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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채점 후기 (추억은 방울방울)

깍뚜기 조회수 : 1,898
작성일 : 2010-11-18 18:44:13
(ㅠㅠㅠㅠㅠㅠ 제목을 잘못 달았어요.
학력고사 채점 후기....라고 할 걸 그랬나봐요 ㅋㅋㅋ)


아... 82에도 자녀들 수능 치룬 분들의 이야기가 속속 올라오네요.
아이들 만큼이나 부모님들은 얼마나 떨리셨을까,
몇 주 전부터 수능 도시락통과 식단으로 고민하셨는데,
(국을 싸줘야 하냐, 물이면 되나, 반찬통 하나 짜리인데 새로 사야하나
  고기 먹으면 진짜 졸리나? 등)
아이들이 속 편하게 도시락 잘 먹었는지 궁금하고요.

고3을 지나고 나니 매년 돌아오는 수능날이 언제인가 별 관심도 없이 살았던
망나니같았던 대딩 시절도 있었지만,
갈수록 이 날 만큼은 짠한 기분이 드네요.
오늘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와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부모님들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생각하면 저도 덩달아 맘이 짠해지고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 그 시절로 가봅니다.
제 때는 유난히 시험이 어려웠습니다.
라고는 하지만! 자기가 본 시험은 늘 어려운 거 아니겠습니까만은...
이건 뭐 시험보고 점수 나오고 정말 난리 부르스가 났거든요.
이과에서 문과로 갈아탄 재수생이 대박났을 정도로 수학과 과학은 ㅎㄷㄷ
진짜 어려웠단 말씀. 흐흐

시험 전날,
18년 평생 불면증이라고는 모르던 둔한 저도
긴장을 했는지 잠이 안 오더군요. 10시인가 일찍 누웠는데 말똥말똥
태어나서 처음으로 천장을 뚫어지게 보며 양을 세어 보았어요...
가족들 모두 저 신경쓴다고 조용조용.
양이 1789 마리 정도로 늘어났을 때인가... 이제사 스르르 잠이 들 것도 같은 그 때!

갑자기 동생이 방문을 벌컥 열더니
"언니! 지금 테레비에 언니네 학교 나왔어!"
컥.
잠이 번쩍 깨더군요.
동생은 엄마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실컷 울더니 저보다 먼저 잠들더군요.
왜 흠씬 울고나면 피곤하고 나른한 게 잠이 잘 오잖아요. 이 냔이!!!
그리고 한 두 시간을 불면증으로 헤매이다 급기야는 포도주 한 두잔을 마시고
벽에 머리를 박으며 겨우 몇 시간 잔 거 같네요.

다음 날 아침,
걱정스런 아빠가 시험장으로 데려다 주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머랄까. 가오도 빠지고, 또 집 근처에서 학교 버스를 타면 되었기에
거절했어요. 근데 돌이켜보면 그냥 좋게 말하면 되는 걸 엄청 짜증부리면서 뭐라 했던 듯.
쯧쯧. 복에 겨워서.

암튼 어젯밤의 와인 기운 때문인지 1교시 듣기평가는 대강 놓치고 2교시 정도 되니가 잠이 좀 깨대요.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수학에서 정신줄을 놓고 물리에서 떡실신이 된 후 그냥 정신은 안드로메다.
이러려고 내가 그 비루한 고교 생활을 했던가. 이 따위 시험을 이 따위로 볼려고!
내 청춘 (당시 기준) 이 허무하고, 이런 나도 한심하고...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혼자서 터덕터덕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엄마는 어색하게
"시험은...잘..아니...그러니까 춥지 않았어?"

(참고로 엄마는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시험날 입으라고 가디건을 사주셨어요. 무슨 미신 같은건가.
정확히 기억나는 게 하늘색 두터운 니트 가디건이었음. 브랜드도 기억나요. 베네통.
헌트나 브렌타노만 사주던 엄마가 왠일로. ㅋㅋ그런데 그 옷 시험날 하루 입고 팽개쳤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반품하고 오신 모냥. 완전 진상 엄마네요. 하루 입었는데 ㅋㅋ)

저녁은 먹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결과는 궁금했는지 마루에 상을 펴놓고 앉아서
이비에스에서 해주는 해설 프로를 봅니다. 저는 늘 모의고사 보면 자기가 마크한
답 일일이 다 적는 애들이 신기했거든요. 당췌 그럴 시간이 있나요? 암튼 그 때도 대강 푼 기억에
의존해서 답을 맞추었지요. 빈 종이에 영역별로 번호를 쓰고 동그라미나 엑스표...
영역이 진행될수록 종이엔 시뻘건 비가 내리고, 멈출 수도 없이 눈물은 점점 하염없이.
수학은 반타작도 안 되고, 물리는 하나 맞고. (하나 틀린 게 아니라요!)
어제 엄마한테 욕 쳐들은 여동생은 거실 구석에서 빼꼼히 절 쳐다보고...
어제 그 짓을 한 뒤 동생이 매우 쫄아서 하루 종일 언니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더군요. ㅎ

결국 채점을 마치고 저는 마치 곰장사가 쓸개를 빼내려고 내 목을 따기 바로 그 직전의
한 마리 곰처럼 포효하며 방에 쓰러져 펑펑 울었어요. 정말 서럽게. 집이 떠나가라.
안 되겠더군요. 냉장고에 있던 오비 맥주를 한 병 비우고 좀 더 울고 난 뒤 어찌어찌 잠이 들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다음 날 오전, 바로 다음 날은 분명 학교를 안 갔어요.
중, 고등학교 동창인 동네 친구와 노래방을 갔습니다.
오전부터 여는 데가 하나 있었거든요.
두 마리의 미친 여고생들이 지난 3년의 고충을 날려버리듯
우리가 할 수 있는 악다구니는 다 쓰며 길길이 날 뛰었죠.
그러기를 2-3시간인가.
어둡고 퀴퀴한 노래방을 나오니 햇살이 어찌나 짱~하고 눈부시던지.

그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희비가 교차하며
일군의 눈물바다, 일군의 표정관리녀, 오지랖녀들의 잘난척, 저처럼 조용히 짜져있던 애들;;
풍경은 아롱다롱.

그렇게 미칠 것 같았던 그 날의 고통을
이제는 아스라한 추억 정도로 말할 수 있게 되었네요.
대학진학이 전부였던 고등 생활에서 한 발짝 나오게 되니
대학시절부터 어찌나 새로운 고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던지.


수다가 길어졌네요;;;

암튼 오늘을 위해 고생한 학생들, 그 이상으로 맘 졸이고 기원하고 또 기원했던 부모님들.
정말 애쓰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시절 제가 그랬던 것처럼 애통해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럴 때 써먹는거죠!)
최선을 다한 너는 정말 대단했다' 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끝까지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IP : 122.46.xxx.130
1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10.11.18 6:51 PM (118.36.xxx.150)

    혹시...ㅇㅇㄷ 여고 나오셨나요?
    수능 아침이면...기자들이 그 학교 앞에서 하길래...ㅎㅎ

    저도 ebs수능해설방송 예약해놨어요.

  • 2. 깍뚜기
    '10.11.18 6:55 PM (122.46.xxx.130)

    ㅇㅇㄷ여고 아닌디요 ㅋ
    수능 전날 뉴스인가에 나왔다는데
    그냥 관련 뉴스를 보내면서 가지고 있던 화면을 내보낸 게 아닐까 싶어요 ㅎㅎㅎ

  • 3. ..
    '10.11.18 6:57 PM (61.79.xxx.62)

    깍두기님 수능 후기 말씀하시니 저도 아픈 추억 떠오르네요.
    저는 학력고사시댄데..전 항상 시험치면 성적이 변동이 잘 없어요.
    시험이 어려웠다 쉬웠다를 반복하잖아요.
    근데 전 영향을 별 안 받고 항상 성적이 비슷해서..
    애들 시험 못치면 전 엄청 잘 치는 거고 애들이 잘 치면 전 하락 그랬죠.
    그래서 학력고사도 운명에 맡겼는데..
    오 마이 갓! 그해 가장 문제가 쉽게 나온 해였어요!!
    아이들의 잘 쳤다는 환희! 저의 절망!!
    그래서 최상위를 못 갔어요.한단계 밑으로..너무속상해요,지금까지..
    제 이야기였지만, 수능 이 시험이란것도 운이 참 크게 작용하거든요.
    만약 뜻대로 안됐더라도 또 다른 방법이 있을거에요.
    저도..모르겠지만..그리 나쁘진 않았어요..다 잘 되리라 믿어요.

  • 4.
    '10.11.18 7:01 PM (222.117.xxx.34)

    깍두기님 수능세대세요?
    저는 내공이 있으신지라 학력고사 세대인줄 알았더만...

  • 5.
    '10.11.18 7:01 PM (118.36.xxx.150)

    저도 수능1세대인데...
    수능에 적응 못해서...시험 죽 쑤고
    재수했습니다.
    개인적으론 학력고사가 훨씬 낫다고 봅니다만...
    다시 돌아가긴 어렵겠지요.

    치열하게 공부하던 그 때가 생각나네요.

  • 6.
    '10.11.18 7:02 PM (222.117.xxx.34)

    저는 최악의 97학번..인데요..
    그때 수능이 무지어려워서 반에 20명이상은 막 다 울었던것 같네요..저두 마찬가지고 ㅎㅎ
    집에다가는 재수한다고 해놓고 학교다니다가 노는게 너무 좋아서 그냥 졸업까지했는데
    재밌었어요..ㅎㅎ

  • 7.
    '10.11.18 7:04 PM (219.78.xxx.42)

    원글님도 97학번 아니세요? ㅋ
    96년도 수능이 수학경진대회로 유명했죠.
    저도 97이에용 ㅋ

  • 8. ㅇㅇ
    '10.11.18 7:08 PM (114.206.xxx.216)

    저도 97입니다. 전설의 수능이라 불리우죠 ㅋㅋㅋ
    다른애들 점수 다 떨어질때 저혼자 평소 점수 유지해서 대박쳤었다는;;

  • 9.
    '10.11.18 8:11 PM (124.56.xxx.13)

    깍두기님 너무 좋다능!( 이런 글 덧글애 팬 고백이라니;;;;)
    저도 학력고사쯤으로 추측하고 있었는데 ㅋㅋㅋ

    베네통은 베네통 리펀드로 브랜드를 바꿔야겠군요 ㅋㅋㅋㅋㅋ

    포효하는 곰에서 완전 쓰러졌어요!

  • 10. ****
    '10.11.18 9:18 PM (116.121.xxx.179)

    저는 왜 깍뚜기님이 저보다 윗연배일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전 89학번 학력고사세대인데요...ㅎㅎ

  • 11. 어머,
    '10.11.18 9:23 PM (203.130.xxx.123)

    저도 깍두기님 티안나게 좋아하는 1인인데,,
    (깍두기님의 '인스턴트커피의 측면공격적인..' 그 글부터 좋아했다죠 ㅎㅎㅎ)
    저랑 같은 나이일꺼라고 철썩같이 믿은거있죠.. 전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에요.

  • 12.
    '10.11.18 9:48 PM (59.10.xxx.208)

    전 99학번인데,
    97학번들 수능은 정말... 기출문제 풀어보면 토나오게 어려웠었어요.
    특히 수학에서 어떤 문제는 정답률이 0.013%였다죠 아마.
    300점 넘으면 연고대 간다던 그 전설..ㅋㅋㅋ
    저희 땐 뭐 내세울건 없고~
    날씨가 오지게 추웠군요. 영하 8도...!!!
    오늘 아침에 나오면서, 요즘 애들은 날씨 좋은날 수능 보는구나~ 이 생각 했어요.ㅋㅋㅋ

  • 13. 깍뚜기
    '10.11.19 1:49 AM (122.46.xxx.130)

    흑. 제가 그렇게 연배가 있어 보였나요오...? ㅠㅠ

  • 14. 어머
    '10.11.19 2:27 PM (211.244.xxx.100)

    여자분이셨어요?
    전여태 남자분 인줄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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