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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에서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풀빵 조회수 : 689
작성일 : 2008-08-12 21:50:10
제 딸아이는 6살입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지금은 방학입니다. 밤샘 의료지원을 나갈 때를 제외하곤 저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제 기륭전자 노동자 동조 단식 현장에도 함께 갔습니다. 아이는 지난 주에도 농성장에 갔습니다만, 다시 가자고 하는 말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곳은 시원하지도 않고, 예쁘게 꾸며져 있지도 않고, 같이 놀 아이들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마가 그곳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억지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농성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이에게 밥을 먹이며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때는 세상에서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는다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쇠심줄 같은 신경을 지니지는 못했는지 시국 덕분에 이미 식욕을 많이 상실해서 동조 단식 중에도 태연히 아이에게 밥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지난 주 농성장의 한 조합원 분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62일 째 단식을 하고 계신 김소연 분회장이 얼마 전 단식하다 쓰러진 조합원에게 미음을 끓여주었다고 합니다. 분회장이라는 직함이 김소연이라는 이름을 수식하고 있지만 제가 만나 본 김소연씨는 그냥 평범한 동네 언니였습니다. 선한 인상의 얼굴에 곡기를 끊은지 오래라 바닥에 앉아있다기 보다는 살짝 얹혀있다는 느낌이 들어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까 싶었습니다. 심난한 얼굴로 찾아가 매실 효소를 내미는 저에게 오히려 밝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에 어색한 미소만 띄운 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육신이 의학적인 한계를 넘은 지금 이승과의 끈을 근근히 이어주고 있는 것은 물과 소금, 약간의 효소 뿐이라는데, 소금과 효소마저 끊고 물로 연명하고, 의학적인 중재를 거부하겠다는 말씀에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저는 서민의 딸로 태어나 풍족치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찌어찌하여 대학을 마치고 안정된 정규직으로 일을 하다 결혼해서 지금은 전업 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30세 전후로 자기계발서와 재테크 책을 탐독하며 어찌하면 일신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을까, 돈에 굶주린 삶을 살아오다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와 함께 다시 삶을 배우고 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딸아이에게 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이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책들을 갖다버리고 다시 인문학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가 세상을 직접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을 바로 보게 해주고 무엇이 옳은지 명확히 알게 해주었습니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농성장에 도착한 딸아이는 아까의 망설임과는 달리 농성장에서 잘 놀고 잘 먹었습니다. 33도에 육박하는 날씨였지만 미약하나마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컨테이너 안에서 현장 단식 중인 처음 만난 이모와 이런저런 놀이를 하며 잘 지내주었습니다. 오랜만에 춤도 추고 팔랑거리는 계집아이가 있어서인지 조합원 분들은 밑반찬보다 딸아이의 방문을 더 환영해주셨습니다. 엄마의 친구는 모두 이모이기에 수많은 이모들에게 둘러쌓여 커왔던 터라 이곳도 이모들의 삶터라는 확신이 들어서인지 넉살맞게 잘 적응해갔습니다. 아이를 낳은 이후 더 잘사는 친구, 더 쾌적한 환경, 더 비싼 사교육을 추구하며 키울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지만 길다면 긴 5년 간 아이를 키우며 내린 결론은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인지를 고민할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지를 고민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자신이 돈과 권력이 아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내 아이도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아직까지 내적으로 미성숙하고 많은 과제를 안고 있지만, 천천히 버릴 것을 버려가며 놓아야할 것들을 놓아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일부터 모레까지 이틀간 더 단식을 하려고 합니다. 내가 단식을 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기륭의 노동자들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동조 단식을 하실 분들은 연락주세요. 단식을 할 수 없고, 성금도 보낼 수 없다고 해서 조용히 보고만 계신 분들께도 부탁드립니다. 단식 안하셔도 되고 성금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륭전자 분회 카페에 가셔서 응원의 말씀 한 줄 남겨주시고, 이왕 참가하실 촛불 집회면 기륭 앞에서 하루 쯤 참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저녁 7시 촛불문화제에, 모레는 하루 종일 농성장에 있을 예정입니다.

우리, 목숨을 걸고 무언가와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킵시다. 너무나 처량맞기 때문에,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노동이나 노조처럼 나와 상관 없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에 모른척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IP : 61.73.xxx.79
1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풀빵
    '08.8.12 9:51 PM (61.73.xxx.79)

    기륭전자분회 카페: http://cafe.naver.com/kiryung

    기륭전자 농성 동영상: http://www.newjinbo.org/board/view.php?id=discussion&no=16360

  • 2.
    '08.8.12 10:06 PM (125.176.xxx.130)

    반성합니다...인간이 인간에 대한 예의...풀빵님의 그 한마디에 가슴이 콱 막히네요....

  • 3. 아꼬
    '08.8.12 10:34 PM (221.140.xxx.106)

    부끄럽네요. 어떤 아이로 키울건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으로 살아야할지에 고민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네요. 늘 풀빵님께 배웁니다

  • 4. 빈선맘
    '08.8.12 10:45 PM (121.166.xxx.104)

    좋은 말씀에...부족한 저를 반성합니다...김소연 분회장님 부디 아무 탈없으시길...빕니다...

  • 5. 따주리
    '08.8.12 10:53 PM (119.67.xxx.154)

    풀빵님의 지금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란 님의 그예쁜아이는 분명히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이를 배려

    하고 아파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하는 사회의 빛 과 소금같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

    다.....

    부모가 살아가면서 추구하는행복의 가치에 따라 우리 아이들도 각기 다른모습으로 성장하겠지요

    만약 부모가 돈이 행복의 최고가치를 물질에 둔다면 그 아이가 추구하는 최상의 선은 물질이 될것이

    며 물질 이외의 모든가치는 배제되는 계산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겠지요....

    만약에 부모가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가 나눔으로 다른이와 함께하며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이와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만들어가는 행복이라면 그 아이는 남을 배려하고 어려운이에게

    봉사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것이며 만사에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이 충만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 할것입니다

    풀빵님! 옳으신 선택을 하신것 같고 저도 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싶고 실천하고싶은 1인입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힘내세여!!!!!!!!!

  • 6. 은실비
    '08.8.12 10:55 PM (122.57.xxx.12)

    ..............응원을 보냅니다.

  • 7. ..
    '08.8.12 11:24 PM (59.5.xxx.176)

    왜이리 제자신이 한없이 작고 부끄러워지는지요...
    풀빵님.. 훌륭한 여성이 이십니다.

  • 8. 구름
    '08.8.12 11:52 PM (147.47.xxx.131)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모두에게요. 풀빵님과 기륭전자의 조합원들 분에게도요...

  • 9. 은석형맘
    '08.8.13 1:09 AM (203.142.xxx.212)

    응원합니다...이번주..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잠시 비우며..오히려..넘 많이 힘드네요..
    다른곳에서도 지지하며...편치않은 며칠을 보내고 오겠습니다.
    부디 모든분들..지켜주세요..
    너무 지켜야 할 곳들이 많아...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풀빵님.

  • 10. 고맙습니다
    '08.8.13 1:10 AM (58.77.xxx.2)

    그리고 미안합니다
    저도 같은 또래의 딸아이가 있어요...
    생업에 바빠 참여못해 저역시 부끄럽네요

  • 11. 반성합니다
    '08.8.13 12:20 PM (58.226.xxx.119)

    풀빵님의 말씀에..

    ....우리, 목숨을 걸고 무언가와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킵시다....

  • 12. phua
    '08.8.13 12:51 PM (218.52.xxx.102)

    저녁에 뵙겠습니다.

  • 13. 3령굼벵이
    '08.8.13 1:58 PM (59.7.xxx.241)

    아이들 저녁 일찍 챙겨놓고 처음으로 기륭에 가 봤습니다.
    농성장에서 님이 말씀하시는 것 듣고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보다 진솔하고 내가ㅏ여성이고 아이 엄마라는게 참 자랑스럽더라구요.
    오늘 계시겠네요.... 감사합니다.

  • 14. 엄마토마토
    '08.8.13 4:07 PM (222.112.xxx.61)

    기륭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 15. 에헤라디어
    '08.8.13 8:40 PM (117.123.xxx.97)

    풀빵님... 고맙습니다.

  • 16. 최은희
    '08.8.14 1:21 AM (124.254.xxx.79)

    퍼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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