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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병 끝에 효자 없다는 말
언젠가 과수원 김회장님이 '효부상'을 추천하라는 기관의 명을 받고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사는 숙이엄마를 추천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숙이엄마가 아니면 누가 효부상을 받겠냐며 찬성을 하지요.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매우 뾰로퉁하고 거칠게 그 상을 거부합니다. 마을에 일대 술렁임이 일지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잔머리족들의 뒷공론부터, 나서기를 싫어하는 천성이라는 신중론자들의 의견,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아이구 모르겠다 하던 복길 할머니. 결국 극의 마지막에는 숙이엄마가 풍 맞아 누워있는 시어머니에게 독백을 하는 것으로 그 이유를 밝힙니다.
"제가 효부라구요? 제가 시어머니를 잘 모신다구요? (눈물) 모르면 암말씀들 마세요. 저요. 매일 기도해요. 우리 어머니 빨리 데려가주세요. 우리 어머니 이제 그만 쉬게 해 주세요.(통곡) 이런 제가 어떻게 효부에요? 어머니 빨리 돌아가시라고 기도하는 제가, 제가 어떻게 멀쩡한 정신으로 효부상을 받겠어요."
사실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인우둥에게 매우 선명히 각인된 장면이었습니다. 숙이엄마는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원망도 많이 하고 때론 좋지 않은 기도까지 하지만... 그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사랑, 애절함, 그리고 그를 둘러싼 현실과 시선들... 드라마 속에 녹여낸 그 모든 것들이 인우둥의 가슴을 쩌릿하게 훑고 지나갔습니다. 아마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리얼리즘적인 감동이었지 싶어요. 숙이엄마의 마음은 잘난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구석 어디에나 있는 곱고 애틋한 마음,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는 우리네 인생을 그대로 나타냈었던 것 같아요.
(앗, 점점 겉잡을 수 없이 거창해진다. 여기서 그만~!)
할머니가 사고를 당하신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깁스를 푸는 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더디시겠죠. 할머니는 '창살 없는 가막살이(감옥살이)'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힘들 게 하는 것은 할머니가 짜놓으신 노동 스케쥴, 그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웬만한 가을걷이도 끝내셨고, 갈무리도 대강하신 후, 사고 직전 메주까지 만들어 달아놓으셨으니 당장 해야할 큰일은 없지만서도 할머니 계획은 그게 아니셨나봅니다.
겨울이 농한기라고 하지만 할머니의 일은 끊임이 없지요. 단 한 순간도 할머니가 낮잠을 주무시는 모습이나 잠깐 좀 쉬겠다고 엉덩이를 붙이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무언가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내고 해내고야 마는 성미셨죠.
그런 분이 다리를 쓰지 못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계시니 좀이 쑤시다 못해 엉덩이에 구더기가 날 지경이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제부(할머니의)의 안타까운 운명과, 집앞 길을 땅주인이 막아놓은 일, 인우둥 시험 떨어진 일 등으로 해서 좋지 않은 일이 사고 후 연달아 일어나서 더욱더 속이 타셨던 거지요. 원래도 활동적이던 사람이 병원 생활을 하게 되거나 신체를 못 쓰게 되면 매우 갑갑해 하고 우울증까지 보인다고 하잖아요. 할머니의 우울함이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어떨 때는 신경질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시기도 해요. 항상 몸 부지런히 놀리면서 남들에게 뭐 해주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웃으시던 분이 그러시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사실은 조금 힘들기도 했어요.
그래요. 인우둥은 힘들었어요. 처음에야 마침 제가 집을 비운 때에 사고가 나서 죄 지은 마음 때문에 '정성으로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마음 먹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은 옅어져갔지요. 오히려 '왜 저렇게 짜증을 내실까, 왜 똑부러지게 시키시지 않고 에둘러 말씀하셔서 일을 두 배로 만드실까, 웃으면서 말씀하실 순 없을까...'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아주 무거웠어요.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인우둥에게는 '이만큼만 해도 나는 참 기특한 거야'하는, 뭐랄까 약간 우쭐대면서 스스로 잘난척하는 자만이 스며 있었어요. 젊은 나이에 누가 시골에서 갈려고 하겠어, 시집도 안 간 처녀가 할머니 모시고 사는 집이 어딨어. 직장까지 다니면서 시골살림 하는 것이 쉬운 줄 알아, 개죽 쑤기, 쓰레기 소각 및 매립, 수도 동파 신경쓰기 등 도시살림에서는 필요없었던 일까지 새로 해내었으니 스스로 기특하면서도 남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아니, 사실 많았어요.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어서 더욱 그랬죠.
지난 주말 할머니께서 무슨 일을 시키셨는데 제가 잘못 알아듣고 딴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잘못 알아들었다기보다 할머니가 표현을 정확하게 하지 않으셨던 거지요. 할머니는 그동안 혼자 사시면서 어디에 뭐가 있고 지금은 무얼 해야하는 때인지.. 이런 것들이 머리 속에 쫘악 끝없는 프로세스로 꿰놓고 계시겠지만 저야 어디 그런가요. 하나 시키면 반도 못 하고 '저기 저거 가져와라' 하시면 '저기가 어딘데요?' 하기 일쑤죠. 결국 "아휴, 참 답답하긴!" 소리가 할머니 입에서 나왔고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그랬지. 더 확실하게 말씀하셨어야죠!"하며 제 목소리도 약간 커졌습니다. 안방 문을 닫고 다시 일을 하러 부엌으로 나와서, 인우둥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힘든데, 이만큼도 잘 하는 건데, 하는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네, 서러움의 눈물이었지요. 그마저도 혹시 할머니 들으실까봐 꺼이꺼이 소리도 못 내고 목젖으로 꺽꺽 눌러가며 부엌문 밖 보일러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네요. 그때 사실 어디를 좀 오랜만에 외출하고 싶었는데 할머니 식사 챙겨드리는 것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다 포기하고 들어온 길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날, 그 서러움 비슷한 야릇한 속상함을 하소연하고 싶어 82쿡 창을 열었었지요. 나도 익명으로 털어놓아볼까, 그래도 뻔히 알 거야, 그러면서 글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온갖 착한척을 다 하더니 결국.. '하며 욕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머리가 복잡하다가 그냥 다시 컴을 끄고 말았습니다. 남들이 욕을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할머니 밥 해드린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징징거리고 엄살을 피우나... 하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젠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까지 해서 그 속상함이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힘든 상황도 속상하고, 그걸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내 모습도 너무너무 속상해서요.
안방에서는 지금 기분좋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친척 할머니께서 병문안차 오셔서 주무시고 가시기로 하셨거든요. 간만에 이야기꽃을 피우시나봅니다. 저녁상을 보아드리는데 밝은 할머니 얼굴을 보고 제 마음도 더 밝아졌습니다. 벌써 어제, 서울서 내려오신 아버지가 저를 두둔하며 외출을 도와주셨기 때문에 반 넘게 마음이 풀려있었던 걸요.
'긴 병 끝에 효자 없다'고 하던가요. 그 말 맞나봐요. 치사해지고 옹졸해지는 사람 마음이 참, 부끄러워요. 럽첸 언니 시어머니 이야기를 보면서, 어려운 살림에서도 시부모 봉양 열심히 하시는 경빈마마님을 생각하면서 이제 적어도 울지는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힘들면 그냥 '엥이~ 할머니 나 그거 못하겠다'하고 어리광 부릴래요. 잘하려고, 칭찬받으려고 욕심내지 않고 내 마음 편하게 할머니 모시면서 진심으로 할머니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 잘 하는 곰같은 며느리보다 일 못해도 살갑게 구는 여우 같은 며느리가 낫다잖아요. 일 잘 하는 것은 제가 백날 흉내내봐야 할머니 하신 던 일 백분의 일도 못 쫓아갈테니 그냥 애교에 어리광 부리면서 계속 할머니의 걱정스런 손녀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만큼 하는데...'하는 자만이 스민 잘난척을 하지 않아야겠어요. 마음 속에 잘난척이 자리잡으니 섭섭함도 생기고 서러움도 생기고 결국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려고 하는 것을 경험했거든요.
원래 계획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 할머니의 음식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무슨 일기 같은 것만 자꾸 올려요. 언니, 이모들이 흉봐도 할 수 없네요.
인우둥이 하는 요리라는 건 그저 사골 국물 주구장창 끓여대는 거랑
할머니가 담가놓으신 김장김치 꺼내 썰어 상에 올리는 것 밖에 없어서
요리 이야기는 할 게 없어요.
할머니 좋아하시는 과일사라다 버무려 놓고 뭐 대단한 것처럼 얼마나 뿌듯했던 ^^ 인우둥인데요, 뭐.
1. jasmine
'03.12.29 10:46 PM (218.39.xxx.102)우리 딸이 님처럼만 컸으면 좋겠어요. 참, 이쁘네요.....인우둥 홧팅!!!!!
2. xingxing
'03.12.29 11:14 PM (211.104.xxx.245)'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제가 요즈음 항상 경계하는 말이랍니다.
이제 겨우 1년 간병해놓고,
때때로 지치고 마음이 힘들 때면
그 말을 되새기며 다시 마음을 잡곤 합니다.
인우둥님, 우리 같이 힘내자구요~~3. 사과국수
'03.12.29 11:16 PM (211.110.xxx.148)인우둥, 오랜만이네요?^^
가끔 듣는 인우둥소식 반가워요.
저도 할머니와 같이 지내는데.. 저희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소일거리도 하기 힘들죠.
그런 할머니와 지내는것, 저도 정말 온갖 짜증과 불만속에 지낸날도 많았지만.. 요즘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뭔가를 깨달아가는 기분으로 지내요. 삶과 타협하는기분?^^
80이 훌쩍넘으신 할머니.. 6.25도 겪고 오랜세월을 잘 견뎌온 만큼 그런 할머니에게는 뭔가? 신비함이 느껴지기도 하답니다.. ㅎㅎ 그런 할머니와 같이 지낸다는게,, 어떤?..보호를 받고 있는 기분이 들때도 있죠.. 힘들땐 탈무드의 지혜를 빌리기도하구요..
인우둥의 할머니이야기 들으니, 남일같지않아서.. 몇자끄적거려요... 인우둥 잘지내구, 소식 또 알려주시오^^4. 저녁바람
'03.12.30 12:00 AM (211.192.xxx.42)인우둥님의 글이 요새들어 부쩍 나태해진 저를 정신 번쩍나게 하네요.
네... 저 이해해요. 저희 시할머님도 다리 다치셔서 이젠 다시 일어날수 없데요. 그래서 저희 시어머님이 대소변 받아내시고 제가 가서 머리감겨드리는데..
사람이.. 처음에는 할머니 돌아가실까봐 울며 불며 그랬는데 이젠 조금씩 지치고 가기 싫고 그러데요. 할머님 갈때마다 "머릴 뭐하러 감니"그 얘기도 듣기 싫고...
왜 나 말고는 이 짐을 나눠질 사람이 없는지 가끔 화도 나고 그랬어요.
그러니..저희 시어머님은 어떠시겠어요.. 가끔은 어머님이 너무 너무 불쌍하셔서 할머님..그냥..이제는 가셨으면 좋겠다 생각한적 많았어요.
다른 사람은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가는 저를 보고 기특한 손주 며느리라고 하지만..
전원일기 숙이 엄마처럼 아닌데..난 아닌데.. 의무감이 80%인 이일이 너무나 하기 싫은데...그런 생각 많이 하죠.
인우둥이님... 님도 저도 좋은 생각만 하기로 해요. 할머님도 얼마나 외로우시겠어요.
저도..시댁 다녀갈때마다 애절한 눈빛으로 저를 붙잡는 할머님을 보는걸요.
전..늘 투덜거렸는데 인우둥님 저랑은 비교할수도 없게 대견하시네요.5. 솜사탕
'03.12.30 6:00 AM (68.163.xxx.84)인우동님 글이 정말 제 마음 깊이 와닿고 있어요. 전, 인우동님이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무엇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일단 님의 마음이 맑아서 좋은것 같아요. 제 자신을 들여다 보면.. 전 인우동님과 비교하기도 창피한걸요.
왜 어른들의 표현방법 아시죠? 칭찬 잘 안하시는...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뿌듯해 하시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민망해질정도로 칭찬하시는... ^^ 할머님께서는 인우동님이 참 감사하고 대견스럽고 그럴꺼에요. 앞으로 어리광 부리는 예쁜 여우가 되길 바라며... 오늘 글로 툭툭 털어버리세요.6. 정원사
'03.12.30 11:02 AM (218.236.xxx.60)인우둥님 또래의 딸이 있는 저는
지금 인우둥님이 이뻐서..웃음이 나옵니다~
인우둥님..참 이뻐요!7. 꾸득꾸득
'03.12.30 6:23 PM (220.94.xxx.46)인우동 통신원이 그간 바쁘셨군요.
저두 울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짜증부리던 생각이 한번씩 납니다.
엄마처럼 저 키워주신분인데 아직도 그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퍽퍽하게 맺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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