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경기도 모 지역 군수의 셋째딸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점찍어둔 젊은이에게 열아홉에 시집을 오셨지요.
젊은이는 당시 최고학부 나온 똑똑한 철도청 직원이었지만, 가난하고 수완없고 대쪽같은 사람이었답니다.
할머니의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그 젊은이는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리지는 못했지요.
..........
세상의 동화와 드라마는 그렇게 귀결되죠.
"젊고 예쁜 부자집 공주님이 가난한 젊은이와 결혼하여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저희 사랑하는 할머니.
넉넉하지 못하셨지만 소박하지 않으셨다!
평생 부잣집 셋째딸의 엣지를 간직하고 사셨다!
이게 오늘의 주제입니다. ㅋㅋㅋ
어렸을 때 저는 그런 할머니가 좋았어요.
할머니가 시장이라도 가실라치면 옥색 저고리에 빳빳한 치마자락 촤악 끌어올려
우아하게 한 손에 말아 쥐시고, 한 손엔 제 손을 잡고 나서시죠.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레드카펫을 밟는 기분이었어요.
상인들은 모두 어머, 어쩜! 하는 표정으로 할머니에게 칭찬을 늘어놓고,
업되신 할머니는 어린 제가 보기에 여왕님처럼, 이거, 이거, 이거 배달해놔요. 라고 하셨죠.
아주 좋은 생선! 좋은 고기! 비싼 과일! 이런 걸로 골라서요.
30대 중반인 제가 갓 태어났을 때에도 딸은 옷을 딱 맞게 이쁘게 입혀야한다며
한 치수도 큰 걸로 못사게 하셨대요, 그것도 다 백화점 옷으로만.
(그 때가 저의 패션 전성기-_-;;)
어린 저는 할머니의 꾸밈, 카리스마, 이런게 좋았지만
엄마는 고생 많이 하셨다고 가끔 말씀하세요.
심지어는 할머니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와병 중에 연어가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사다드렸더니,
이건 국내산이 아니야. 하면서 안드셨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니까요.
이쯤되면 이건 그릇 이벤트니까 할머니의 엣지있는 그릇 시리즈가 좔좔 나와야겠죠?
.....그런데 없어요.
입을 거리, 장신구, 먹거리, 인테리어 그 모든 것을 최고 좋은 것!으로 외치시던 할머니는
그릇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다만 제가 할머니를 추억하는 통로 하나가 바로 이거라서요..
두둥! 20세기 초 19살 부잣집 셋째딸의 방짜 유기 혼수 세트!
할머니는 적어도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에는, 닦기 힘들고 유행에 뒤쳐지는 이 유기를 안쓰셨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90세가 넘으셨을 때 노상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집안의 유일한 딸이었던 제가 결혼하면 이 유기를 주겠노라고.
그때도 할아버지의 말씀으로만 알았지, 실물을 본적도, 보려고 한 적도 없었지요.
제가 결혼할 땐 할아버지도 거의 100세에 가까우셔서 거동이 불편하셨고 모두 저 그릇의 존재를 잊고 있었어요.
이 그릇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가 만삭에 가까워졌을 때 제게 왔어요.
할머니의 쌍가락지와 함께요.
두 분의 유품을 정리하시던 고모가 제게 보내주셨지요.
비닐봉지에 둘둘 말려있었어요.
80년이 좀 넘었나봐요. 오래 안쓰셨으니 녹도 많이 슬었고, 잃어버린 것도 많아서 짝도 안맞아요.
밥공기는 대접만 하고, 반찬 그릇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소주잔만한지요.
저는 이걸 보고 많이 눈물이 났어요.
저 많이 예뻐해주셨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싶어서요.
소녀같던 할머니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간게 느껴져서요. 반짝반짝 빛났을 할머니의 열아홉이 떠올라서요.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 어딘가 묻혀있던 이 그릇을, 보물처럼 여기고 잊지 않고 있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생각나서요.
태교로 하루에 하나씩 그릇들을 닦기 시작했어요.
사진 속에 반짝거리는 그릇은 제가 닦은 그릇이에요.
그리고는 아기가 태어났지요.
아기가 백일되던 날, 이 그릇에 떡을 담아 백일상을 차려주었어요.
물론 용도에 맞는 그릇이 없어서, 밥공기에 떡 담고, 반찬 그릇에 꽃 담고,
할머니가 보셨으면 엣지 없다 화내셨을 백일상이지만요...
리허설 중이에요, 수수팥떡 담는데 밥그릇이 나을까, 국그릇이 나을까 이러고 있어요. ㅎㅎ
할머니의 시간은 이렇게 흘렀어요.
손녀의 아들이 이렇게 근사한 그릇으로 백일상을 맞고, 벌써 두 돌이 지났네요.
할머니랑 저랑 그리고 얘랑 무척 닮았어요. 쌍꺼풀 없고 코 낮아요.
그리고 이 녀석은 워낙 늦되어서 말을 아직 제대로 못하는데요,
꼭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이렇게 말해요.
"앳지!"
ㅋㅋㅋㅋㅋ 지가 '아기'라는 말인데, 발음을 잘 못해서 앳쥐라고 발음되네요.
할머니, 사랑해요, 보고싶어요, 이 그릇 제 며느리한테 물려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