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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동해 삼척 두타산 무릉계곡

| 조회수 : 5,925 | 추천수 : 1
작성일 : 2016-07-28 03:05:06

 

 

태백시 매봉산 '바람의 언덕'

 

영동 고속도로 빠져나와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탑니다.

제천 나들목을 빠져 나와 38번 국도로 진입하니 제천 부터 38번 국도는 태백선과 맞잡고 달리네요.

태백선이 무연탄 운반을 위한 산업철도라 이후 뚫린 국도도 태백선과 운명을 같이할수 밖에.

버스는 영월,함백을 지나고 정선 민둥산과 두위봉이 만들어낸 협곡을 달리고.

두위봉서 태백시 함백산 까진 이땅 최고 무연탄 산지.

영월,사북을 지나 정선 고한에서 백두대간이 지나는 두문동 고개를 넘으면 태백시.  

그러나 버스는 사북(탄광)에서 28번 지방도로로 빠지고.

구절양장,차는 힘들게 나아가지만 창밖을 보는 사람의 시선은 즐거울 수 밖에.

도로에 바짝 붙은 산기슭은 이미 우리가 상상하는 강파른 두메산골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는.

익숙한 그런 풍경,,, 산기슭을 시원하게 개간한 고랭지( 高冷地) 채소밭 때문이죠.

우측 멀리 태백시 매봉산 '바람의 언덕'의 풍력발전기들이 보이네요. 아래로는 검푸른 고랭지 채소밭도.

고도 1300미터가 넘는 이땅 최고 고랭지 채소밭입니다.

바람이 하도 거세 일명 '바람의 언덕'으로 불리죠. 그 위로 백두대간이 달리고.

 

삼척시 하장면 광동댐~~

우측으로 광동댐이 보이네요.

한강의 시원인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수.

물은 골지천을 잠시 흐르다 최초로 머무르는 곳이 이곳 광동댐입니다.

이번 산행지 동해시 두타산 남서 기슭의 물도 여기에.

광동댐은 태백시,삼척시,정성군,영월군 생활용수에 농업용수로 사용.

한강 상류엔 팔당댐,청평댐,충주댐,소양강댐만 있는게 아닙니다.

횡성댐,괴산댐에다 광동댐도 있죠. 광동댐은 한강 최상류에 위치하고.

 

 

귀네미 마을, 배추고도~~

 

바람의 언덕,배추고도는 지금은 태백시지만 예전엔 삼척군으로 1980년에 떨어져 나갔고.

우측으로 해발 1100m의 귀네미 마을 이정표가 보이네요.

치마고도를 패러디 해 일명 '배추고도'로 불리는 곳.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아 우이령(牛耳嶺)이라 불리기도.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모두 수몰 이주민. 1980년대 후반 광동댐 건설로 고향을 떠나 터를 잡은 곳이 이곳.

화전민 후예답게,그들은 원시림으로 울창했던 백두대간 아랫턱을 개간해 고랭지 배추밭으로 일군거죠.

바람의 언덕,배추고도는 모두 다 백두대간 길목이니 '정서의 맛' 까지 더합니다.

 

백두대간 댓제(840)~~

산행 시작 댓제에 도착했네요.서울 떠난지 3시간 30분.

백두대간 길목으로 삼척시 동해안 사람들과 하장면,정선 임계면 사람들이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넘나들던 곳입니다.

큰 재라는 뜻,혹은 인근에 산죽이 많아 불리운 이름.

여기서 부터 백두대간은 두타산 지나 백복령(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국도) 까지는 29키로,사이에는 찻길은 없습니다.

댓재 바로 아래에는 산신각이 있네요.고개를 넘나들며 무사안녕 치성을 드렸겠죠.

예전엔 주변에 양조장,마구간 등도 있었고.

 

등산로 초입~~

30년 전만 해도 걸어서 넘는 재였을 뿐.

그러나 지금은 28번 지방도로가 뚫려 옛 자취는 사라졌고 백두대간 종주 산꾼들만 찾고 있습니다.

 

정선군 임계&삼척시 하장~~

임계면은 이 땅 감자 생산 75%를 담당하는 '감자 마을'이니 임계야 말로 진짜 강원도인게죠.

광동댐이 있는 하장면은 삼척시 내륙 서쪽 끝입니다.

이곳 댓재에서 오십천 북쪽 동해안 까지는 삼척시 미로면.

 

여기서 두타산 정상 까지는 6키로.

정상에서 청옥산 거쳐 학등을 타고 내려와 무릉계곡 삼화사로 하산할 예정입니다.

태백산~만항재~함백산~은대봉~금대봉~매봉산으로 북진하던 백두대간은

삼수령,일명 피재에서 정남으로 낙동정맥을 떨군 후 다시 북진합니다.

(三水領은 한강,낙동강,오십천이 갈리며 동시에 동해,서해,남해로 흐르는 곳. 삼수령 바로 위가 매봉산 '바람의 언덕')

다시 구룡산~건의령~구부시령~덕항산(1070)~큰재~황장산(975)으로 북진한 대간 길은

두타산,청옥산,백복령을 향해 달리는 데 그 사잇 고개가 바로 댓재네요.

환선굴은 바로 덕항산 자락 남사면에.환선굴 뒷 능선을 넘으면 바로 귀네미 마을.

그러니 백두대간 길이 환선굴과 귀네미 마을을 가른다는.

 

고도가 800을 넘는지라 습한 냉기로 상쾌하고.

 

쭉쭉빵빵 황장목(금강송)들.

 

30여분 오르니 햇댓등~~

아래 산신각에 치성드리러 온 사람들이 이곳에 대나무 횟대를 세우고 산신령에, "저희 왔어요!" 하며 고했던 거죠.

눈 침침한 산신령,잘 보시라고 대나무 횟대 끝에는 오색천을 달았을 거구.

 

한여름은 누가 뭐래도 전원교향곡이 으뜸이죠.

베토벤은 일찍 기상해 60알의 커피콩으로 모닝 커피를 만들고 신문을 본 후 오후 2시까지 작곡을.

이후에는 산책을 즐겼는데 늦은 밤중까지 계속될 때도. 교향곡 6번 '전원'에는 자연에 대한 사랑이.
특히 평생 동안 사랑했던 빈 교외 하일리겐슈타트 숲에 대한 베토벤의 기억이 묻어난 곡.

Beethoven Symphony No 6 in F Major, op 68 "Pastoral"

https://www.youtube.com/watch?v=fNXCZXrlX7I

 

저 능선 길을 탑니다.

햇댓등에서 두타산 정상까지 5,5키로.고도를 450m 정도 끌어올리는 길이지만 그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부침도 심하진 않지만 땀을 흘리며 진득히 걸어야 이를수 있는 곳.
두타(頭陀)는 고대 인도어로 닳고,씻고,버린다는 뜻.

'두타행'이라고, 나중에는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닦는 수행을 일컬었고. 

'산행'이 '수행' 보다 좋은 점은?

누구나 땀을 흘리면 정상을 만날수 있다는 점이겠네요.

그래서 두타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바로 두타행 아닐런지...

아니어도 좋고,적어도 신체 건강은 보장이니.

 

 

노루 오줌~~

누구는 뿌리에서 노루의 오줌 냄새가 난다하여.

누구는 노루가 물 마시러 오는 물가에 핀다하여.

 

일부 산길은 해묵은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

 

멀리 두타산.

 

 

우측으로 동해가 보이고.

경동지괴(傾動地塊)라 배웠네요.

한쪽은 급한 단층애가 생기고 반대 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대표적으로 태백산맥 지형을 말하죠.

오늘 산행 길이 전형적인 경동지괴 지형입니다.

그러니 지금 난,

백두대간을 타고 경동지괴형 지형을 남에서 북으로 북진합니다.

등산 길 왼쪽은 서쪽 영서지방이요,우측은 동해안 영동지방.

내 위로는 막힘이 있을 수없고 고도 또한 1000미터가 넘는지라 선선한 바람은 샘솟는 이마의 땀을 닦아줍니다.

 

미로면(未老面)입니다.

미로면은 삼척시 남서 지역으로 등산로 초입 댓재 까지.

참 많은 사연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무척 흥미로운 고장.

1)조선 왕조 창업의 모태 준경묘,영경모가 있고

2)고려 왕조의 끝 공양왕이 피살되어 뭍힌 공양왕릉이 있으며

3)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투항 후 왕건이 경순왕 손자에 쥐어준 실직국이 있었고

4)단군신화로 대동단결!!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천은사도,

5) 관동별곡의 죽서루,

5) 남인 영수 미수 허목과 서인 영수 우암 송시열에 얽힌 당쟁의 이면사가 여기에.

 

두타산 까지 백두대간은 바투 동해에 붙혀 달립니다.

백두대간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 잡은 구간은 건의령에서 두타산에 이르는 30여km.

그 산능선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 두타산.

 

두타산 자락의 준경묘.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 5대 조인 이양무 묘로 인근은 이땅 최고 금강송 군락지.

이양무는 고려 의종 때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권을 수립했던 이의방 동생인 이인의 손자입니다.

묘를 쓴 사람은 이양무의 아들이자 이성계의 증조부인 이안사(李安社).

무신란을 주도했던 이의방의 동생인 이인(李隣)은 1174년 형이 피살되자 전주로 낙향했는데 이안사는 그의 손자입니다.

전주의 토호가 된 이안사는 관기를 둘러싸고 산성별감(山城別監)과 크게 싸운 후 가솔과 주민 170여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야반도주.

그러나 얼마 뒤 이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전주에서의 그 산성별감이였다는.

이안사는 1290년(충렬왕)에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하여 덕원부(德源府),즉 의주로 옮겼고.
삼척뿐만 아니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고려 정부는 회유책으로 그를 의주 병마사로.

이후에는 원나라 관직도 받고 서여진족까지 다스리는 세력으로 성장, 그 기반은 증손자 이성계까지 이어집니다.

이렇듯 준경묘를 쓴 이안사는 조선을 건국할수 있게하는 물적,인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

 

'백우금관(百牛金冠)'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니.

목조로 추증된 이안사가 삼척으로 도망 와 살던 중 아버지 이양무가 죽었고.

목조는 묘자리를 찾기위해 산속을 헤매다  잠시 쉬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 이르고 사라지기를,

"5대손 안에 왕이 탄생할 명당이니 개토제 때 흰소 1백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황금 널을 쓰라!" 고.

가난한 목조는 슬기를 발휘해  소 1백(百) 마리는 흰소(白)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황금색의 귀리짚으로 대신해 장사를 지냈다나.

 

영경묘~~

준경묘에서 1키로 지점으로 이양무의 부인묘입니다.

궁벽한 삼척이 군,현이 아닌 삼척부(현 市)가 된 데는 이런 이유 때문.

준경묘,영경묘 주변 금강송들은 유명한 만큼 늘 위태롭네요.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때도 이곳 소나무를, 한국전쟁 후 숭례문 복원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지난 2006년 광화문 복원 때도 97그루가 잘려나갈 위기에 처했으나 전주 李씨 문중과 주민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그러나 최근 숭례문 화재는 비켜나지 못하고 복원에 90여 구루가 잘려나갔습니다.

금강송은 울진,봉화,원주도 유명.

 

공양왕릉.

총4기로 공양왕릉 외에 2기는 두 왕자, 나머지 하나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 전하고.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죠.

고려의 마지막 왕,그리고 그 왕을 척살한 태조 이성계의 선대 묘가 20리를 두고 있으니.

이성계가 허수아비로 세운 우왕,창왕에 이어 최종적으로 세워진 왕이 공양왕.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잡혀 먹히는 법, 공양왕도 원주를 거쳐 동쪽 끝 간성으로,다시 삼척으로 유배를.

1년도 안되 왕비,두 아들과 함께 살해. 연유로 인근에 궁촌리,살해재라는 지명이 생겼습니다.

공양왕릉 옆 해수욕장 이름도 궁촌해수욕장이네요.

 

반면 준경묘와 영경묘가 있는 지명은 미로면 활기리. 황제가 태어난 터라는 의미의 황기(皇基)에서 활기리로.

'살해재 대 황기',,,패자와 승자가 이리 분명하네요.

그런데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도 있는데 고양시와 삼척시가 서로 원조라며 우기고 있죠.

고양시 주장은 바로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무덤곁에 잇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세종실록 구절에 근거.

삼척시 능은 민간에서 전해오는 것이나 둘 다 조선시대 문헌에 남아있기 때문.

삼척시 왕릉에 대한 기록은 1662 삼척부사 허목이 쓴 '척주지'에 나오네요.

주민들은 3년 마다 공양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남아있고.

살해 후 증명으로 머리를 개경으로 가져가 머리는 고양에, 몸뚱이는 삼척에 뭍혔다고 절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왕권이 확립되면 복권으로 현 권력자의 덕을 찬양하며 새왕조의 기반을 넓히죠.

공양왕도 이성계 아들 태종 이방원에 의해 복권.

종로5가 종묘는 조선조 왕과 비의 위패가 모셔진 곳, 그 종묘에 공양왕 위폐가 모셔져있다면 믿겠나요?

한쪽 끄트머리에 있는듯 없는듯 있습니다.두 왕조의 연장선을 공왕왕 위패로 연결한 것.

조선은 5백년 고려 왕조를 이었다는 상징성으로.

 

등산로 따라 미역줄 나무도 보이네요

 

산조팝나무~

 

두타산 정상이 보이네요.

우측 아래가 삼척시 미로면입니다.

未老인데 원래는 眉老였다 네요.

이같은 지명 변천엔 사대부들의 탐욕과 당쟁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예전 삼척 사람들은 전통으로 탑본 하나를 집에 걸어두었다네요.

삼척시 정라항 옆 육향산에 있는 예서체로 쓰여진 진동비(鎭東碑) 탑본입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라고도 하는데,척주는 삼척의 옛 이름.

비(碑)는 해일의 피해를 막아달라며 동해 신(神)을 예찬하는 내용.

비문은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이 삼척 부사로 있을 때 썼습니다.

 

미수는 남인의 대장이였고,우암 송시열은 노론의 대장으로 둘은 용호상박했죠.

둘의 용호상박은 조선 당쟁의 서막이기도. 미수와 우암은 예송논쟁을 서막으로 피튀기게 싸우기 시작합니다.

왕의 할머니가 죽었는데 '왕은 상복을 1년 입네,3년 입네',,,하는 것.

말이 '예송논쟁'이지 권력 투쟁. 이들의 예송논쟁은 이후 기나긴 권력 투쟁의 전주곡.

미수 허목이 삼척 부사로 있을 즈음 그의 호를 따  미로(眉老)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후 반대파가 부임하면서 아닐 미(未)로 바뀌였고.지금은 未老입니다.

 

 

초롱꽃.

비슷한 거로 금강초롱,섬초롱이 있습니다.

그런데,,,그런데.

 

초롱꽃 옆으로 독사가~~

 

우측으로 동해를 바라보고 1천 미터가 넘는 고도의 능선길을 따라 '두타행' 두시간 여.

습기를 머금은 선선한 바람이 그렇게 상쾌할수가 없네요.

통골목 도착~~

통골 고개라는 뜻. 댓재와 두타산의 중간 지점으로 쉬어가기 좋은 곳.

그러고 보니 댓재, 햇댓등, 명주목이, 통골목이,,,,지나온 곳마다 지명이 옛스럽고 정겹습니다.

통골목이에서 두타산 전위봉 격인 1243봉까지는 가파른 오르막.

그러나 1243봉에 이르면 너머는 천상의 화원이 펼쳐집니다. 

부드러운 능선 위 길섶에선 꽃들이 갈 길 바쁜 발목을 붙잡죠.

 

1200미터~~

저 망자, 크게 외롭지는 않을듯.옆으로 백두대간 길이.

 

 

여름 산의 보물은 계곡 말고도 높은 능선에도 있습니다. 

1000m가 넘는 산은 서늘한 공기를 내뿜고,길섶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하죠.

 

 

초롱꽃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 금강초롱.

설악산과 금강산 일대에 가장 많이 자라는 금강초롱. 두타산은 금강초롱 남쪽 경계선입니다.

동해쪽 남쪽으로는 이곳 두타산, 내륙 쪽 남쪽으로는 원주 치악산, 남서쪽으로는 양평 용문산과 유명산이 경계선.

 

길섶을 뒤덮은 미역줄 나무 줄기들~~

아직 만개하진 않았고.

 

만개하면 길목이 향기로 진동하겠네요.

습한 지역이라 향들이 흩어지지 않고 아래로 깔립니다.

 

 

후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금방 과거의 경험으로 되돌리죠.

수년전,새벽녁 설악산 끝청 아래 미역줄 군락지를 지날 때 그 진동하는 향내를 잊을수 없다는.

 

만개하면 이리.   

                               

 

 

박새도 흰꽃을 피웠네요.

으악새가 새가 아닌 억새이듯, 박새도 새가 아닌 여름꽃입니다.

 

 

 

기린초~

중국에서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의 뿔과 기린초의 잎모양이 닮았다고 해서 기린초라.

 

 

신갈나무 군락지.

정상이 가까옵니다.

 

 

요강나물~~

요강같이 생겨서. 나물이나 독성이 있어 삶은 후 식용으로.

산에 다녀보면 특이하게도 검정꽃 둘을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습니다.

요강나물과 검종덜굴.둘은 색깔 뿐만 아니라 씨방 맺는 것도 비슷해서 헷갈린다는.

 

검종덜굴.

검고,종모양에 덩굴식물이라는. 덩굴손 보이시죠?

 

씨방을 맺고있네요.

결국 아래 사진처럼.

결국 민들레 홀씨처럼 이리 독립하네요.

요강나물과 종덩굴은 씨방까지 비슷.

늘 '서둘러 산행'인지라 진득하게 사진 찍을 수도 없는 처지라 귀가 후엔 늘 검색이 필수입니다.

이때 재학습에 사진을 가져오기도.

 

 

병조희풀.

병같이 생긴 조희풀이라는.

피면 이리됩니다.

사진은 지난 24일 방태산 아침가리골에서.

그리고 이름은 병조희풀로 불리지만 실은 나무입니다.

 

병조희풀 씨방.

병조희풀 씨방도 요강나물,검종덩굴처럼  이리 비슷하다는.

 

덩굴손이 있는 거 보니 검종덩굴이겠네요.

 

네잎 갈퀴나물~~

비슷한 거로 나비나물이 있습니다.나는 이 또한 헷갈리고.

(꽃잎의 모양이 마치 나비처럼 생겼다고 해서 나비나물)

             

 

 

서남사면~~~

멀리 백두대간 길 함백산,매봉산,덕항산이 보이고

 

우측으로 청옥산이 보이네요.

정상이 지척.

 

'높고 깊은 산을 보려면 두타·청옥으로 가라!'

 

두타산(頭陀山 ·1,352m)과 청옥산(靑玉山·1,403m)은 덩치가 크고 높죠.

낙타 쌍봉처럼 솟구친 두 봉은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해 조망 또한 대단합니다.

그러나 차이는 있어 청옥은 전형적인 육(肉)산, 두타는 골(骨)산에 가깝고.

특히 두타산 정수리에 서면 부드럽게 휜 두타~청옥~고적대에서 백복령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환상입니다.

정상에 서면 동해시,삼척시,동해는 물론 태백 함백산,정선 가리왕산,평창 오대산에 이르기까지 강원 내륙의

고봉준령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운이 좋아 쾌청한 날이라는 조건 하에. 

청옥산의 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7가지 보석 중 하나.

혹자는 두타가 수행의 산이라면 청옥은 극락의 산이라네요.

그러면 두타에서 청옥에 이르는 4키로 능선 길은 극락에 이르는 길일 터.

그러나 난,그 극락길을 포기하고 두터선성 길로 하산합니다..

청옥산과 두타산을 잇는 능선은 마치 거대한 횃대 같다여 ' 옷걸이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의가등(衣架嶝)이라 불리기도.
청옥산과 고적대 사이의 연칠성령(連七星嶺)은 글자 그대로 새기면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로 이어지는 고개라는 의미.

그러나 동쪽 무릉계곡에서 서쪽 하장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7개의 등성이가 있다고 하여 지어진 것. 

 

그런데 두타산,청옥산 두 산이 언제부턴지 그 이름이 바뀌었네요.

지금은 최고봉인 1,404m봉이 청옥산, 그 동쪽 1,353m봉이 두타산.

그러나 대동여지도에는 최고봉인 청옥산이 두타산, 현 1353m봉인 두타산이 청옥산으로,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에 무릉계곡이 위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산경표에도 태백산 향해 남하하는 백두대간 상의 순서를 백봉령→두타산→청옥산→죽현(竹峴·댓재)으로 언급하고.

 

두타산 ( 頭陀山·1355m)과 청옥산 (靑玉山·1403m)은 백두대간의 주 능선상으로  동해시와 삼척시에 걸쳐있습니다

둘은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쌍둥이처럼 마주하죠.

또한 둘은 합작으로 무릉계곡을 만드는데 무릉계곡은 설악산 천불동계곡, 내연산 보경사계곡, 오대산 청학동 소금강과

더불어 동해안의 4대 명승지.

골이 깊으면 산도 높고, 골이 절경인데 산세가 평범할 리가 없죠.

산을 즐기는 사람에게 청옥,두타산은 1년에 한 차례 찾지 않으면 근질근질 할 정도로 사랑받는 명산.

 

두타,청옥산은 한강의 시원이기도.

물줄기 중 북동 방향으로 흘러 동해시의 전천으로 흐르고,

남서쪽 물은 정선군 임계면 골지천에 합류한 후 아루라지서 다시 구절천을 만나 조양강을 만듭니다.

조양강은 영월 동강으로 흐르고,동강은 영월읍에서 원주 치악산과 평창 오대산서 흘러온 서강을 만나 남한강을 만드네요.

동쪽 기슭의 물은 삼척시의 오십천으로.

 

 

1300미터가 넘는 두타산 정상에 봉분이???

후손발복을 향한 욕망에 경의를....

 

능선 대간길 우측은 영 동,너머는 영서.

 

청옥산이 운무에 가렸고.

늘 그러하지만 일정이 바뀌었네요.

애초 두타산~박달령~청옥산~학등 거쳐 무릉계곡으로 하산 예정이였으나  시간상 두타산성~무릉계곡으로 변경.

두타와 청옥은 오르기 무척 힘듬니다.두 개 중 하나만 올라갔다 와도 꼬박 8시간이.

두 봉우리를 한번에 밟으려면 적어도 10시간 넘게 걸리니 하루에 둘러 보기에는 무리.

두타 정상서 20분쯤 내려오니 왼쪽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트이네요.

청옥산,고적대로 이어진 백두대간 마루금 조망이 두타산 정상에서 보다 빼어납니다.

우측 사면이 무릉계곡으로 용추폭포,쌍폭포의 비경을 연출하면서 동해로 흘러들어가고.

 

두타산은 백두대간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산세를 가진 곳~~

보시기에 명성에 걸맞나요?

 

무릉계곡과 쉼움산 (688) 갈림길.

같은 산이라도 누군 등산하고,누군 답사하고,누군 유람하고,누군 관광합니다.

산도 다 산이 아니어서 등산에 좋은 산,답사에 좋은 산,유람에 좋은 산이 있죠.

두타산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췄습니다.인문적으로 특별해 답사의 산이기도.

두타산 지맥인 쉼움산엔 이승휴(李承休)가 말년에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한 천은사가 있어서죠.

 

쉰움산(688) 정상.

두타산 산허리에 있는 산으로 '五十井'으로도 불리고.정상에 우물같은 홈이 저리 50개나 있습니다.

쉰움산은 지금도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곳으로 유명. 쉰움의 움은 움푹 들어갔다는 뜻.

쉰우물산, 곧 오십정산(五十井山)을 척주지(陟州誌)에서는 이리 언급하네요.
"흑악사(黑岳寺·현 천은사) 위쪽에 오십정산이 있다. 암석 위에 돌웅덩이가 50개인데, 깊은 것은 이끼 색이 짙고 물이

맑아서 신정(神井)이라 한다. 가물면 이곳에서 비를 빈다. 풍속에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대대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조선 시대에는 '두타산 신사'를 이곳에 두고 봄·가을로 제사를.
그 쉰움산 기슭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에 천은사(天恩寺)가 있습니다.

천은사(天恩寺).

 

고려 충렬왕 때 동안거사 이승휴가 머물렀던 곳으로 서산대사가  중건.

1899년 이성계의 5대조 준경릉이 미로면 활기리에 있음을 확인하면서 천은사를 원당 사찰로 삼았고.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천은사(天恩寺)라 개칭한 것. 천은사에서 직선 20리 거리에 준경묘가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승휴가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이곳에서 집필했다는 점.

이승휴는 대몽항쟁기를 산 지식인이요, 삼국유사에서 조차도 놓친 발해사를 최초로 언급한 선각자.

나아가 고려의 뿌리로서 단군을 역설했고.

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13년(1287),두타산 거사 이승휴가 64세 되던 해에 두타산에 은거하며 집필.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부터 잡은 최초의 사서.

상하 2권으로 상권은 중원의 역사를 칠언시로, 하권은 1·2부로 나누어 단군부터 고려 충렬왕까지를 서술.

원래 부여·고구려·신라 등은 각각의 시조설화를 갖고 있었으나,

그는 시례(尸禮)·고례(古禮)·남북옥저·동부여·예맥부터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까지 모두 단군의 후예로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는 낙향 후 이곳 두타산 자락에 용안당(容安堂)이란 별장을 짓습니다. 

또 삼화사에 있는 대장경을 빌려다 읽었는데,10년만에  완독하였고.

용안당의 '容安'은 도연명(365-427)이 귀거래사에서 '집은 무릎을 펼만한 공간만 살필 뿐'

이라는 용슬이안(容膝易安)에서 딴 당호.

후에 그는 용안당을 승려에게 희사하여 ' 대장경을 보던 곳'이라는 의미로 간장암(看藏庵)이 되었고.
현재 이곳은 사적 제421호로 지정.

위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안축의 기문에 근거합니다.

/이승휴는 당초에는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대개는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천성이 불도를 좋아하고 늙어서는

부처를 섬김이 더욱 근엄하였다. 이에 별장을 지어 거처하였다. 이 산에 있는 삼화사에 가서 불경을 빌려 날마다

열람하였고, 십년 만에 읽기를 마쳤다. 그 후에 그 별장을 절에 희사하고 현판을 간장암(看藏庵)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왜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집필했을까??

이는 그 시대적 배경을 살표보면 명확해지네요.

이승휴(1224~1300년)는 무신정권 말기에 태어나 원종과 원나라의 첫 부마가 된 충렬왕(1274~1308년) 시기의 관료.

29세 과거에 합격.관직을 받은 것은 41세 때.이후 10여년  강직한 성품으로 좌천되기도.

관직에 처음 나갈 때는 무신집권 말기 몽고 침입 시기.

당시 강화도에서 환도한  무신정권은 몽골에 엉청난 조공과 여자를, 일본 정벌용 선박 9백척을 만들기도.  

이 시기 이승휴는 서장관이 되어 두 차례 원나라 수도인 북경(北京)에 다녀왔습니다.

서장관은 외교적으로 대응하는 글을 짓고 참모 임무를 수행하는 중요 직책.

한번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파견된 사신단으로,

또 한번은 원종이 죽자 이를 알리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이때 원종의 태자인 후일의 충렬왕은 2년 간 원나라에   가있었고 원나라 세조의 딸을 왕비로.

이승휴는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왕위에 오른 충렬왕을 모시고 고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충렬왕을 중흥의 군주로 만들어 고려 왕조의 앞날을 모색하려했네요. 

그러나 실패하고 고향인 삼척 두타산으로 낙향.

이후  심혈을 기울려 집필한 게 바로 제왕운기(帝王韻紀)입니다.

이는 충렬왕에게 받치는 일종의 역사의식 고양서.

두 권짜리 시로 지어졌으니 지금으로 치면 노래 가사인 셈.

상권은 중원의 역사를 2,370자로,하권은 단군 이래부터 고려왕조 까지 2,170 글자로.

시를 운에 맞춰 지은 것은 리듬을 따라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한 것.  

 

그는 고려왕조를 지켜야할 정신적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먼저 이땅의 지리적,역사적 특성을 노래했습니다.

첫 머리에 요동,즉 요하 이동은 중원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천하로서 중원과 구별됨을 주장.

또 조선은 사방이 천리에 달하는 국가로 하늘이 준 강산의 형세가 이름난 곳이며,  

개국 시조는 하늘의 손자인 단군으로 부여와 고구려,신라가 모두 단군 후손이라 강조.

제왕운기에서 '제(帝)'는 중원의 지배자를 '왕(王)'은 고려의 통치자를 의미.

당시 원나라와 공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원의 역사를 서술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런데 그의 단군신화와 일연의 단군신화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승휴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손녀를 사람으로 만든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일연은 환웅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壇君이요,제왕운기는 檀君.

단군의 개국 연대도 둘은 다르고.

조선왕조가 편찬한 동국통감,동사강목등에서는 제왕운기의 내용을 채택.

이는 승려 일연이 아닌 유학자 이승휴를 계승한다는 뜻이네요. 

이는 19세기 말 근대민족주의를 거치면서 우리민족이 단군의 후손인 배달민족이라는 설로 이어졌고.

광복 후에는 단기를 설정하는 근거가. 여기에 천손 후예는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로 반영되었습니다.

 

제왕운기 하편~~

이승휴 호가 두타산 거사임을 알수있네요.

하편 첫부분를 옮겨보면 이러합니다.

 

遼東別有一乾坤(요동별유일건곤) : 요동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

斗與中朝區以分(두여중조구이분) : 두드러져 중국과 구분되어 나누어져있네.

洪濤萬頃圍三面(홍도만경위삼면) : 큰 파도 수 만 이랑 삼면을 두르고

於北有陸連如線(어북유륙연여선) : 북쪽에 육지 있어 실처럼 이어져있다.

中方千里是朝鮮(중방천리시조선) : 가운데가 천리이니 이 땅이 곧 조선이니

江山形勝名敷天(강산형승명부천) : 강산 좋은 경치 그 이름 천하에 알려졌다

耕田鑿井禮義家(경전착정예의가) : 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이라

華人題作小中華(화인제작소중화) : 중국 사람들은 작은 중화라 부른다네.

初誰開國肇風雲(초수개국조풍운) : 누가 나라 열어 풍운을 열었는가.

釋帝之孫名檀君(석제지손명단군) : 천제의 손자, 단군이라 불렀다네.

 

이어서,

궁예,견원 등 후삼국 까지 포함해 고려 충렬왕 까지 단군 이래 조선 역사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리.

臣承休謹記(신승휴근기) : 폐하의 신하 이승휴는 삼가 기록합니다. 

제왕운기의 집필 이유가 충렬왕에 대한 역사 의식 고취임을 알수 있네요.

제왕운기 하편,단군 이래 고려왕조 까지 역사인 2,170 글자를 요약하면 이리.

/고려는 뚜렸하게 중국하고 구별된다. 석제의 자손 단군으로 대동단결!/

그러니 왕께서는 정신 바짝 차리고 고려의 정체성을 세워나가십시요!

 

 

우측으로 하얗게 절개된 곳이 쌍용 시멘트.

그 앞으로 동해시~정선군 임계면을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갑니다.

 

두타산성의 흔적~~

 

백두대간 능선

 

일대는 금강송 자생지.

쭉쭉빵빵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 .

 

곳곳에 걸린 폭포와 아름드리 금강송은 두타산의 자랑.

흔히들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 함께 살고,죽어서도 소나무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하죠.

태어날 때 금줄에 솔잎을 걸고,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소나무로 만든 칠성판을 진다는.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요즘은 정색하고 할 말은 못됩니다.

요즘 그렇게 살다 갈 수 있는 사람은 1%도 못미치니.

소나무는 양수입니다.

그러다 보니 잎 넓은 큰키 나무인 참나무,서어나무 등에 밀려 늘 정상으로 쫏기는 운명.

그러나 여기서 보면 그것도 아닌듯. 계곡서 정상 까지 온 산이 금강송 천하입니다.

 

금강석 같이 단단해서 금강송(金剛松),줄기가 황갈색을 띠여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죠.

그런데,'松'이라?

송(松)은 나무(木)에 공(公)이라는 인품은 부여받은 거.

묘 주변에 쓰는 소나무를 도래솔(丸松)이라 부르는데 소나무는 죽은 영혼을 위무한다고 여겨서.

소나무에서 부는 바람도 송뢰(松뢰)라며 다른 나무와 차별하네요.

 

 

1미터가 넘는 아름드리 소자무가 비바람에 찢어져 나갔고 .

참나무로 천이가 끝난 산에서도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많은 걸 흔히 볼 수 있죠.

잘 가꾸면 됩니다.

 

 

두타산성 흔적들~~

 

 

 

 

산성 12폭포~~

 

 

두타산,청옥산 지나 연칠성령~망군대~고적대~갈미봉~이기령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

아래가 무릉계곡.이쪽은 영동,너머는 영서지방.

 

조선 중기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성암(省菴) 김효원(金孝元·1532-1590)이 있었으니~~~

그는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서 두타산을 이리 평하고 있네요.

 

/천하에 산수로서 이름난 나라는 우리나라만한 데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산수로 이름난 고을은 영동만한 데가 없다.

영동의 산수 중에서도 기이한 형승으로 이름난 것은 금강산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두타산이다.

산의 근원이 백두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달려와 철령이 되고, 금강산이 되고, 대관령이 되었으며

구덩이처럼 움푹 파인 곳은 계곡이 되고, 우뚝 솟은 것은 산봉우리가 되었다. 우뚝 선 것, 급하게 기울어진 것,

높고 험한 것, 탄탄하게 뻗은 것 거의가 한두가지 형상으로 는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두타산은 실로 삼척부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골짜기의 깊음과 수석의 기이함이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다/

 

개인적으로 눈에 확 띄는 문구가 있습니다.

/산의 근원이 백두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달려와 철령이 되고, 금강산이 되고, 대관령이 되었으며~~/

김효원도 조선 의 근원은 백두산이요, 그 골격이 백두대간임을 인식하고 있네요.

산경표 개념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게 아니라 식자층엔 당시 광범위한 시대적 인식이였다는.

 

저분들 위치에서 아래를 보면 12산성 폭포가 훤히 들어다 보입니다.

아래와 같이~~

  

수량이 적어 아쉽고.

 

어! 그런데 거북이 한마리가 폭포에서 기어오르고 있네요.

보이시나요?

 

거북바위.

그러고 보니 여수 돌산도 향일암의 금오산 거북은 한발을 바다에 담그며 바다로 기어들어간 형상.

 

 

백곰바위.

반대로 곰은 폭포로 향하고

 

코끼리 바위~

목마른 코끼리도 폭포를 향해.

 

 

 

아래로 무릉계곡~

 

 

학소대(鶴巢臺)~~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은 1661년 6월 두타산에 유람하고 '두타산기'를 지었는데,

그는  두타산기에서 일대 경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네요.

/폭포수가 흐르는 바위를 천주암이라 하고,그 앞산 봉우리에는 옛날 학의 둥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학이 오지 않은

 지가 60년이라고 한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암(指祖庵)을 유람하였다. 지조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그 속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쪽으로는 옛 성(城)이 보인다./

여기서 옛성은 두타산성이요, 지조암은 지금의 관음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미수도 6월, 나도 6월이네요.

 

무릉정공 최윤상이라는 사람이 남긴 '무릉구곡가'의 '학소대' 편은 애잔합니다.

/맑고 시원한 곳에 내 배를 띄우니, 학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대는 비었네.

 높은 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누가 죽었기에????

 

좌끝이 청옥산,중앙이 고적대, 그 사이가 연칠성령~~

학등이라??

옛날 어느 선비가 학소대에서 종이로 학을 접어서 날렸습니다.

그 종이학은 진짜 학이 되어 날아가 청옥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의 산등에 앉았고.

그 학이 앉았 던 산등성 이를 '학등'이라 불렀습니다.

오늘 예정대로 청옥산으로 향했다면 난 저 학등을 밟고 하산했을 터.

 

 

주상절리

수평으로 나뉘면 판상절리.

 

 

 

관음사가 보이네요

두타산성과 관음사 사이의 무릉계곡 일대를 '허공다리'라.

임진왜란 때 왜군의 공격에 맞서 의병들이 계곡 양편 사이에 줄을 매고 허수아비 신장을 매달아 오가게 해

왜군들을 놀라게 했다는 얘기가.

 

관음사~~

 

미수 허목도 학소대 거쳐 저 관음사에 들어갔죠.

'두타산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 바위너덜 위로 1백 보쯤 가서 중대사(현 삼화사 윗쪽)를 지나가면 바위벼랑을 더위잡고 기어오르게 되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가 없다. 학소대(鶴巢臺)에 와서 쉬었는데, 이곳에 이르니 산세가 더욱 가파르고 쭈뼛하여,

해가 높이 솟아올랐는데도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산(指祖山,현 관음사)에서

구경하였다. 이 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에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석굴 속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으로는 옛 성(현 두타산성)이 보인다.  물줄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옛날 상원암(上院庵)의 황폐한 터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고려 때 이승휴의 산장이었다고 한다./

 

미수허 목의 두타 산행 루트입니다.

저곳이 종점이니 실은 전체 두타의 1/20도 못미쳤네요.

 

그러면 옛 사대부들은 산길을 걸어서 갔을까요???

아뇨!! 대부분 가마 타고 갔답니다 .

아래 김홍도 그림에 나오듯 앞뒤로 둘이 끄는 남여(藍輿) 타고.

김홍도 관인원행(官人遠行)

사대부가 남여를 타고 고갯길을 오르고 있네요.

 

남여 타고 금강산 관광에 나선 사이토 총독과 총독 부인~~

총독의 면상이 혐오스럽고.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도 금강산 여행시 남여를 탔습니다.

 

그러면 산수유람 시 그들의 이동 수단은?

걷는 경우도 있었지만 양반들이 걷기를 즐길리 없죠.

말을 타고 유람길에 나서는 게 일반적이였고 나귀나 소는 보조 수단.

노복에 경마를 잡히고 산까지 다다르 면 등정은 가마를,특히 남여를 타고 올랐습니다.

그 상징적인 그림과 사진이 있는 데 김홍도의 '관인원행'과 사이토 총독이 금강산 유람 때 찍힌 사진 한장.

'만권을 책을 읽고 만리를 걷는다'는 사대부 얘기가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걷는데 인색했습니다.

명산 내 사찰에는 각자승 외에도 가마잡이 승려가 상주하고 있었다는.

금강산의 경우 각 사찰마다 구획이 정해져서 현직 관료,사대부들의 유람을 도왔고.

그 피해는 인근 주민들 까지 이어져 금강산 이르는 길목의 백성들의 원성이 극심했습니다.

산길에서 남여를 메야하는 승려들의 고생이야 이루 말할수가 없을 터 .

 

조필감은 동행기(東行記)에서,

"/ 남여를 멘 중들이 매 백보마다 한차례씩 가마를 바꾸어 메는데,숨이 차서 마치 씩씩거리는 소처럼 땀을 흘리고 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사사로이 위엄을 부려 백성에게 강제로 가마를 메게한다.밭두둑에 있는 백성을 잡아다가 개와 닭을 몰듯 빰을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끄니 백성의 고생이 만가지 형상이다.수령은 이를 알아서 엄하게 금지하고 내 자제부터 고갯길을 걸어서

  넘게 해야한다"/ 고 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엽은 금강록(金剛錄)에서,"금강산에서 남여 타고 유람하는 것은 양사언 부터다" 주장하고 있네요.

양사언의 낭만기 그 이면을 읽을수 있습니다(후술)

 

두타산성 터.

두타산성 흔적들로  일대는 임진왜란,한말 삼척 일대 의병의 본거지였습니다.

산은 비상시에는 은신처가 되죠. 두타산도 비상시 동해,삼척 등 강원 동남지방민의 은신처.

신라 파사왕(102년)때 실직국을 병합한 뒤 처음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 후 조선 태종 때 삼척부사 김맹손이 증축했고.

고서에는 높이가 1.5m,길이가 2.5㎞에 이른다고 했으나 현재는 일부 성벽이 남아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함경도 안변에서 동해로 후퇴하는 왜병의 주력부대와 전투가 있었는데

피수구비,바굴다리,대구리 등 동네와 다리 이름에 격전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한말 의병의 진지를 거쳐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의 근거지이기도 .

파르티잔들은 지리산에서 덕유,소백,태백산의 백두대간을 거쳐 이곳 두타산과 청옥산까지 올라왔네요.

북으로 귀향하기 위해서. 국군은 두타산에 진을 쳤고 대부분 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1년 이곳에 들렀던 시인 김지하는 이 아름다운 무릉계곡에서 귀곡성을 들었나 봅니다.

임진왜란과,한국전쟁을 거치며 무릉계곡에서 죽어간 수천 망자들의 아우성,아우성,아우성들.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은 이렇게 태어났고.

"...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

오십 개의 우물터가 있었다고 하더라

오천 명이 한 날 한 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

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

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

(김지하 시인의 '너럭바위 1' 중에서)

 

12산성폭포에서 20여분 급경사 길을 내려오니 드디어 무릉계곡.

 

진나라 때,무릉(武陵)이라는 고을에 고기 잡는 어부가 있었으니.
어느날 배를 타고 계류를 거슬러 오르는데 아름다운 복사꽃이 떠내려 오는 것이 아닌가.

꽃에 취해 따라 오르다 그만 길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강 양쪽으로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향기는 진동하고,연분홍 꽃잎들은 강물을 수놓고 있었다.

멀리 빛이 세어나오는 데 가보니 작은 동굴이었다.
들어서자,기름진 전답이며 절경이 펼쳐졌다. 
복장은 仙界 이국풍이요,사람들 얼굴엔 즐거움이 넘쳐났다.
어부를 초대,술을 내고 닭도 잡아왔다.
이들은 옛적 선조들이 진(秦)통일기 난을 피해 이곳에 왔던 것.
며칠을 꿈속처럼 황홀경을 보낸 후 돌아왔다.
돌아오면서,어부는 곳곳에 표식을 해 두었다.
돌아와 고을 태수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다.
태수 일행은 되짚어 표식을 더듬어 나갔다.
그러나 그 도원경을 찾아내지 못했다.  

파라다이스란 '없는 곳'이라는 뜻이니 딱 그렀네요.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園記)에 나온 얘기.

 

쌍폭~~

무릉계곡을 원경으로 보면 두 계곡이 만나는 Y자형.

동쪽의 두타산,서쪽의 청옥산이 만들어낸 두 계곡이 만나면서 그랜드 캐년 같은 협곡을 만든거죠.

둘은 만나면서 밋밋하질 않았네요. 폭포를 하나씩 가지고 만나니 쌍폭!

쌍폭 바로 위에는 3단으로 흘러내리는 용추폭포가 있습니다. 청옥산,고적대에서 흘러 내린 물줄기죠.

 

용추폭포(龍湫瀑布)

 

수수만년 물줄기의 힘으로 오묘한 절경을 연출해 놓았네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폭포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3단 폭포.

예전 날씨가 가물 때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삼척부사 유한준(兪漢雋.영조8년~순조11년)이 이곳에 왔습니다.
폭포 오른쪽 하단 암벽에 '龍湫'라는 글을 새기고 제사를 올린 뒤부터 용추폭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미수 허목의 두타산기에 의하면,

두타산 무릉계곡 일원의 여러 명승에 대한 이름은 김효원이 삼척부사 때 이곳을 답산하였을 때 명명한 것이라 했네요  

무릉계곡을 들어선 사람은 반드시 들렀다 가는 곳.

등산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은 용추폭포 아래에서 발걸음을 돌립니다.

 

兪漢雋 龍湫.

兪漢雋은 세로로, 雋자 옆으로 湫와 龍자가 새겨 있고.

추(湫)가 '다하다'는 뜻이니 용이 승천했다는 뜻인듯.

이렇듯 영동남부 민초들은 두타산을 영적인 모산으로 숭상.

농사를 지으면 풍년을 주고,고기를 잡으면 풍어를 준다고 믿어왔죠.

때문에 봄가을로 두타산에서 제사를 지내왔고.

날이 가물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며  쉼움산 정상,그리고 용추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니.

용추폭포는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삼단폭포로 1,3단은 바위 뒤쪽에 숨었습니다. 

3단이 그냥 일직선이 아니라 바위 홈을 파고 구불구불 흘러내리니 한눈에는 볼수없다는.

폭포수 옆 철재 난간을 엉금엉금 오르면 3단과 같은 높이의 전망대가 있어 거길 가야 전체가 조망됩니다.

바위에 많은 문구들이 음각되어있고 폭포 위엔 사찰터도 .

 

소폭포~~

학소대(鶴巢臺)~~

학이 집을 짓는 곳이니 선경이 아닐 수 없을듯.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을 들고 학은 선경에.

이땅 명산엔 학소대 지명이 참 많아요. .

 

삼화사(三和寺)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평시대를 열었다 해 三和寺라.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이건 알수 없고.

삼화사 전각들은 한국전 때 타고 보물인 고려시대의 3층석탑, 1미터 고려 철조노사나불좌상을 제외하면 특별한 건 없습니다.

정면으로 두타산의 기암괴석들이 바투해 답답하네요.

그런 이유가 있어요.

원래의 절터는 현재 자리에서 동쪽으로 1.3 ㎞지점에 있었는데,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석회암 채광권 내에 들어가면서 현재의 자리로 급히 이전한 것.

 

삼화사는 1600년대 에도 폐사되었다 이후 다시 중건되었 나 봅니다.

미수 허목은 1661년 '두타산기'에서 이리~~

/삼화사(三花寺)는 두타산의 오래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연대를 알 수 없고, 우거진 가시덩굴 속에 무너진

옛날 탑과 철불만이 남아 있다. 삼화사는 제일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에 있는데, 그곳은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다. 그 앞의 계곡을 무릉계(武陵溪)라 한다./

 

8년 전 가을 소니 디카로 찍었던 사진이네요.

개인적으로 무릉계곡은 이번이 두번째.

다시 보니 그땐 선경이 무릉계곡이  아니라 두타산에 있었네요.

 

한여름 무릉반석은 풀장이 되고.

그러나 저 아름다운 무릉반석에서 김지하는 이리.

김지하의 '검은 산 하얀 방' 서문입니다.

/삼화사 너럭바위 입구에서 부터 내 귀를 때리며 심장을 조이며 내 뇌수 전체를 뒤흔드는 총소리,

포탄 소리, 비행기 폭음 소리, 아우성 아우성 소리, 그 중에도 견딜 수 없었던 그 어버이를 부르는

아이들 울음소리, 그리고 이상하게 떨리던 여인들의 귀곡성, 귀곡성, 귀곡성의 끝없는 환청.

머리 뒤를 잡아끄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 다리를 잡아 당기는 물과 바위와 잡초들의 기괴한 엉킴, 숯처럼,

마치 썩어 가는 시체처럼 거무칙칙한 절벽에서 빛나는 음산한 햇빛, 검은 갈가마귀들의 불길한 울부짖음,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는 불에 타 죽은 시커먼 고목들, 나는 질려 버렸다./

결국 시인은 혼비백산하여 파쏘, 비린내골, 파소굽이라는 원한 서린 지명들이 떠도는 이 골짜기를 벗어났다는.

 

 

 

서체의 야외 전시장.

반석 위엔 양사언 ,한석봉,안평대군,김시습 그리고 장삼이사들이 새긴 글씨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고수,하수를 막론하고 반석 위에다 한마디씩 날린 거죠.

문학적 소양을 발휘한 거였으면 좀 좋으련만 공명심,이름 알리기 가 대부분.

그러나 지금 저 반석 위를 보고 걷는다는 것은 수백년 서체의 야외전시장을 관람하는 것이기도.

 

사대부( 士大夫 )~~

보통 학문하는 관리를 지칭. 조선시대 정치관료들이죠 .

사대부들은 정치는 성리학적으로 삶은 도교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리학적 현실정치와 유유자적의 도교와는 어울리는 구석이 별 없네요.

네,그들은 정치적으로 피폐된 자아를 도교적 삶,신선놀음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것 .

정철,윤선도같은 천하의 문장가들도 피비린내 나는 현실정치를 엮어갔으니.

그래서 그들은 명승지를 찾아 산수를 유람하는 게 중요했네요.피폐한 정신 세탁인게죠.

 

그들은 금강산,지리산 같은 명산을 유람 한  후 소회를 기록했습니다.유산기로 일종의 기행문.

遊山記,,,, 놀 유(遊)네요.

요즘 '유'란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느낌이지만 당시는 달랐습니다.

자적하며 자연을 벗삼아 어우러져 그 속에 숨쉬는 물아일체의 그런 . 또한 사물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

그래서 그들은 명산을 오르고 명승지를 찾는 것을 '산수 유람'이라 했습니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걷는다'는 말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죠 .

 

그들의 산수 유람은  탐승만이 아니라 소회를 글로 쓰고, 시를 짓고,산수를 그리고, 제명(題名)하고,탁족을 즐겼습니다.

유람시에는 번거로움에도 벼루, 먹,종이,붓 외에 시집,시통등을 챙겼죠.

시통( 詩筒)이란 한시의 운두(宥)를 얇은 대나무 조각에 써넣어 가지고 다니던 작은 통.

승경처에 도착하면 선대 문사들이 남긴 시를 찾아 읇으며 회상에 잠기고는 자신도 한수 남깁니다.

지니고 다니던 당시 인기 있는 시집은 당시(唐詩),남악창수집(南岳唱酬集)등 중국 시집.

남악창수집은 주자와 장식이 남악(지금의 형산)을 일주일 간 여행하면서 주고받은 시와 서발문을 엮은 것으로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유람 때 시작에 가장 많이 참고한 책입니다.

주자와 장식의 남악 유람을 산수유람의 전범으로 생각한 거죠.

이것만 봐도 사대부들의 유람이 단순히 승경처에 대한 탐승만 아녔음을 알수있네요.

심신수양 차원이기도 .(이걸 얼마나 믿어야할지...)

금강산 만폭동 너럭바위에 새긴 바둑판.

바둑판 위로 삼산국(三山局)이라는 각자가 새겨져있네요.

세명의 신선이 산에서 바둑을 두고있다는 뜻.

단양팔경 사인암에 새겨진 장기판.

 

당시 조선 사람들의 최고 소원은 금강산 탐방.

사대부들은 금강산 탐방 시에는 거의가 시 한수쯤은 읊었으니 지금 까지 전하는 금강산 시만 수천점.

시작(詩作) 외에 중요한 게 하나 있으니 바로 명승지에서 제명하고 각자하는 것.

제명의 대상처는 사찰의 전각 어디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의 유점사,장안사,신계사,표훈사 등등 기둥,대들보,서까래,창방 등 금강산 내 사찰이란 사찰의

모든 건물은 탐방객들의 제명(낙서)으로 어지러웠고.

제명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던지 손이 닿지않는 곳에는 지팡이나 가는 긴나무에 붓을 매달고 고개 치켜세우고 썼다는.

 

오래 갈리 없는 전각의 제명이기에 그 대안을 암반에서 찾았습니다.

조선 후기 금강산 만폭동의 수천평 반석에는 각자할 틈이 없을 정도.

어떤 이는 만폭동 반석 위에서 자신의 선대 이름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그 밑에 새긴가 하면

어떤 이는 죽은 형님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눈물지으며 새겼고.

금강산 유산기를 남긴 자들 중 절반이 자신의 이름을 제명했습니다.

 

식산 이만부(1664~1732)의 '금강산기'를 보면 제명,각자 현상이 당대 사대부들의 문화현상이였음을 알수있습니다.

/만폭동 돌의 앞,뒤,위,아래 할거 없이 이름을 새겨놓았거나 아직 새기지 않고 써놓기만 한 것들이 헤아릴수없이 많았다.

나의 증조부뻘 되는 대사간공과 부윤공,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도 그 동편에 새겨져 있었다.

함께 간 창량노인은 부윤공의 손자이기에 그 아래에 새기고 싶었으나 빈틈이 없어 그 바위 맞은편 바위에

일행 세사람 이름을 써놓았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동서고금의 현상일 터.

1980년대 바스키아는 아예 낙서를 회화의 영역으로 끌여들일 정도이니.

그러나 유독 심한게 이 땅의 제명,각자 문화입니다. 그것도 3자의 수고를 통해.

 

이렇게 승경처가 제명,각자로 더렵혀지자 분개한 이도 있었습니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 산행 중 제명을 발견하고는,

/대장부가 사관의 책에 기록되 사람 입에 오르 내려야지 너구리 사는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하기를 바란다/ 며 비판.

조선 후기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이상수(1820-1882)는 평범한 문사이지만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라는

걸출한 기행문을 남겼습니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명 기행문이죠.

그는 표굉도의 말을 빌어 무분별한 각자를 신랄히 비판하고 있으니,

/선비가 명산을 더럽힘에도 법이 금하지 않음은 왠일인가? 청산백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얼굴에 자자(刺字)를 가하고 살을 째놓는가.아!진실로 못한 일이구나!/

한마디 더하는데,

/폐하게 원하옵건데 신으로 하여금 역마을 타고 천하를 돌게하시되 신에게 먹 만섬을 내리시고 또 달같은 도끼를 주시여

쓸만한 시문만 남기고 제명은 모조리 도끼로 패고 먹으로 뭉갠 후 찬 샘물로 3일간 씻어 산천의 치욕을 풀어주게 하소서/

캬, 시원한 일갈이네요.

 

참고로 이상수가 얼마나 산수를 사랑하는 사색가였는지는 다음의 글을 보면 놀라게 됩니다 .

어지러운 낙서로 분개한 바로 금강산 만폭동 에 대한 표현 입니다.

/물은 본래 그러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모든 변화는 다 돌을 만난 때문이다.

돌이 가로 세로로 뽐내면서 물한테 굳이 맞설 적마다 곧 중대한 정세를 조성하게 되어

서로 힘으로 싸워 지지 않으려고하니 드디어 백가지 기변을 일으키며 가는 것이다.

급히 떨어지는 데를 만나면 노하여 폭포가 되고,우묵한 데에 가서는 깊고 넓게 고여 쉬기도 한다.

이렇게 겨우 국면을 수습하고 나면 앞으로 또 다시 싸움이 벌어져서 시내는 문득 성난 표정을 짓는다.

이때 계곡 양옆 산봉우리들은 몸을 솟구쳐 고개를 내밀고 그 승부를 흥미로히 내려다 본다./

'계곡 양옆 산봉우리들은 몸을 솟구쳐 고개를 내밀고 그 승부를 흥미로히 내려다 본다'

캬~~~~!!!

 

그럼 저 강한 화강암에 어떻게 새겼을까요?

명산에 명찰이라고 명산엔 반드시 사찰이 있기 마련.

하인,노복들이 새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근 절에는 전문적으로 새기는 각자승(刻字僧)이 있었습니다.

또 예전 우리 관광지 사진사 처럼 현지에 각자해주는 각자공도 더러 있었고.

불화로를 준비하고 정을 달구어 두드려야할 야장(冶匠)들도 사대부 뒤를 따르기도.

글은 사대부들이 바위에 쓰고, 새기고 파내는 작업은 승려몫.

금강산 내 사찰의 경우 내방하는 사대부,관료들에 대한 음식 마련 ,침식 제공,가이드에 산행 가마꾼,

여기에 너무도 많은 각자 요청에 따라 절을 떠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

 

무릉반석에서 열린 시회(詩會) 후 참가자들 명단~~?

 

유한준( 兪漢雋) 과 수박~~~

이 시대 무릉반석은 물놀이 유희의 장소 .

젊은 40대 미시 한분이 아이 둘과 함께 저 각자 위에 앉아 수박을 쪼깨 먹은 후 나머진  내팽개처 버리고 가버리더라는.

 

兪漢雋~~~!!!!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유한준(兪漢雋,1732~1811)이 보통 사람이 아니죠.

용추 폭포의 '龍湫' 각자도 그의 작품.

그가 삼척 부사로 있을 때 새긴 것으로 무릉반석에서 가장 큰 각자인듯.

 

저암 유한준 (兪漢雋, 1732~1811) 하면 다음 문장이죠.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유한준은 조선 정조 때 문장가로 당대의 서화 수집가 석농 김광국(金光國)의 서화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쓴

발문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같은 기계 유씨로 유홍준 교수가 ' 아는 만큼 보인다(知則爲眞看)' 는 미학론으로  재조명된  인물.

팔당댐 검단산에서 잠들고 있는 유길준이 유한준의 고손자입니다.

그런데 정말 저 멋진 미학론을 지녔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유한준은 시대 흐름에 뒤 떨어졌나 봅니다.

그는 당시 연암 박지원과는 척을 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한준의 손자가 유길준,박지원의 손자가 박규슈네요.

연암 박지원이 경남 안의현(현 산청군 통합) 현감으로 있을 때입니다.

인근 함양 군수 윤광석이 '胡服臨民', 즉 연암이 안의현에서 되놈 의복을 입고 백성을 대한다고 헐뜯은 적이 있었죠.

이 때 한양에선 유한준이 당대의 베스트셀러 '열하일기' 자체를 비판합니다 .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편승하여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 즉 '胡虜之稿'라 매도했던 것.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자유분방한 초서체가 멋들어지네요.

'신선이 노닐던 무릉도원,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사라져버린 맑은 골짜기' 란 뜻.

더 정확히는,중대천석의 중대(中臺)는 현 삼화사 뒤쪽 암릉 위에 있던 중대사를 말합니다.

무릉반석 옆 길가에다 큰 반석을 떼어다 석축 위에 비스듬하게 세워 놓은 반석 위에 새겨 졌고.

누구 작품일까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입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막힐데 없는 호쾌한 초서체 일인자로 태산가가 바로 양사언 작품 .

안평대군,한석봉,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4대 명필로 불립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게 양사언 진품으로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저 각자는 바로 앞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는 양사언 글씨가 세월이 지나면서 흐려지자 70년대 후반 복각해 놓은 것.

 

그러면 양봉래가 새긴 각자는 무릉반석 어디 에 있을까요?

상당한 검색을 거쳐 겨우 빛바랜 사진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

놀랍게도 유한준 각자 바로 위였습니다.(아래 사진)

그러나 저게 봉래 양사언의 작품이 분명한지를 놓고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

왜냐하면 봉래 양사언은 옥호 ( 玉壺 ) 거사라는 아호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수 없어서 .

' 玉壺居士' 각자  보이시죠?

만약 저게 진품이라면 그가 인근 강릉 부사로 있을 때 왔을 터이고.

그러고 보니 삼척부사 유한준은 기막힌 자리 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군요.

천하의 양사언 바로 아래에,그것도 더 크게.

 

아래 사진의 각자는 아마 이땅 너럭바위에 새겨진 각자 중 가장 유명할겁니다 .

이후 450년 동안 시대의 트랜드였고 .

450년 전 양사언이 금강산 만폭동(萬瀑洞) 반석 위에 초서체로 새긴 ' 蓬萊楓岳元化洞天'

우로 부터 두자씩 세로로 쓰여졌네요.

 

양사언을 길게 얘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그의 행위로 인해 사대부들의 각자 행위가 대유행을 탔으니까요.

그 계기가 된 각자가 바로 금강산 만폭동(萬瀑洞) 반석 위에 초서체로 새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

'봉래,풍악으로 불린 금강산은 으뜸 조화를 이룬 동천이다'는 뜻. 그가 금강산 회양군수로 있을 때 새겼습니다.

서체가 영혼이 춤추는듯  아름다운 나머지 이후  금강산 유람객들은 양봉래 서체를 찾아 보고는

소회를 시로 남기고,  제명하고, 따라 각자하고,그리는 풍습을 일으켰다는.

양사언이야말로 진짜 금강산 인(人).

금강(金剛)·봉래(蓬萊)·풍악(楓嶽)·개골(皆骨)은 금강산의 4계절 별칭. 그의 호도 여름 금강인 봉래(蓬萊)에서 따온 것.

당시엔 겸재 정선 보다 실력파로 널리 알려진 현재 심사정 (玄齋 沈師正1707∼1769) ~~

그 심사정은 아예 양봉래의 저 각자를 제시(題詩)처럼 그려 넣었으니,' 만폭동'(아래 그림)이란 그림입니다.

견본담채 32.0 x 22.0 cm 간송미술관

현재 심사정이 '만폭동'이라는 그림에서 봉래 각자를 그림에 집어 넣을 정도였다는 .

보이시죠 ? 상형문자처럼 '蓬萊楓岳元化洞天'를 그려 놓은 .

 

양사언하면 떠오르는 게 둘 있습니다.

후처의 아들로서 컴플렉스,그리고 비자기(飛字記).

양사언 본관은 청주로 양희수의 후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희수는 백두산을 유람하고 귀향 중 안변에서 한 여염집에 하루를 묶었네요.

다음 날 떠나면서 그는 시중을 들던 집주인 어린 딸에 고마움 표시로 손부채에 달린 향합을 풀어주었고.

몇해 후 소녀는 향합을 들고 한양 양희수 집에 찾아와서 하는 말,

" 여자의 행실로 신물(信物)을 받고 어찌 다른데로 시집가리오?"

마침 양희수는 상처한 처지라 소녀를 받아들였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이가 바로 양사언.

양사언 7세 때,하루는 한양 자하동 별서(별장)에서 비를 피해 찾아온 어린 왕세자(성종)를 만나 후 둘은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몇해 후 양희수는 사망.

어머니는 남편 사망 3일 후 아들이 본처 아들과 갈등을 우려해 아들들 앞에서 사이 좋게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자결을.

이 일로 정신적 충격에 빠진 어린 양사언은 이후 유량벽이 생겼을 터.

30세 문과 급제 후 함흥,평창,강릉,안변,회양(금강산 초입),철원 등 주로 강원도 인근 수령직을.

'蓬萊楓岳元化洞天' 중 '元'

용이 승천 하는듯,영혼이 춤추며 날리는 듯 .

 

말년에는 금강산 삼일포 인근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택호를 비래정(飛來亭 )이라.

현판을 만들기 위해 비래정 세 글자를 쓰는데 ' 飛'자는 만족했으나 '래'와 '정'자가 맘에 안들어

飛자 만 떼어내 족자를 만들어 방 안에 걸어 놓았고.

양사언은 얼마 후 안변부사가 되어 떠나면서 지인에 집을 맞겼다는.

그러나 안변에 있는 태조 증조부 유택인 '지릉'에 불이 나면서 유배를.

그리고 2년 지나 해배 후 금강산 삼일포로 귀가하던 중 사망.

그런데 어느날 비래정에 금강산 돌풍이 불어 족자가 바다 쪽으로 날아가 사라져 버렸고.

양사헌 친구는 양사헌 사후 '飛'자 족자가 몹시 보고 싶어 삼일포 비래정으로.

그러나 와서 보니 족자는 없고 바람에 날려 사라져버린 사연에 아연질색.

친구는 날아간 날짜를 듣고는 셈을 해보니 그 날이 바로 양사헌이 객사한 날짜더라는.

 

어쩌시나요? 전설도 이 정도면 예술 맞죠??

흩날리는 초서체 대가로서 '飛'자와 연계성을 엮어가 는 기막힌 서사!

서체 한자 한자  혼이 실린 그런 글씨를 썼다는 암시!

후대 문사들에게 비자기(飛字記)라는 예술적 영감까지 심어줬고 .

비자기(飛字記)를 통해 만폭동 각자 또한 얼마나 유명했는지 알수있는 대목이네요.

그는 전설적인 풍수가인 남사고(1509~71)와 가까이 지냈는데 미리 마련한 포천 금오산 길지에 뭍혔습니다.

 

무릉계곡 초입~~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귀경합니다.

 

5분 달리니 좌측으로 쌍용양회가 보이네요

최초 삼화사가 있었던 자리로 삼화사는 시멘트 채석장,공장이 들어서면서 현 위치로 옮겨진 것.

무릉계곡 일대는 동해시 삼화동.

동해시는 태백시처럼 1980년에 탄생한 도시네요.

위쪽으로 강릉 땅이였던 묵호항과 아래로는 삼척시였던 북평항을 떼어내 동해시로.

동해시는 북으로는 망상해수욕장에서 강릉시와 ,남으로는 추암에서 삼척시와 경계를 이룹니다.

동해시는 억센 강릉과 삼척 사이에서 자란 외동딸같은 존재.

면적에 있어서도 역사 유적에 있어서도 강릉,삼척에 처지고.

그러나 요즘은 똘똘한 거 하나로 먹고 사는 세상, 바로 두타,청옥산 자락의 무릉계곡이 있습니다.

예전 동해,삼척 사람들은 무릉계곡 따라 청옥산 넘어 태백,정선,원주를 갔고 멀리 한양도 갔죠.

그러나 가장 애용하던 길은 백복령입니다.

 

쌍용시멘트 체석장을 막 지나니 42번 국도에 들어서 네요.

여기서 우측으로 향하면 동해시요, 좌측으로 향하면 동 해시와 정선을 갈라놓은  42번 국도상의 백봉령 가는 길.

강릉 사람들은 대관령을 넘었듯이 동해 삼척 사람들은 정선,평창,원주,한양 갈 때 백복령을 넘었습니다.

넘을 때 힘들었던 애환이 정선아리랑에 나와요.

"~우리댁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내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노가지 나무지게 위에 엽전 석냥 걸머지고

강릉,삼척에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구비 부디 잘 다녀오세요"

로마의 최초 길도 로마서 지중해로 난 소금길이였듯 백복령도 정선 사람에게는 쏠트 루트.

동해,삼척 사람들이 정선 임계장과 여량장으로 생선과 소금을 지고 가서

영서 지역의 삼베와 곡식을 교환해 오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물물교환의 길이였습니다.

영서 사람들은 두부를 만들기 위해 간수(바닷물)를 옹기독에 담아 지게에 지고 넘던 길이였으니 그 애환이 깊 이란... 

8년 전 귀경길은 그 백복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오늘은 동해시로 향합니다.

동해시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탄 후 영동고속도로를 타니 금방 한양 .

 

&&&...

사대부 산수유람 관련은,

사대부,산수 유람을 떠나다 (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5권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 ( 유홍준,창비)

를 일부 참고했습니다.



 

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산이좋아^^
    '16.7.28 8:05 AM

    올려주신 좋은글 사진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하단 댓글 몇줄도 생각생각하고 쓰게 되는 저같은 사람은 몇날 몇밤을 지새워야 쓸수있는
    이많은 자료와 사진들 덕분에 무릉계곡을 다녀온듯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 wrtour
    '16.8.5 2:23 AM

    저도 산이좋아^^요

  • 2. 변인주
    '16.7.29 3:24 PM - 삭제된댓글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줌인 줌아웃을 열어보며
    그 동안 산행을 하셨을 터인데 하며 기다리고 있었네요.

    이렇게 긴 역사에 얽힌 이야기와 음악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덥썩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함께 산행을 하듯이요.

    감사의 언어로 표현하기엔 역부족 일 뿐이네요!

  • 3. 변인주
    '16.7.29 3:49 PM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줌인 줌아웃을 열어보며
    그 동안 산행을 하셨을 터인데 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긴 역사에 얽힌 이야기와 음악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덥썩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함께 산행을 하듯이요.

    감사의 언어로 표현하기엔 역부족 일 뿐이네요!

  • 4. 제제
    '16.7.29 9:00 PM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더불어 공부 많이 했습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차근차근 두번 세번 읽어야겠습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당.
    앞으로도 종종 가르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wrtour
    '16.8.5 2:25 AM

    허점 투성이,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더위 건강하시구요.

  • 5. 변인주
    '16.7.29 11:35 PM - 삭제된댓글

    wrtour 님,
    여름 산행사진들을 재미나고 구수한 이야기들로 올리시면
    등산을 할 수 없는 형편인 저는 늘 글로 배우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오바되는 댓글을 썼는데
    지우기도 뭐 해서 그냥 놔 두기로 했네요.

    여튼 82쿡의 수준도 올리시는
    정성으로 올려주시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6. 변인주
    '16.7.29 11:37 PM

    wrtour 님,
    산행사진들을 재미나고 구수한 이야기들로 올리시면
    등산을 할 수 없는 형편인 저는 늘 글로 배우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오바되는 댓글을 썼는데
    지우기도 뭐 해서 그냥 놔 두기로 했네요.

    여튼 82쿡의 수준도 올리시는
    정성으로 올려주시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wrtour
    '16.8.5 2:27 AM

    아고야~~~~~~~~~~ㅎㅎ
    어찌나 정성 글로 격려해주시는지 제가 황송할 따름입니다.^^

  • 7. 고독은 나의 힘
    '16.8.19 5:06 AM

    Wrtour님..
    예전에 드문드문 간간히 읽다가
    타국에 와서 살고 있는 지금은
    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고국을 그리워하게 되었답니다.

    이 두타산 글과 위에 방태산 글은... 한국을 떠나기전 강원도에서 3년을 살다 왔기에 더 인상깊습니다.
    저도 42번 국토 타고 정선을 지나 백봉령을 넘어 동해로 간적이 있었거든요.. 고속도로를 타는 편리함을 뒤로하고 ^^

    작년 여름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에는
    마지막 여행지로 남도여행을 갔었어요 화개을 거처 하동 - 벌교-낙안읍성 기행을 갔었답니다.
    낙안읍성 성벽에 서서 저도 투어님 처럼 저곳이 조계산이구나.. 저 산등성이를 타고 염상진과 하대치등 빨치산들이 벌교로 향했겠구나.. 하고 상상을 해봤답니다.

    다시한번 글올려주시는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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