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왔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가을에 다시 오자!
사진을 제외한 글들은 당시 축소 버전입니다.
그때 버전은
여기에서.
달마산 미황사,,,,達磨山 美黃寺
해남군 송지면 소재.
통일신라의 승려 의조가 창건.
좌우는 동백나무숲.
시절은 가을이 되, 상록수 동백으로 가을같이 않은.
성지순례단.
버스 두대에서 우루루 내리네요.
자하루,,,紫霞樓
여기에 서서 진도 앞바다를 보면
자줏빛 노을을.
달마산이 보이고.
중국 해안 지역에서도 달마산이 꽤 유명했나 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달마산 얘기가 나와요.
/고려 고종 1218년 중국 남송의 배가 표류하다 달마산 동쪽 바다에 정박했는데,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하여 마지 않았더니 와서보니 가히 달마가 사실만하다'며 참배를 했다.
그리고 달마산을 화폭에 담아갔다/
달마산( 達磨山)
동서 길이 7키로,높이는 481미터.
호남정맥서 갈라져 나온 땅끝기맥 구간으로,
능선 길을 따라 남행하면 땅끝 사자봉에 이릅니다.
달마산은 대표적인 온대림 지역.
활엽 상록수인 동백나무,사스레피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광나무, 붉가시나무.차나무가 주 식생.
우측으로 두툼한 후박나무 군락지가 유별나고.
친환경 방화수
들어서 사는 자들의 미적 감각을 엿 보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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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보물)
정면,측면 각각 세칸의 작은 전각.
그러나 화기의 달마산에 전혀 기죽지 않고 위풍당당.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 병화로 소실.
완도 명랑대첩지가 지척으로(미황사 보면 정면 우측) 그때 대패한 왜구들이 상륙해 방화했을 터 .
1982년 중수할 때 1754년(영조 )에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니 현 모습은 영조 때 .
고운 피부에 탄력까지.
빛바랜 단청이 어디까지
고울 수있는 지를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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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없이 자연 그대로 300여년을.
여전히 강건하고.
주춧돌엔 게,거북 .
'대웅전=반야용선(般若龍船)'
반야용선은 중생들 태우고 서방정토 극락의 세계로 항해하는 구명선.
석공은 해학과 스킬을 발휘해
탑승 향 한 중생들의 절박함을 표현했다는 .
반야용선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게'
마지막 탑승자 타이타닉 디카프리오가 아니길...
거북은
좌우로 비틀
며 오르려 기를 쓰고
.
자연석 그대로 주춧돌.
대웅전 뒷편.
난대성 상록수림이 많아
여름 느낌이
.
경내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응진전으로 향합니다.
일직선이 아니라 방향을 한번 꺽어주는 여유.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촐하지만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
날개짓을 활짝 펴며
달마산 기세에 맞대응
.
응진전서 바라본 서,남해.
앞바다는 서해, 남해가 만나는 곳.
보이는 섬은 진도.
저 보이는 포구에
신라 경덕왕 (749) 때 경전과 불상을 실은 금인(金人)이 탄 돌배(石舟)가 사자포구(현갈두항)에 나타났 답니다.
의조화상은
경전과 불상을 받아 소 등에 실어
와 절을 지으니 미황사.
美黃寺~~
'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에서,'黃'은 금인(金人)의 황금
에서 유래
.
1692년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
'미황사사적비'에 나온 얘기
.
식욕 돋구는 싱그런 채마밭.
가을의 상징이 몇 있죠.
곱게 물들은 담쟁이덩굴.
수구(水溝)
보이는 곳이 선방 & 템플스테이 거처.
중국 관광객 들도 템플스테이 참여 중이고.
템플스테이 숙소.
되돌아가는 스님.
가을 미황사서 짧은 반나절.
나는 대흥사로.
달마산 중턱서 바라본 미황사.
美,,,黃,,, 맞나요???
미황사엔 보물이 하나 더 있는데 1727년 제작된 괘불탱.
높이 12m, 폭 5m로 기우제 용으로 많이 이용했답니다.
달마산 정상서 괘불탱을 걸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https://www.youtube.com/watch?v=1QBaF9L98Xw
Love gone with autumn behind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첼로버전
&&&&....
달마산 정상서 바라본 미황사
바다 너머는 진도.
공재 고택 일대는 해남 윤씨 일가에서 개간한 간척지로
공재는 간척지에 별서를 짓고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는.
해인길 따라 77번 국도가 지 나는 데 끝이 땅끝 사자봉.
미황사 아래로 저수지 많이 보이시죠?
해안가 일대 지역이 간척지였다는 간접 증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우리나라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
북은 함경북도 은성부로 잡았네요.
삼천리 금수강산!
국토를 정말 사랑했던 육당 최남선이 처음 사용한 조어(造語)입니다.
그는 '조선상식문답'에서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1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은성까지를 2천리,
도합 한반도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불렀다는.
미황사가 아름답고 호쾌한 사찰이지만 관련된 역사적 인물은 많치 않은 이유 .
머나먼 땅끝 변방이라 당연할 터.
(그러나 알고 보면 한반도의 시발점
)
그러나 공재 윤두서 (1668~1715)의 발길은 이어졌 습니다.
공재 대표작품 중 노
승도
(老僧圖)
가 있어요.
노승도 (老僧圖),윤두서, 149.5 × 50.4 cm
지난 4 월 게시 글에서 노 승도의 선승이 미황사 스님 아닐까 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확신이 섰어요 .
사찰 팜플릿 을 보니 명부전 내 10대 시왕을 조각한 사람이 바로 공재 윤두서로 나오네요.
공재는 한양,본가인 녹우당과 백포를 오가며 문사,예인적 삶을 살았는데
특히 대둔사(대흥사) 스님과 교류가 많았다는.
백포리 별서는 미황사와 지척이니 미황사도 자주 들렀을 터.
"공재에게는 아들이 없어 절 근처 은행나무를 베어 10대 시왕을 조각했는데
그 뒤 10명의 아들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내번째 시왕은 실수로 두 눈의 크기를 다르게 조각했는데
그의 넷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승용차로 20여분 거리 대흥사로 달립
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