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고 봐도 좋겠지요.
오전 11시에 집에서 나가서 7시 반에 귀가했으니까요.
18개월짜리 딸과 다니러 오신 60대 중반의 친정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필요한 물건이 있어 사러 나갔다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즉흥적으로 예전에 인상깊었던 저수지가 생각이 나서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너무나 멋드러진 고택의 한정식집
몸이 안좋아서 우울해하시던 친정엄마의 기분도 풀어드릴 겸
눈만 뜨면 나가자고 보채는 아기의 바람도 충족시킬 겸 해서
경기도 외곽으로 차를 몰았어요.
가는 도중에 몇년 전 지인이 데리고 간 사찰음식 식당이 보이더라구요.
배도 고파서 그럼 여기서 점심을 먹자는 생각에
주차를 하고 보니 내부 수리 중이라
다시 목적지로 향했지요.
곧 멋진 고택과 또 그 식당이름이 한자로 쓰여있는데
글씨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차에서 내리자 마자 고택의 앞마당의 정취가 어린 아기에도 느껴졌는지
기분좋은 흥분으로 두다리가 폴딱폴딱 웃음이 가득한 아기를 데리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어요.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인트로
한정식 2인분을 주문하자 마자
왠지 불안한 기운
1시반이었는데
손님은 only us!!!!
10여 분 쯤 지나서 1차 반찬들이 쭉 깔렸어요.
그릇들이 사기그릇과 사기그릇 색깔의 플라스틱이 섞여서 나오더라구요.
열무 물김치도 있고 고기경단, 잡채, 양배추 샐러드 등등 나왔는데
처음 먹어 본 고기경단!!!! 고기 냄새가 배고픈 저의 내장을 심각하게 공격
잡채는 어제 먹다 남은 것 같고
정체모를 냉동 음식. 뭐냐고 물어봤더니 참치라고 하네요.
하얀색 고체 주변에는 냉동실에 오래 방치된 듯한 불규칙한 아이스 플레이크들의 잔뜩
더덕무침은 간장이 너무 들어갔고
열무 물김치는 정말 안습이었어요.
엄마는 결국 양배추만 계속 드시고
2차 반찬이 나오기 전에 급히 종업원을 불렀는데
잠시 후에 2차 반찬 쟁반을 들고 나타나셨지요.
정중하게 말씀 드렸지요.
날씨 좋은 날 나와서 웬만하면 입에 맞는 반찬하나에 밥 먹겠는데
정말 너무 심하다. 고기냄새에 유통기한을 알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자태의 참치에
불러터질 대로 터진 당면에 간은 하나도 안 되어있고
물김치도 정말 먹을 수가 없다.
그 때 서빙하신 분이 종업원이었는 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종업원이예요. 어떻게 해 드릴까요?
결국 일인분 가격만 내고 나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그냥 나왔어요.
1인분에 이만원이었는데 고택의 아름다운 정취의 가격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알고 보니 저희가 오늘의 첫손님이었다고 하네요.
차를 빼는데 한 차가 들어옵니다.
엄마가 그러시네요.
저 사람들 큰일났다.
종업원에게 계산을 하면서 너무나 미안하다면서 주방장이 그만두셨냐고 하니
주인이 주방장이라고 하는데 정말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정말 아쉽더라구요.
배가 고픈 우리는 비상으로 가져온 바나나를 나눠먹고 저수지 주변을 한참을 걷다가
출발하기 전에 검색으로 봐 둔 근처 사찰 주변에 위치한 보리밥 집으로 향했어요.
직접 메주를 쑤고 티브이에도 나오고 희망적인 정보가 많은 곳이었지요.
네비로 찾아서 그 집 앞 좁은 도로에서 차량 몇 대가 나오길래
역시 이 집은 괜찮은 가 보다 하고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이다 생각하고 든든하게 먹어야 겠다라고 황량한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우리를 맞이한 멋진 청년?
세수는 한 삼만년동안 안한 것 같고
머리는 파마인지 곱슬인지 자다 일어나서 털뭉치 같고
검은 색 나시에 반바지
그리고 팔에 곱게 새겨진 문신~~~~~~~~
이건 또 뭥미?
아기에 대한 배려로 방으로 안내를 해주고서는 사라진 그.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주방 뒤에 할머니 두분이 나물이 다듬고 계시길래
보리밥 2인분을 부탁드렸지요.
카운터에 얘기하라고 해서 카운터에 가니
아무도 없음.
주방을 찾아내서 주문을 하고
20여분 지나서 음식이 나오고
젓가락을 몇 번 하시던 엄마가
그냥 비비자!
열심히 비볐습니다.
밭에서 바로 딴 듯한 연한 고추는 맛이 있었지요.
파리 한 열마리 정도 근처에서 알짱거리면서 반찬그릇 숟가락 등등에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주차하면서 깜짝 놀랐다는 제 말에 엄마와 저는 참았던 웃음보가 터져서
정말 몇백년만에 숨이 끊어질 것 처럼 웃었어요.
사실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 좀 놀랍기도 한 정도의 음식이었지만
조미료 안쓰고 평범한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먹을 만한 그런 음식이었는데
이 집 음식이 뭔가 매력 빵점이었다고 할까요.
거의 다 남겼죠.
청년을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길래
테이블에 현금을 놔두고 저희는 출발
갑자기 누가 차 문을 마구 마구 두드립니다.
왜 계산 안 하고 그냥 가냐고?
졸지에 어린아기까지 낀 모녀 사기단이 될 뻔 했네요.
오는 길에 맥드라이브가 보이길래 너겟 4개짜리 먹으면서 왔어요.
그리고 차 안에서는 엄청 웃었죠.
오늘 부로 블로거 글들은 정말 안 믿어야 하겠다 싶어요.
야외로 나갈 땐 좀 힘들지만 도시락 싸서 다니고
먹는 즐거움이 슬픔이 될 뻔한 날이었는데
좋은 날씨가 털실 머리 청년 때문에
웃음바이러스가 마구 침투한 그런 날이기도 했어요.
두고 두고 오늘을 얘기하게 될 것 같아요.
자랑인지 한탄인지 모를 그런 글이네요.
가을 볕 좋은 공기 마시니 역시 마음이 넓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모두들 멋진 가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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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짧은 여행과 슬픈 맛집들
맛집해프닝 조회수 : 544
작성일 : 2010-10-18 22:25:11
IP : 110.14.xxx.170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
'10.10.18 10:44 PM (59.19.xxx.110)ㅋㅋ 이런 날 집밥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요.
저도 이제 맛집은 절대로 인터넷 참고하지 않아요.
진짜 맛집은 남여노소 누구나 특식이 아닌 일상처럼 찾아 먹는 곳이더라구요.
글이 너무 재미있어요. 다음에도 재미난 일 있으면 글 써주세요~2. ㅎㅎ
'10.10.19 4:12 PM (58.120.xxx.252)수필같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빵 터져 웃으셨다니 나들이 잘 하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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