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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국판 킬링필드(1951년)...지리산 산청 외공리에서

진실규명 조회수 : 272
작성일 : 2008-08-28 10:21:33

(유해 발굴 관련 사진은 한국전쟁유족회 홈페이지-wwww.coreawar.or.kr에 있습니다.)


한국판 킬링필드(1951년)... 아, 하늘이 노하여 통곡하는 구나!!!

‘산청 외공리 민간인 유해매장지 발굴조사 중간 보고’

1.조사 개요

1)조사 대상지역 개요

외공리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1년 2~3월 무렵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군용 트럭을 탄 군인들이 10대 이상의 버스에 태우고 온 민간인을 이곳 외공리 소정골에서 집단학살하여 매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98년 진주문화방송 ‘다큐멘터리 제작팀(지리산의 눈물)이 현장을 탐문하여 1차 발굴을 시도, 다수의 유해를 노출한 적이 있었고, 2000년 5월에도 민간단체가 주도하여 숯굴로 알려진 곳에서 150명 정도로 추정되는 유해를 발굴하였으며 학교 이름이 있는 단추, 탄피 등 다수의 유품이 수습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다시 그 자리에 매장하고 큰 봉분을 조성하였다.

2)조사단 구성

진실화해위원회의 의뢰를 받은 경남대학교박물관에서 아래와 같이 조사단을 구성하였다.

*조사단장 : 이종흡(경남대 교수, 박물관장)

*책임연구원 : 이상길(경남대 교수,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연구원 : 이선미(경남대 박물관 연구원)

*그 외 연구 보조원과 보조원 등

3)조사 일정

발굴 조사는 2008년 7월 18일에 착수하여 8월 25일 현재까지 조사를 진행 중이다.

2.조사 경과

발굴 조사는 외공리 산 214~1번지 일대 속칭 소정굴이라는 골짜기를 대상으로 하고, 그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를 경계로 하여 전체를 3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A지구에서는 2000년에 유해 일부를 수습하였다가 재매장한 1호, B지구에서는 2~5호 등 현재까지 모두 4개소의 매장지를 발굴하였다. C지구에서는 아직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3.조사 내용

1)A지구-1호

(매장지 상태와 유해)

-2000년 조성된 봉분을 파고 구덩이의 윤곽을 찾아 파 내려갔다. 당시 조성한 봉분 아래에 4X2m의 목곽을 설치하여 그 내부에 유골을 꽉 채웠다. 그 내부를 모두 비닐로 씌웠기 때문에 목곽 내부는 오랫동안 습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유골은 2000년도에 비해 그 상태가 매우 불량하여 수습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유골의 판단)

-1호에서 수습한 유골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대퇴골을 기준으로 보면 1호 숯굴에는 적어도 142명 이상이 매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용품, 유품)

-1호는 2000년 발굴 당시 여러 점의 유품과 탄피가 수습되었고, 이번 조사 과정에서도 다수의 유류품이 수습되었다.

2)B지구-2호

(매장지 상태)

-지표상 함몰부가 관찰되고 구덩이를 파는 과정에서 나온 돌과 흙의 무더기도 외형상 확인되었다. 구덩이의 크기는 길이 4m 폭1.2m이고 깊이는 0.3m로 등고선을 따라 긴 형태이다. 구덩이를 비교적 얕게 파고 유해를 매장한 다음 돌과 흙으로 그 위를 덮었다.

(유해 특징)

-모두 16구의 유해가 확인되었다. 노출상태로 보아 당시에 모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구덩이에 꿇어앉은 상태에서 총을 맞아 앞으로 쓰러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손을 묶은 끈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대부분 머리에 총을 맞은 것으로 보이며, 두개골이 모두 깨어진 점도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사살지점은 구덩이의 좌측 후방으로 판단되었다.

(군용품, 유품 등)

-탄피 12개와 옷으로 보이는 천 일부, 단추, 고무줄, 신발끈, 성격을 알 수 없는 철편, 유리조각 등이 확인되었다. 탄피는 1곳에서만 집중되어 출토되었으므로 그곳을 사살지점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구덩이 안에서 3개의 탄두가 수습되었다.

3)B지구-3호

(매장지 상태)

-2호와 나란한 방향으로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의 크기는 길이 3m, 폭2m이며, 깊이는 0.8m로 깊은 편이다.

(유해 특징)

2호로 마찬가지로 손을 뒤로 묶인 상태에서 구덩이 속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매장된 유해의 수와 탄피의 수가 대체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한 사람이 한발의 총을 맞은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까지 25구의 유해가 확인되었는데, 구덩이가 깊고 유해가 겹쳐져 있어 실제 매장된 숫자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군용품, 유품 등)

-단추, 지퍼, 고무줄 등 의복과 관련된 것 외에 특별한 유품은 확인되지 않았다. 고무줄은 골반에 결쳐진 것과 발목에 매여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운동화 끈을 꿰기 위한 고리도 출토되었다.

4)B지구-4호

(매장지 상태)

-직경 3m 가량의 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으며, 가운데가 0.6m 정도로 깊은 형태이다. 구덩이 내부는 돌과 흙으로 채워져 있었다.

(유해 특징)

-지금까지 23구의 유해가 노출되었는데, 가장자리 쪽의 두개골이 먼저 드러났고 중심부는 깊게 함몰된 상태였다. 유해의 상태로 보아 구덩이 내에서 사살된 것이 분명한데 모두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꿇어 앉혀진 유해는 반으로 접힌 상태이고 비스듬히 길게 누운 유해도 확인된다.

5)B지구-5호

(매장지 상태)

-구덩이의 크기는 4X2.5m이고 깊이는 0.8m였다. 내부는 흙과 돌로 채워져 있었는데, 경사면의 높은 쪽을 긁어내려 덮은 것 같다.

(유해 특징)

-현재까지 11구의 유해가 노출되었다. 매장된 자세는 위의 다른 구덩이와 거의 비슷하였다.

4.유류품

5개 매장지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유류품을 보면, 유해 수는 227개+알파, 군용품은 탄피가 82(권총3), 탄두 26이며, 의복은 옷(천) 26, 단추 276(仁商,京農,金中),허리띠 7이며 고무줄22,지퍼5 신발8(운동화,검정고무신)이다.

또 소지품에서 숟가락 8, 빗 2, 비녀 1, 구두 주걱 2, 잔(그릇) 2, 동전 1(일본 화폐), 유리조각 5, 기타(깡통 3,끈 3, 멜빵고리 1)이다.

5.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사항과 의문점

1)피해자의 성격

-현재까지 피해자의 신원을 알 수 있거나, 적어도 이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확인할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증언 가운데 ‘경북영’, ‘전북영’이라는 버스 번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 서울시에서 시영버스 제도를 채택한 것은 1967년 3월 11일이므로 ‘서울시영버스’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설사 이들 ‘경북영’, ‘전북영’번호나 ‘서울시영’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이들 민간인이 그곳에서 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서울의 경우 1951년 초에는 대부분의 버스가 군에 징발된 상태였고, 그 해 3월 이후부터 일부 버스는 그것을 해체하는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仁商’, ‘京農’ 등의 명문이 있는 단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 발굴 과정에서 오류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단추가 1~2점만 수습되었다면 그것이 교복 그 자체는 아닐 수 있으므로 신분이 학생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京農’이라는 단추는 1945년까지만 사용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둘 모두가 서울, 경기지역이라는 점에서 혹시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결국 이곳 외공리 소정굴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그 당시의 신분이 죄수와 같은 수감자의 상태가 아닌, 말 그대로 순수 민간인이었다는 점,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외에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당시에는 매우 귀했던, 10대 이상의 많은 버스를 동원한 점,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당시 있던 곳과는 비교적 먼 곳까지 왔다는 점, 학살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1951년 초라는 점 등이 외공리 학살사건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향후 과제로 남겨둔다.

참고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 이남을 수복한 뒤인 1950년 12월 1일 ‘부역행위 특별처리법’이라는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그 이전인 1950년 11월까지 약 55,000명의 부역자들이 검거되었다.

2)가해자

-가해자에 대한 몇몇 증언이나 보도가 있었지만 사실관계는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증언 가운데에는 장갑차와 같이 위에 큰 총을 거치한 차량이 맨 앞에 있었다는 점은 일치하며, 국방색의 옷에(철모가 아닌)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는 사실 정도가 전부이다. 발굴 내용을 보면 권총 외에 모두 카빈 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가할 수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규군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외에 다른 사항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취소하기는 하였지만)75명분의 점심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왔던 가해자가 모두 75명이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장갑차와 비슷한 차량(5명 이내), 지프(5명 이내), 군용트럭의 탑승인원(30~40명), 버스에 타고서 민간인을 감시했던 인원(각 2명일 경우 20~25명 가량), 버스 운전자 10~15명 등으로 계산하면 지휘자, 군인, 버스 운전자 등을 합하여 75명 정도가 이곳에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3)학살과 매장 과정

-차에서 내린 후 민간인과 군인이 줄지어 산을 올랐다. 1시간 가량 구덩이를 판 뒤 손이 뒤로 묶였고, 차례대로 구덩이 안에 들어가 꿇어앉혀 졌다.

손을 묶은 끈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칡넝쿨과 같은 것을 현지에서 조달하였을지도 모른다. 구덩이에 사람을 넣은 채로 한 두 지점에서 지속적으로 사살을 가하였다.

탄피와 매장자의 수가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두개골을 확인한 바, 대체로 머리를 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앞으로 고꾸라졌고 몇몇은 옆으로 쓰러졌다. 사살 당시의 광경은 죄수를 처형하는 방법과 매우 비슷하다. 구덩이 앞에서 한사람씩 세우고 총을 쏘았다는 목격자 며느리의 증언은 가장 확실하다. 목격자가 근처 어딘가에서 학살 장면을 직접 본 것 같다.

150여명이 학살된 숯굴은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다. 2~5호에 비해 수가 월등히 많은데다가 구덩이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숯굴에 사람을 차례로 밀어 넣고 무차별로 난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로 구덩이를 파지 않았으므로 이곳에서 먼저 학살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구덩이를 팔 때 나온 돌 또는 주변에 흩어진 돌을 모아 시신 위에 대충 얹고 곧바로 산을 내려와 왔던 길로 되돌아왔다. 그 사이의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4)학살행위의 은밀성

-외공리 민간인 학살사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학살과정 전체가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타 지역의 보도연맹 관련자 희생사건이나 빨치산 관련자 학살사건의 경우 어떤 형태로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외공리의 경우 학살 이후 주변 민간인을 동원하여 현장을 매몰하거나, 장소의 물색이나 뒤처리 과정에서 현지 경찰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

당초 외공리를 지나 올라갔다가 차를 돌려 다시 내려왔다는 증언으로 볼 때, 현지 사정에 어두운 그들이 은밀한 장소를 물색하고자 하는 행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을 포함한 현지인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 학살사건을 외부에 전혀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 사람씩 머리에 총을 쏘아 절명시킴으로써 아무도 살아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는 점도 다른 학살사건과 차이가 있다.

5)여자, 어린아이

-민간인 중에 여자와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여러 증언이 있었다. 발굴 과정에서 비녀를 찌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이 되었으나, 여자의 수, 어린아이 포함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 점은 유골의 감식 과정에서 쉽게 판명이 될 것이다.

6.맺음말

이상이 지금까지 산청 외공리 민간인 집단매장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의 수는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경남지역에서 우리 군, 경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시기나 성격상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거창 신원사건과 같이 민간인을 적으로 오인하여 집단학살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종류의 사건은 계획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분류에서는 제외한다. 인민군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으로 학살된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일단 보류하지 않는다.)

첫째, 여순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기의 학살이다. 산청에서는 1949년 7월부터 1950년 초까지 각지에 주둔하던 토벌대들이 빨치산 협조 또는 부역 혐의로 민간인을 색출, 학살한 것이다. 시천면 원리를 포함하여 서부 경남 일대에 이 시기에 학살된 민간인 유해 집단매장지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둘째,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대상으로 하여 예비검속을 실시하고, 그 때 모았던 사람들을 각지에서 학살, 매장하였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1950년 7월에서 9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셋째, 1950년 9월 서울 수복 이후 인공 치하에서 인민군에게 적극 협조하였거나 가담한 사람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작업이 1950년 후반부터 1951년 초에 걸쳐 여러 곳에서 자행되었다. ‘부역행위 특별처리법’의 공표와 함께 이들을 임의로 처벌할 수 없도록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여러 경로로 민간인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외공리 민간인 학살사건은 발생 시점으로 보아 앞의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점만으로 사건의 성격을 단정할 수는 없다. 나머지 발굴을 마무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보다 자세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발굴과 목격자 증언, 자료 확보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작업과 동시에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다른 한 가지는 발굴된 유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이러한 작업이 향후 역사적으로 어떤 교훈을 가지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비록 전시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을 빌미로 수많은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하여 암매장하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전쟁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위기에 편승하여 민간인을 살상할 목적으로 무장한 공권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같은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후손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뼈아픈 교훈으로 가슴에 새기도록 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위령탑이 그 상처를 대변해 줄 수 있을 까?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잔인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억울하게 학살되어 집단으로 매장된 이들의 뜻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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