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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도 전에 끝나가는, 나의 연인.

안녕 조회수 : 1,215
작성일 : 2009-12-07 02:46:57


어제는 너의 집에 갔었다.


문을 열어 주는 너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나는,
네가 조금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랬는데.
헬로우, 말을 건네는 목소리도 낯설게 갈라졌다.

오늘 어땠어? 물어보는 네게, 나는 언제나처럼 뭐, 좋았어, 라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너는 많이 아파 보였고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만 괜찮은 날을 보낸 것이면 미안해 해야 할 것 같았다.
응, 뭐, 좋았어, 결국 그렇게 얼버무리긴 했지만
너 진짜 많이 아파? 괜찮다며.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아,
이런 말들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바람이 많이 불었고 너는 내가 들고 간 무거운 가방을 받아 주었으며
나는 네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바람에 마구 흐트러지는 긴 머리를 수습하며 들어섰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너의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았고
그것은 잔인한 장면이 꽤 나오는 영화였으므로 나는 가끔 쿠션을 껴안고 경직되곤 했으며
너는 그런 나를 눈치채고 '영화 그만 끌까?' 몇 번인가, 물어보았다.

그런 너는, 내게서 좀 떨어져 앉았던 너는
과연 영화가 머리에 들어가긴 할까 싶을 만큼 불덩어리여서
떨어져 앉았는데도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너를 두고 그냥 돌아가야 하는지, 즉, 너를 쉬게 해 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언제나 적막하게 혼자 살고 있는 네가, 앓고 있는 것을 버려두고 돌아가지... 말고,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지,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라, 내가 있고 싶은 대로 네 곁에 그냥 있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너 열 있구나, 이만큼 떨어져 있는데도 열이 느껴져, 했더니 너는
미안, 이라고 말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나는 말하고 싶었으나
대신 말했다. 네 이마 좀 짚어 봐도 돼?
너는 순순히 아이처럼 끄덕이고 눈을 감았고
짚어 본 너의 이마는 정말로 불덩어리였다. 눈까지 붉어져 있는 너를 보고 나는
마음이 찌르르 아파 왔다.


그건, 몇 번인가 너의 집에 갔었지만
언제나 거리를 조금 두고 떨어져 앉아 얌전히 영화를 보던 너와 내가
처음 서로 닿은 것이었다.


-


내게 매일매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자를 보내는 너.
좋아한다는 말 같은 것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매번, 새롭지도 않은, 영화를 같이 보자는 핑계로
나를 불러내는 너.
도대체 나랑 영화가 왜 보고 싶느냐고, 일부러 떠보는 질문을 던져 보아도
아무것도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다고, 그냥 영화를 같이 보는 것일 뿐이라고
달아나는 듯 대답을 해 버리는 너,
그럼 새로운 영화 파일을 구해 줄까? 컴퓨터도 빌려 줄게, 언제든 너 편할 때 볼 수 있게,
라고 했더니
같이 영화를 보기 싫은 거냐고 되묻는.

물어보지 않았으나 나에게... 언제든 오고 싶을 때 너의 집에 오라고,
물어볼 필요도 없고 초대받을 필요도 없이 언제나 환영이라고 말하고
내가 사는 집에 놀러 오고 싶다고 말하는 너.
내 집에 왔을 때 네가 타고 온 차는 네 것이 아니었지. 고급스러운 빨간 차,
나는 네가 그걸 누구에게서 빌렸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나의 집에 놀러 오면서 좋은 차를 타고 오고 싶은 마음이었을 네가 읽혀져서,
물으면 네가 무안해 할 것 같아서.


-


나는 이따금 네 이마를 짚어 보았다.
다행히도, 열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조금 나아졌네, 라고 했더니 너는
38.6도로군, 이라고 했고
한참 지나 다시 짚어 보았을 때, 거의 다 내린 것이 느껴져
와, 이젠 많이 나아졌어, 라고 했더니
음, 지금은 37.5도쯤 되겠어, 라고 하고는 웃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나고, 텔레비전에서 하는 다른 영화를 또 보고,
음악을 듣고 하던 사이
나는 피곤해졌고
해는 저물어 갔고
나는 또다시, 일어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너무 늦었네, 너 자야지, 라고 했더니
아니야, 아직 일러, 라고 너는 말했고...
그러면서 너는 계속, 페트병에 든 물을 마셨다. 갈증이 나 힘든 것 같았다.


피곤해하는 네게, 자러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가 자러 가면 내가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자러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주말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네게, 뭔가를 묻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으므로
그냥...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긴 머리칼이 네 팔에 닿았고
곧이어 네가 내 머리에 얼굴을 살짝 기대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싶었던 걸까,
쿠션 위에 올려 놓은 내 손가락에 망설이듯이 손을 살짝 대어 보고는
너는 곧 손을 거두었다. 기대어 있는 너의 어깨를 타고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거리를 유지하고 대하던 내가
네게 기대어 온 것에... 너는 놀랐을까.)


뒤로 물러선 모습을 하고 있는 너의 손을
내가 다시, 잡았고
가만가만히... 잡은 그 손을, 너는 마치 허락을 얻은 모양, 맞잡아 왔다.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네가 가장 좋아한다고 했고
나 역시 마음에 들었던 그 노래, 를 시작으로. 어딘가 먼 나라로 나를 데려가는 듯하는 음색의 노래가.



영화를 보겠다고 불을 꺼 둔 방 안에
창으로 흘러드는 흐릿한 불빛을 받아, 그림자를 떨구며
천장의 팬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고
오디오의 빨간 불빛만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어둠 속의 그런 풍경들을 보며
아마도 이 날을 기억하게 되겠지, 이대로 마음 속에 모든 걸 담아 가고 싶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스케치를 하면 대충이라도 이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를
멍하니 생각했다.




너는
맞잡고 있는 나의 손등에 손가락을 까닥여 음악의 박자를 맞추다가
어느 순간, 그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디오에 들어 있는
씨디 두 장이 돌았고, 세 장째 돌아가던 씨디는 너무 시끄러워
너는 다시 첫 번째 씨디로 음악을 넘겼으며
두 번째 씨디가 두 번째로 돌아갈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너는 다시 열이 오르고 있어
네 침대 곁에 나는 의자를 갖다 두고 이따금,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게 다였다.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네가 잠이 들면, 그 때 떠나오고 싶었지만
내가 있어 오히려 네가 잠들지 못하는 것도 같아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하고 일어나야 했다.

가만히 일어나, 네게 주고 싶었던- 하지만 너는 읽지 못하는, 우리 말로 된 책을
의자 위에 두고 나오려는데
잠이 들었나 싶었던... 네가 물었다. 가는 거냐고.
그렇다고, 잘 자라고 하는 말에 너도 대답했다.
굿나잇.



-



그리고 오늘, 언제나처럼 보내온 너의 문자 메시지.
Hello, my sunshine-

(너는 그걸 아니. 용기를 내어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너.
네가 그렇게 부르면 나는 설렌다는 것을.)

너의 문자를 받는 것도 이제
길게 남았다면 2주일.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나의 나라로.
그리고...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너도, 나도.

나는, 내 나라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평생의 일은, 내 나라를 떠나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너는
네가 살아온 세계는, 너무 좁다.
너는 이제 막 시작하는 나이이므로... 언제든 더 먼 세상으로 뻗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너무 젊은 청년. 네가 우리 나라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안녕.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는 너,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은 그것이 내 넘겨짚기가 아닐까, 생각해 보며 궁금해 하는 나.
너는, 내게 더 머물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 역시, 너는 왜 나를 잡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네가 나를 잡는다면, 정말 열심히 잡는다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곳에 머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서로 다른 언어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나눌 수 있던 우리,
나는... 그런 네 곁에, 머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너. 상처 입을 것이 늘 두려운 거라고,
네 속에는 실제의 너보다도 더 어린, 여린 아이가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걸 아니. 나 역시도 상처 입는 것이 두렵단다.
그리고 너의 완벽한 연기는 이미 가끔 나를 상처 입힌 적이 있지.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다만 나를 기억해 줘.
언젠가는 잊겠지만
그래도 기억할 수 있는 동안에는, 기억해 줘.


우리가 함께 앉아 있던 그 소파라든가
같이 들었던 음악을
보고, 또 들을 때에.


내가 남긴 것들을 볼 때.
오랫동안 잃어버리지 말고,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해 줘.


나도 기억할게.
그렇게 수줍게 다가오던
푸른 눈의 너.
나의 비밀스러운, 어린 연인.


남들이 뭐라고 해도,
너는 그토록 순수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할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부디 네가 외롭지 않기를.










------------------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어
여기에 털어놓아요.
털어놓고 나니...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냥, 슬프네요.


너무 생뚱맞게 여기지 말아 주시길.


IP : 110.20.xxx.146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인생
    '09.12.7 3:52 AM (218.51.xxx.190)

    나는 내가 앞으로 살 날이 산 날보다 적게 남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불혹을 넘었으니까요.
    불혹이라는 말, 잘못된 말인것 같아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니요. 인생은 늘 바람앞의 촛불인걸요.
    사랑은
    인생에서 몇번이나 찾아올까요?
    지금 님은 사랑 앞에 있는 걸요.
    사랑이 님에게 왔을 때 사랑하세요.
    아님, 긴 후회만이 남을 걸요.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걸요.
    내 사람은 많지 않은걸요.
    2주라면,
    두렵겠지만
    그래도 나라면 사랑할 거 같아요.
    꼭 진한 스킨십만이 사랑은 아니니까요.
    사랑이 앞에 있어도
    사랑할 수 없는 시기도, 사람도 있답니다.
    사랑할 수 있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
    인생을 낭비하는 거 아닐까요...

  • 2. 이런..
    '09.12.7 4:18 AM (211.221.xxx.175)

    용기를 내서 사랑을 하라고 할수도 없고, 그냥 깨끗이 잊으라고 할수도 없어서 마음이 아프네요..

  • 3. ㅜㅜ
    '09.12.7 6:21 AM (84.112.xxx.55)

    너무 슬퍼요

  • 4. .....
    '09.12.7 9:20 AM (220.88.xxx.51)

    사랑은
    그 때, 그 순간, 그 곳,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사랑하라..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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