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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의 미학

역기사 조회수 : 377
작성일 : 2010-11-29 13:57:33
비움과 채움의 미학


한해를 접고 또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다짐과 약속을 한다. 마음의 창고 속에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던 생각과 감정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은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도 이맘 때의 일이다. 이렇게 비우고 정리하는 가운데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을 다시금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의 창고를 정리할 때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잡다한 욕심, 미움과 시기, 편견과 아집, 편안함의 갈구와 게으름.... 결코 좋아보이지 않는 감정의 흔적들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내 속의 나"를 비우고 또 비우는 일을 얼마나 되풀이해야 부처님처럼 온화한 미소를 띄우게 될지 보통사람인 나로서는 아득한 일로만 여겨지지만, 모자라고 어설픈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탐욕과 미움과 불의함을 끊임없이 비워 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져본다.


한편으로 이맘 때면 내 마음의 창고 속에 채워야 할 아름다운 가치들을 떠올리게 된다. 비판과 질책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고 더 나은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겸허함과, 적절치 못한 성화에도 차분하게 대처할 줄 아는 온유함과, 많은 국민들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꿈과 사랑을 고스란히 나의 것으로 여기며 하나 둘씩 현실로 만들어가는 신실함과 눈앞의 이익이나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높은 이상을 바라볼 줄 아는 담대함과,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사랑을 곱게 다듬어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로 내 마음의 창고를 채워가고 싶다. 그리고 막걸리 한 사발에 흥이 겨워 누구이든 어깨동무하고 흘러간 옛노래를 흥얼거릴 줄 아는 "서민적"이 아니라 "서민자체"의 소탈한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


참으로 묘한 것은 소중한 가치들은 채우면 채울 수록 더 큰 여유를 우리에게 준다는 사실이다. 미움을 비두다 보면 어느새 마음 속에 사랑이 가득하다. 불의한 마음을 비우다 보면 펑안이 물밀듯 밀려든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한 가운데 터져나오는 성냄을 비우다 보면 자연스레 긍휼의 마음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심도 끊임없는 번뇌의 과정 속에 비우고 또 비우면서 마침내 자기를 얻는 순간 자기마저 버림으로써 솟아난 희열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마음을 다스려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앙굴마라 이야기를 떠올린다. 아시다시피 앙굴마라央堀滅는 무자비한 살생을 자행하던 폭한이었다가 후에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를 악행을 참회하기 위해서 고행길에 나섰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그를 가만 둘리 만무했다. 어느 날 처참히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앙굴마라는 부처님을 찾아가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저를 해치려고 칼을 휘두르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웃으면서 그에게 화답하였다. "훌륭하다. 앙굴마라야. 그렇지만 너를 죽이려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그 사람에게 '당신이 바로 부처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미움을 비우고 사랑을 채우는데 있어서 앙굴마라와 비교하기도 부끄럽다. 참선을 거듭하여 목숨에의 집착을 비우지 않는 이상 나를 해치려는 자를 미워하지 않음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화살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 느림의 여유를 가지고 금년 한 해도 비움으로써 채워가고, 채워감으로써 비워가는 자비의 변증법을 체험해 가려고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부처님의 미소를 닮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금년 한 해 우리 사회는 또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워가야 할까? 나라 살림이 어렵다 보니 "묵은 빚들은 다 비워주고, 많은 돈으로 채워 달라"는 대답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세속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으랴. 이 문제에 관한한 나는 우리 국민들이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고, 자신감이란 에너지로 마음의 창고를 채워가길 바란다.


어릴 적 우리 마을에는 제방이 하나 있었다. 그리 튼튼히 지어진 것이 아니어서 큰 비가 오면 늘 제방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을 해야 했다. 걱정하는 마음이야 하나인데 대응하는 모습은 어찌 그리 딴판일까. 홍수경보가 나면 마을사람들은 제방을 보수하러 달려가는 쪽과 짐을 싸서 도망치는 쪽으로 나뉘어졌다. 도망치는 사람이 많을수록 제방이 무너질 확률은 그만큼 높아지게 마련이다. 비가 그치고 어설픈 제방이 홍수에 무게를 용케도 버티어 내면 도망친 사람은 욕을 먹고, 물집이 지도록 열내어 삽질을 한 사람은 영웅대접을 받았다.


나는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우리 국민들이 제방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다. 눈앞에 닥친 상황이 두려워 피하려고만 한다면 위기 아닌 상황도 위기로 돌변하게 된다. 우리 국민들의 역량에 대해 나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기성세대는 1960년 87달러에 불과하던 1인단 GNP를 지난해 8,681달러까지 끌어올린 주역들이다. 서구에서 2~3백년 걸려 해낸 일을 불과 40년만에 이룩한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의 실력인 것이다. 신세대 역시 도전정신이 투철하고 의식도 건강하며, 특히 첨단분야에서의 능력이 탁월한 편이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젊은이들이다. 여기에 우리는 수차례의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경험만큼 큰 자산은 없다. 결국 문제는 자신감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의 역량에 대해 믿음을 갖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할 때 위기는 이미 기회다. 그러나 불안을 과장하고 증폭시켜 스스로 자신감과 희망을 내팽개친다면 우리 사회는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자 도망치려는 마음을 비우자. 그리고 그 공간을 자신감으로 채우자. 그러면 경제회복도 덤으로 따라와서 나라의 금고가 두둑해지리라 믿는다.


한편으로 나는 금년 한 해가 국민들이 서로 믿고 화합하는 "어울림 원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치판부터 시작하여 생활의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푸근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소망한다. 이를 위한 비움과 채움의 미학은 분명하다. 불신과 적대의 감정, 특히 지역주의를 비워갈수록 사랑과 관용의 마음은 가득하게 될 것이고, 마음의 창고를 관용으로 채우면 채울수록 불신과 적대의 감정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지역주의는 민주적 역량을 인정받는 우리 국민이 아직도 떨쳐 버리지 못한 멍에 중의 하나이다. 그동안의 정치과정 속에서 경험한 대로 지역주의는 모든 정치적 판단기준을 무력화시켜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한편,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또다른 대립과 갈등의 전선을 양산해 내고 있다는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불신과 적대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투쟁의 역사 속에 우리의 의식 한켠을 차지해 버린 이 감정들은 우리가 안고 있는 정치사회적 갈등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경제적으로 힘든 추위야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능히 견뎌낼 수 있지만, 불신 속에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는 세상은 경제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버텨내기 힘든 것이다.


비싼 대가를 치루고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이제는 관용의 문화를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 할 것이다. "관용"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의 의견도 정당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대화와 타협으로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려는 상대주의적 자세이다.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이나 한국불교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원융희통의 정신도 모두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원효스님의 말씀과 같이 어떠한 대립적 주장들도 일심一心의 경지에서 보면 결국 평등하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수많은 쟁론들이 얼마나 하찮은 아집에 얽매여 있는지를 알게된다.


신사년 올 한 해는 정치인부터 모든 국민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날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경제위기에 대한 두려움과 이기적 대응, 그리고 지역주의를 비롯한 불신과 적대의 감정을 모두 비우고, 그 빈자리를 자신감과 관용의 문화로 차곡차곡 채워갔으면 싶다. 마음의 창고를 비우기가 쉽지 않으면 절에 가서 기도를 하자. "절"은 '절을 많이 하라'고 "절"이라고 한다지 않던가. 비우고 또 채우기 위해서 올해는 나도 자주 절에 올라가야겠다.


-----------------------------------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 (월간 海印 2001년 1월호)
IP : 218.239.xxx.127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0.11.29 2:06 PM (121.144.xxx.172)

    가슴 따뜻하고 인품이 서려있는 좋은 글.....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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