐고
신천
그래도 오늘도 살았다
신천은 빠져 죽기에는 너무 얕아서.
실험
캄캄한 밤 자다 일어나내가 아닌 이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컴퓨터를 끄지 않고 누워있었다 불도 켜지 않고 모니터도 끈다 어둠 속에 앉아 타이핑한 이 글을 보려면 그대에겐 빛이 반드시 필요하다 글을 쓰는 데에는 빛이 필요없지만 읽는 데에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아니면 점자 프린터와 예민하고 훈련된 손끝이나 이제 방 안의 사물들의 윤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니터는 완전한 암흑이고 검은 키보드의 글자판 또한 여전히 암흑이다 그대가 이 글을 읽지 않는다면 이 글 또한 영원히 암흑 속에 있을 것이다 빛이 어둠을 밝히나 어둠은 빛을 끌 수 없다 당연한 진실이다 나는 어둠에서 뭔가를 길어올려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빛, 여백의 하얀 빛에 ㅁ무언가를 전해주고 싶다그러나 이 것은 실험일 뿐이다 애초에 빛이 없었다면 글을 배우지도 타자 치는 법도 몰랐을 테니까 어둠은 왜 빛을 끄지 못하냐고, 투정
다시 봄이 온다면...
매화가 져버려서 다행이다
매화를 닮은 향기가 나던 그대가
더이상 생각나지 않아서
다시는 매화가 피지 않길
그대 향기를 잊어버릴 수 있게
목련도 져버려서 다행이다
목련 같은 웃음을 짓는 그대가
더이상 떠오르지 않아서
내년에 다시 목련이 피어도
그땐 목련을 봐도 그대가 생각나지 않으리
벚꽃도 져버려서 다행이다
벚꽃처럼 떨어지던 그대 눈물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 거짓말, 벚꽃이 설령 다시는 피지 않는다 해도
그대의 울음은 잊혀지지 않으리
동백도 져버려서 다행이다
동백처럼 시뻘건 피를 흘리다 죽어버려라
동백은 내년에 다시 피겠지만
그대는 돌아오지 않으리
애초에 그대가 나를 저버린 건
꽃이 져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네
마지막 시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나는 게 아니고
펜으로 쓴 꽃과 바깥의 진짜 꽃 사이의 거리는 무한대인데
왜 시를 쓰는가
나의 펜, 그대가 읽는 문자 사이의 무한대의 거리
그로 인한 오해와 곡해에 비하면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이 얼마나 가까운가
펜을 놓고 그저 그대를 품에 안는 게 낫다
문예창작과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있다고 하네요.
'시 100편을 쓰기 전에 등단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 후에도 등단하지 못한다'
전 습작 시작한지 1년 동안 30편 정도 썼고, 그 중 몇편을 올려봅니다.
어떤가요?
반응이 좋다면 몇 편 더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