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이 소란스럽다.
나홍진 감독의 범죄스릴러 영화 '곡성(哭聲)'이 개봉을 앞두고 있어서다.
영화 '곡성(哭聲)'은 외지인이 나타난 후 시작된 의문의 사건과 미스터리하게 엮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지역의 이름과 영화 이름의 소리가 같은 것이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주민들의 '설마'하는 우려에 우리 군에 대한 이미지에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작사측에 우리군의 입장과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그 결과 영화 포스터에 '곡성'이라고만 표기됐던 것에 한자를 병기해 '곡성(哭聲)'으로 표기하도록 했다.
영화 상영시 자막으로 '본 영화 내용은 곡성지역과는 관련이 없는 허구의 내용'임을 내보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우려'를 뒤집어 생각하면 '기회'의 순간이 온다.
1991년 일본의 아오모리 현 사과농장에서는 태풍으로 90%에 달하는 낙과 피해를 입었다.
모두가 망연자실 했다.
위기의 순간에 아오모리 현에서는 10%의 남은 사과를 태풍에도 떨어지는 않는 '합격사과'로 마케팅 했다.
'합격사과'는 다른 사과보다 10배 이상 비싼 가격에 팔아 엄청난 매출을 기록했다. 우리 민족은 낙천적이다.
우리의 고전을 살펴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그릴 때도 비장함보다 해학으로 엮어내곤 했다.
영화와 우리 지역이 무관하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사람들의 머릿속 연상마저 막을 길은 없다.
우리 민족의 낙천성을 믿고 역발상을 통해 곡성군의 대외적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남는 장사다.
오히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군을 찾아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초록잎의 발랄함과 갈맷빛 사철나무의 들뜨지 않는 엄정함에 감탄할 수 있다면 우리 곡성에 올 자격이 충분하다.
유리창에 낀 성에를 지워가며 그리웠던 사람들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곡성에 와야 한다.
지금은 사라진 제도지만 우리 군은 '범죄 없는 마을' 사업이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마을을 배출했다.
2000년부터 60% 이상의 마을이 9회 연속 선정됐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영화 속 음산한 기운과 우리 군을 함께 연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우리 곡성군의 봄날을 경험한다면 영화와는 완벽한 대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봄날의 곡성은 아침이면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에서 표현한 대로 '피부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으로
상쾌하다. 해가 산머리 위로 오르면 따스한 봄볕은 어느새 새벽의 기운을 물리치고 섬진강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온기를 나눈다. 10㎞에 이르는 강변길에는 가지와 이별한 벚꽃 잎이 강바람을 타고 미처
다 날아가 버리기 전에 철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5월이면 열흘간 열리는 곡성세계장미축제에는 1004종 수천만송이 장미가 내뿜는 향기가 가득하다.
곡성은 길의 고장이다. 하늘 닮은 섬진강은 쉴 새 없이 흐르면서도 속도로써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다.
그 옆에는 물길 따라 자전거길, 자동차길, 기찻길, 숲길이 겹을 이루고 있다.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서는
사람도 서로 만나 소담한 마을이 만들어지고, 마을마다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우리네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그리워 어깨를 한껏 낮춘 산들은 토란과 능이버섯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들녘에는 새벽이면 이슬로 변하는 섬진강을 머금은 채 딸기, 멜론, 블루베리 등이 영글어 간다.
저녁이면 아이부터 어른까지 한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정담을 나눈다.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희망들이 섬진강 윤슬처럼 함께 반짝이는 곡성은 그야말로 자연 속의 가족 마을이다.
'곡성(谷城)' 50여 년간 부르는 이름이지만 여전히 촌스럽다.
우리네 부모들의 골짜기 같은 주름을 옛날처럼 닮았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이름이 투박하다.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이라면 태어난 곳과 상관없이 곡성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행여 '영화 곡성(哭聲)'을 보고 공포가 주는 즐거움을 느낀 분이라면
꼭 '우리 곡성(谷城)'에 오셔서 따뜻함이 주는 즐거움 한자락이라도 담아갔으면 좋겠다.
<유근기 곡성군수 글>
곡성 가는 길입니다. 영화는 다녀와서 보았구요.
이른 아침 용산역 출발,2시간 20분만에 도착~~
계기는 영화 '곡성' 때문, 아니 이 고을 유 현감이 쓴 글 때문.
전주,임실 지나니 춘양 동네 남원이네요. 남원에선 남쪽으로 두개의 국도가 갈립니다.
19번 국도는 지리산변을 따라 구례 거쳐 섬진강을 지난 후 남해도에서 소멸.
17번국도는 전라선 과 함께 남하하다,곡성 지나 구례서 잠시 19번 국도를 만난 후 순천 거쳐 여수 돌산도에서 소멸.
곡성역~~
곡성 땅을 두번 째 밟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5년 전은 열차서 내리자 마자 지리산으로 픽업이라 오늘이 실질적인 첫 방문.
역 광장서 멀리 읍내를 보면 좋은 동네겠구나하는 생각이 금방 옵니다.
읍내 뒤 곡성의 진산 동악산(735)이 예사롭지 않고.
역전 표지석을 보니 곡성 내력이 이리 써있네요.
/백제시대 에는 욕내(欲乃) 혹은 욕천(浴川)군으로 불렸는데, 산맥과 하천의 흐름을 본따 신라 경덕왕 때는
곡성(曲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 에는 시골장을 떠돌아 다니는 장사꾼들이 교통 이 불편하여,
통행에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지나갈 때마다 통곡을 한다하여 곡성(哭聲)이라 불렀고,
그 후 곡성(穀城)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국가에서, 지명만을 생각하고 조세를 부과한다는
주민여론에 따라 이를 개칭하여, 곡성(谷城)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曲城~ 哭聲~ 穀城을 거쳐 지금은 谷城~~~
짧은 문장이지만 곡성의 인문지리적 특성을 잘 표현해주고 있네요.
고려시대 에는 시골장을 떠돌아 다니는 장사꾼들이 교통 불편으로 지나갈 때마다 통곡을 한다하여
곡성(哭聲)이라 불렀다고 하니 영화 곡성(哭聲)과 묘한 관계를 느끼게 하고.
영화 '곡성'의 실제적인 촬영지는 곡성.
역 좌측으로 곡성의 트레이드 마크 기차마을이 있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txDq6Zf7tNw
모짜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5번.
힐러리 한,바이올린
2000년(당시 20세) BBC Proms, BBC Symphony Orchestra
곡성의 진산 동악산(735)이 보이고~
700여미터 산자락들이 서,남,동으로 곡성 읍내를 빙 감싸고 있습니다.
북동쪽만 남원 방향으로 훤히 틔여 섬진강이 흐르는 평야가 펼쳐지고.
그래서 곡성은 말 그대로 골짜기가 많은 고장입니다.
석곡,오곡, 죽곡 등과 같이 `골짜기'를 뜻하는 '곡(谷)'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고.
동악산 외에도 군의 중앙에 버텨앉은 통명산(764), 남쪽에 동리산(일명 봉두산,753) 동쪽에 곤방산(715)등
700미터 내외의 고만고만한 산들이 모여 전남지방에서도 가장 높은 분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섬진강 기차마을~
수학여행 온 학생들~~
장미축제가 막 끝났네요.
외래종 주류 속에 접시꽃에 눈길이 가네요.
동악산 밑으로 곡성읍~~
우측 멀리는 남원 쪽~~
가운데로 전라선이 지나고 평야지대 우측으로 섬진강이 흐릅니다.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서는 사람도 서로 만나 소담한 마을이 만들어지고, 마을마다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우리네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그리워 어깨를 한껏 낮춘 산들은 토란과 능이버섯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들녘에는 새벽이면 이슬로 변하는 섬진강을 머금은 채 딸기, 멜론, 블루베리 등이 영글어 간다.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희망들이 섬진강 윤슬처럼 함께 반짝이는 곡성은 그야말로 자연 속의 가족 마을이다./
유현감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중앙으로 전라선이~~
멀리 두 산 사이로 섬진강이 남으로 흐릅니다.
곡성읍 북동쪽은 평야지대~~
저 평야 때문에 한때 곡성(穀城)으로 불리웠겠구나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국가에서는 穀城 지명만을 생각하고 조세를 과하게 부과하자 주민들이 곡성(谷城)으로 바꾸었고.
17번 국도를 버스 타고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으로 향합니다.
국도는 섬진강, 전라선,곡성 관광기차와 함께 사이좋게 달리고.
차창 밖으로 섬진강이 따라오네요.
기차마을 정문서 압록 지나는 버스가 많습니다.조망을 위해선 버스나 기차가 훨 좋고.
물론 기차마을서 증기기차를 타고 가도 좋고.
강 건너로 '심청 곡성'~~~
심청근원설화 근원지가 이곳 곡성이라네요.
20여분 달리니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鴨綠)~~~
오리 압(鴨)에 푸른 녹(綠)이니 그 맑음이야.수컷 청둥오리는 머리가 靑이죠.
강감찬 장군이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던 중 이곳에 묵게 되었답니다.
밤에 모기가 많아 어머니가 잠을 못 이루자 장군이 고함을 질렀고 그때부터 모기가 없어졌다는 전설이.
장군의 탄신지인 서울 낙성대에도 같은 모기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압록~~
압록(鴨綠) 전경~~
왼쪽이 전라선,바로 옆이 17번 국도.강 왼쪽은 곡성군,우측은 구례군.
좌측 보성강이 섬진강과 합수하네요.
애초엔 두 물줄기가 만나 합록(合綠)이었으나 오리등이 많아 '鴨綠'으로 바뀌었고.
곡성팔경에 압록귀범이 있는데, 옛날에는 여기까지 범선이 들어왔다고 하네요.
그러나 섬진강 상류에 옥정호(전주시 식수)가 생기고,보성강엔 주암댐(광주시 식수)이 생겨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당연 하류지역인 광양,하동은 바닷물 역류피해를 보고 있겠죠.
압록은 감감찬 모기설화가 전해지고,
신숭겸 장군의 태생지, 한국전쟁 당시 경찰전투사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던 곳,
시인 조태일이 태어났고, 곽재구 시인은 압록국민학교에 재직했었습니다.
詩 '압록국민학교'를 안옮길수가 없군요.
압록국민학교
- 곽재구 -
오리나무 문틀이
삐걱이는 창문을 열면
강바람은 사방에서 정신없이 불어와
우리들의 살과 가슴과 추억을 덮인다
인간과 세상을 더욱 깊게 사랑하는
그 무엇을 배우기 위하여
아이들은 여치 울음과 함께
보리내음 풍기는 교정에 모이고
강변 복사꽃들은 다투어 피어난다
살아 있음이 더 이상 가슴아픈 역설로
받아 들여지지 않을 때
어디서 살구꽃 하나가 날아와
눈썹에 내려 앉는다
하잖은 꽃잎 하나가
끝내 이야기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아이들은 더욱 뜨거운 사랑과 추억을
꽃그늘 시린 이 교정에서 배우고 익히리라
뚜우 뚜우 서툰 보리피리 불며
굽어드는 섬진강
압록국민학교.
아 ,그리고~~~~~~~~~~~~
정동진역이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이라면
강과 가장 가까운 학교는 아마 저 압록초등학교(폐교 후 캠핑장으로)였을 겁니다.
80년대 말 압록의 여름~~
광주에서 까지 몰려드는 대표적인 여름 피서지.
붉은 철분을 한껏 껴안은 구전라선이 그립네요.
불과 18년 전만 하더라도 곡성부터 구례까지 약 20킬로미터의 전라선 철도는 섬진강과 나란히 달렸죠.
아마 이 땅서 정말 아름다운 강변 기찻길.
덕분에 승객은 강의 정취를 차창 밖으로 느낄수 있었고.
하지만 고속의 열풍을 타고 직선으로 개량, 이 구간도 터널구간이 많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시인 하이네는 편리함은 찬양하면서도 '기차가 공간을 살해했다'고 했다죠.
시간 개념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삭막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안타까워한 것.
우측이 압록역~~
정동진역이 가장 바다에 가까운 역이라면 압록역은 강에 가장 가까운.
전라선 확장 공사에 맞춰 새역사가 들어섰고.
압록역 하면 빼놀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죠.
정동진역에 '고현정 소나무'가 있듯 압록엔 '김영애 소나무'가. '모래시계'의 촬영지입니다.
김김영애 소나무~~
추억 속으로 한번 들어 가볼까요??
태수의 어머니 김영애가 지리산서 빨치산 남편의 재를 뿌리고 기차를 타려 압록역에~~
술에 취해 벤치에 앉아있네요.
그리고 그녀 스카프가 날리고 철로 위에 떨어집니다.
비틀비틀 철로에 떨어진 스카프를 주으려는 그녀.
순간 용산발 순천행 전라선 열차가 들어오네요.
열차를 응시하는 그녀~~
삶을 포기한듯 한,,,그리고 스카프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건지, 치인건지 알수없는.
극중 화면을 통해서도 당시 전라선 확장 공사가 한창이였음을 알수있네요.
지금은 확장 준공으로 새 역이 되었습니다.
김영애 압록역 풀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pdBrtxNKVg
강 건너 구례 방면서 바라본 압록~~
T자로 보성강이 합류하고 있네요.
점심으로 참게탕 어떠시나요??
은어구이와 함께 압록 대표 음식입니다.
참게는 연어,장어와 처럼 대표적인 회귀성 어류. 산란을 위해 광양만에서 섬진강을 타고 올라오고.
바다 꽃게탕과 달리 참게탕은 요리부터 지극히 토속적이네요.
시래기를 듬뿍 넣고 걸쭉한게 마치 추어탕 처럼 끊여냅니다. 비쥬얼은 좀 그렇치만 대만족!
태안사 행 버스시간에 맞춰 식당을 나섭니다. 버스로 20분 거리.
지방 여행시 점심시간 후나 돌아올 때는 굳이 택시를 탈 필요가 없죠.
버스 시간대를 맞출수 있으니까요.버스가 차창 전망도 훨 좋고.
식당 앞 앵두~~
옛 생각에 몇개 따서 맛을 보며 정류장에 서 있으자니 식당 할머니가 다가오시네요.
한바가지 앵두를 따서 주시더라는.
주렁주렁 달린 가지도 하나 꺽어서.
집에 걸어두라는 것일까요?
식당 뒤 매실들~~
참게뿐만 아니라 매실도 광양 매실마을에서 섬진강 타고 올라왔네요.
압록 일대도 산비탈에 매화들이 많이 심어졌습니다.
보성강 변 따라 난 18번 국도(국도는 짝수는 동서,홀수는 남북 방향)를 타고 태안사로 향합니다.
왼쪽 끝 다리가 압록 철교.
일대가 한국전 당시 경찰 최고 전승지라네요.전승 기념비도 세워져 있고.
보성강 따라 내려와 압록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으로 향하려던 인민군이 매복한 곡성경찰에 의해 격퇴당한.
그리고 인민군 보복전이 인근 태안사 경내에서 벌어집니다(후술)
자연의 생태계를 잘 간직한 보성강~~
무등산에 비가 내리면 어디로??? 열이면 열 영산강이라 하겠네요.
그리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하니 그게 아니네요.
무등산 동사면은 화순 동복 적벽을 거쳐 보성강으로 흐른 후 섬진강에 합류합니다.
대나무 숲 앞으로 수초들이 무성하고.
특이하게도 강변 따라 대나무 숲이 많네요.전에 보니 섬진강 하류 쪽도 그러하더군요.
이 고장 출신 조태일 시인의 호가 竹兄인 연유가 여기인지도.
4키로 보성강 타고 오르다 태안교를 통해 보성강을 건넙니다.
여기서 6㎞쯤 더가면 태안사 입구.
태안사 입구 까지 6㎞는 아늑한 농촌 풍경으로 정말 정겹습니다
.
태안사 들목엔 허름한 비각이 하나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 ~927) 비각입니다.
곡성은 신숭겸이 태어난 곳으로 관련 유적,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네요.
1589년(선조)에 세워진 보성강변 용산재(龍山齋)는 그가 태어난 곳,
통명산 자락에서 무술을 연마했고. 말을 맨 계마석도.
화장산 장군천(將軍泉)은 장군이 무예를 닦다가 목이 마르면 마시던 샘.
덕양서원은 그를 배향하는 사액서원입니다.
춘천에 있는 장절공 신숭겸 묘~~
그는 개국 1등공신으로 고려 태조 10년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과 격전을.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건을 살리기 위해 왕건이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었고.
결국 신숭겸은 전사하고 잘린 목은 후백제군이 왕건으로 오인해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이후 왕건은 '장절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잘려나간 머리는 황금으로 만들어 장사를.
현재 춘천에 있은 그의 묘택은 봉분이 3개나.
도굴꾼으로부터 묘를 지키려는 의도라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비각 입구 해당화들~~
열매 속 검은 씨앗을 꺼낸 후 홈에 잎술에 대고 불면 호루라기가 됩니다,,,경험상.
동리산(桐裏山) 태안사~~
비각 부터 본격 태안사 숲길이 시작됩니다. 태안사 까진 2키로 정도.
자연의 숲길입니다. 사찰 진입로 중 이보다 더 자연적인 곳도 없을 듯.
태안사는 일반 신도들 북적이는 여느 사찰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속세와 크게 단절되었고,한국전 참상의 상흔 때문이기도 하죠.
桐裏라~~
직역하면 오동나무 껍질 안이라는 뜻인데,
오동나무에만 깃든다는 봉황이 사는 그런 아득한 곳에 태안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겠네요.
길은 좌우로 동리산서 흐르는 계곡수 따라 이어집니다.
정말이지 자연 그대로의 길. 길은 굽이굽이 꺽여지고 휘돌아 깊이가 배가 됩니다.
해탈교~~
중간 지점에 조태일 문학관이~~~~
호가 竹兄이군요.
사찰 부지 내에 왠 문학관일까 ??
그의 이력을 보면 금방 이해가 옵니다.
조정래가 선암사 대처승 아들로 태어났듯,
조태일은 태안사 대처승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전시실~~
창작실~~
문학도와 문인들의 창작공간.
전시실 내부~~
전시실 내 대표작 장시 '국토(國土)'~~
장시(長詩) '국토' 아시죠??
그는 1941년 태안사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태안사에서 보내고 광주고, 경희대학교 졸업.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으로 등단.
'자유실천문인협회' 창립자로 후에 '민족문학작가회' 초대 상임이사와 부이사장을 역임.
말년엔 광주대학교 초대 예술대학장을. 저서로는 <식칼론>을 비롯한 8권의 시집이. 1999년 간암으로 작고 .
들어서니 맑은 피아노 음색이~~~~
평소 즐겨치던 고인의 피아노랍니다. 많이 들어본 게,동요인지 가요인지,,, 나도 모르게 오감이 집중됩니다.
여성분이 피아노에 앉아 있네요. 발길은 전시실 여기저기 옮기지만 귀는 쫑긋 세웁니다 .
갑자기 음악 분위기가 바뀌네요. 월광 소나타 1악장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좋았던 분위기가 갑자기 깹니다. 지금의 전시실 분위기와도 맞질않아요.
역시나 음악도 때와 장소가 있나 봅니다 .
그러나 혹 내가 평소 조태일 시인이 연주한 '월광'을 들었었더라면 ??
지금 저 월광은 자체로 큰 감동이였겠네 요. 이리 음악도 개인적 체험의 영역입니다.
산을 참 좋아했나 봅니다.
나무 스틱에,등산화,코오롱 배낭이.
등산화,배낭 에 유독 눈길이 오래 갔습니다.
술도 너무 좋아했으니 60을 넘기지 못하고 간암으로.
애주가인 결정적인 증거가 코오롱 미니 배낭 속에서 보이네요.
인간 조태일을 얘기한 시인 고은의 글~~
꿀풀~~
길섶은 꿀풀의 세상.
얼마나 꿀이 많으면 꿀풀이라 했을까요?
줄기 위 층층의 다락방 에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습니다.
그 방마다 입술 같은 꽃잎이 있고 .
꿀풀에서 체취한 꿀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네요.
일정에 없던 곡성에 서둘러 온 이유는 또 있습니다.
태안사! 태안사!!! 때문이죠.
같은 섬진강 변이지만 화엄사,쌍계사와 달리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먼 .
보통 지리산,섬진강 변 여행 시 태안사까지 넣자면 시간이 어중간해 포기하고 맙니다.
역사의 근수가 수만근인데 신도들이나 방문객은 현저히 적은 태안사입니다.
사바와 피안을 가르는 능파각( 陵波閣 )~~
영조 때 세워진 이래 수차례 중수.
다리 위에 누각을 세웠으니 누교(樓橋)네요.
능파각은 천왕문 역할을 대신하기도. 천왕문은 절의 일주문 안쪽에 세워지죠.
이동통로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역사상을 모셔 악귀나 부정한 기운을 막아주는.
그러나 누각 아래로 청정수가 흘러내려가니 능파각은 속세에서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이 씻어버리게 하는 상징성이 .
고려 중기의 척신(戚臣) 임보(任溥)가 있습니다.
세인들은 산수에 자적(自適)함을 즐겨하는 그를 가리켜 신선이라 했고.
그가 능파각을 읊은 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개울 위에 다락을 세웠으니 누각(樓閣)이요
/개울 위에 다리를 놓았으니 교량 (橋梁)이요
/개울 위에 절문을 얹었으니 산문(山門)이다
/동리산 계곡 물 위에 뜬 봉황의 집이더라
계단을 오르니 일주문이 보이네요.
동리산 태안사~~
육산 동리산이 품고있는 산사가 오동나무 안처럼 맑고 아늑합니다.
일주문 막 지나니 부도밭이~~
저기에 태안사를 크게 중창한 스님이 한분 잠들어 있네요.
광자대사 (廣慈大師) 윤다(允多) 승탑입니다.
광자대사는 동리산문 태안사 3대 조사입니다.
후삼국시대 신라왕실의 요청에도 고려 태조 편에 서서 고려개국에 힘을 보탠 댓가로 태안사를 크게 중창했습니다.
광자라는 시호도 왕이 내렸고 .
이때가 태안사의 황금기로 인근 화엄사,쌍계사,송광사를 거느렸습니다.
광자대사 탑비.
목 아래 식도가 리얼하네요.
거북 모양의 받침대인 귀부(龜趺)는 광자대사의 것이지만,
1920년대 정비하면서 용 모양의 머릿돌인 이수는 동리산문 개창주 혜철국사의 것과 바뀌었다네요.
연못 안 삼층석탑~~
고려시대 것으로 많이 회 손되 대부분 현대에 만든 부재로 보강.
한국전쟁 격전지로 모든 당우들이 이때 전소.
그래도 중요한 보물이 몇 있네요.
우리나라서 가장 큰 청동 '대바라(大鉢, 보물 956호)'입니다.
지름94㎝, 둘레 3m, 2매(枚) 1쌍의 이 대바라는 불교 타악기의 일종.
대바라 양쪽 표면에는 100여자 명문이 각각 점선각(點線刻)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정통 12년(1447,세종 29)에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를 축원한다는 내용.
바라는 범패( 불교에서 염불이나 재를 지낼 때 부르는 노래 그레고리안 챤트 같은 것)를 부를 때 치는 심벌즈 같은 악기.
선조 때 주조된 동종~~
천순명동종(天順銘銅鐘 보물)으로 공예수법이 뛰어납니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조선 세조 3년(1457)에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네요.
조선 전기 동종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
산세가 참 포근하네요.
/여기에는 용이 깃들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구름이 깊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또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여 삼한의 명승지라 할 만한 곳이다./
동리산문을 활짝 연 혜철국사(惠哲國師,785~861)의 비문에 나온 얘기입니다.
옛 축대 위에 다시 세워졌고.
세번째 인물은 동리산문 개창자 적인 선사 혜철(惠哲國師,785~861)입니다
배알문이네요.
고개를 숙이고 조아리라니!!
뉘시길레?? 이 절 동리산문 개창자입니다.
불교사적으로나 사상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죠.
배알문 사이로 보이는 건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慧徹, 885~861)의 사리가 안치된 부도(승탑).
1200년이 다 된 작품이네요.
저 승탑에선 당대 의 사상사를,최고 조각가의 기교를,정치적 이데올로기 까지 읽을수 있습니다.
승탑(부도)의 정식 이름은 '적인선사조륜청정 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적인(寂忍)'은 왕이 내린 시호 , '조륜청정(照輪淸淨)'도 왕이 내린 탑호,즉 탑명입니다.
보호각을 세웠는지 네 귀퉁이에 초석이 보이네요.
적인선사 행장과 태안사 내력을 새긴 탑비~~
1928년 파손된 비신을 새로 만들어 세우면서 손자뻘 제자인 광자대사 부도비(일주문 앞 부도)의 이수와 바뀌었다네요.
옛 비신은 해독할수 수 없을 만큼 마멸된 채 부도비 옆에 넘어져 있었고.
그럼 어떻게 복원을?? 탁본이 온전히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금석문에서 알수있듯 조선조 땐 옛 비문을 탁본해 소장하는 게 유행.
저 동백이 필 때가 가장 멋들어진다죠.
승탑은 아래 광자대사 승탑과 판박이 입니다.
개창조 적인선사 승탑을 모방한 거죠.당연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되었을 터.
그럼 당대엔 어떤 사상사적 변혁이 있었길레 부처 아닌 죽은 스님을 위해 저렇게 화려한 승탑을??
지금으로 부터 1200년 전 신라말기,사상사에 있어 대변혁이 일어납니다.
통일신라는 교종인 화엄종 천하였죠. 화엄종은 교학과 염불 중심으로 '왕은 곧 부처'였고.
그래서 불사는 국가적 사업. 불국사,석굴암 총책임자는 김대승이였는데 지금의 총리.
왕사,국사는 왕의 최측근으로 통치의 이데올로기적 수반이었다는.
세속오계의 원광법사에 이은 자장율사~~
그는 수도 경주서 떨어진 태백산,오대산,설악산 일대의 변방에 많은 사찰을 세웠습니다.
왜 변방에다??? 행정,군사,문화 중심지로서 사찰을 통해 변방,접경지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죠.
의상이 각지에 화엄십찰을 세운 것도 국토 경영의 일환.
왕,귀족 중심 화엄종 천하에 드디어 적수가 나타납니다.
신라 말기 중국 선종이 들어온 것. 선종은 신라말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세를 넓힙니다.
달마가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올 때가 520년. 중국 황실에 밀착된 기존 교단의 핍박이야 불을 보듯 뻔하죠.
달마는 결국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9년 면벽수도 후 선종 종조가 됩니다.
2,3,4대 거쳐 육조단경(六祖壇經)으로 유명한 6조 혜능(637-713)에 이르러 남종선,북종선으로 나뉘고
혜능은 남종선의 종조가 되죠. 이후 남종선은 중국 불교의 주류로 자라매김합니다.
불립문자,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不立文字,敎外別傳,直指人心,見性成佛)~~
선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들이죠.
이어 8조 마조 도일(馬祖導一,709~788)이 받고 서당 지장(西堂智藏,738~817)에 넘어 갑니다.
마조 도일은 얼마나 혁명적이였는지 '自心卽佛'이라 선언합니다.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니 인간 평등사상.
왕권의 기반은 불평등,계급에서 시작되는데
달마를 시작으로 한 선종이 2백년만에 '범인도 부처가 될수 있다' 했으니 엄청난 사건인 거죠.
그런데 서당 지장(西堂智藏) 수하 4명이 제자 중 3명이 신라인 이였다죠.
이게 역사적 실체인지,아니면 설화적 얘기를 불교계가 자가발전한 것인지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송나라 도원(道源) 스님이 지은 책 중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 있네요.
1004년에 찬술된 이 책은 석가에서 달마에 이르는 인도 선종과 달마 이후 선종의 법계(法系)를 밝힌 책입니다.
도원은 선사들의 전기를 자세히 기술했는데
수록된 분만 무려 1,700여 명.
이 책 9권에는 서당 지장(西堂 地藏) 스님의 법맥을 이은 네 분의 이름이 나옵니다.
처미(處微)스님,도의(道義) 스님, 혜(慧) 스님, 홍직(洪直, 洪陟) 스님 이리.
흥미롭게도 처미스님을 제외한 세 분이 신라인이네요.
세분은 귀국해 모두 구산선문의 일파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유학 스님들의 평균 재당 햇수는 20년)
세분 중 도의스님은 실질적으로 신라 선종의 종조로 가지산문을 개창했고,홍직(홍척) 스님은 실상산문을 열었습니다.
나머지 한분 혜(慧)스님은 바로 이곳 곡성 태안사에서 '동리산문(桐裡山門)'을 연
적인선사 혜철(慧徹)~~!!
혜철은 장보고 선단을 타고 25년 만에 청해진을 통해 귀국한 뒤 화순 쌍봉사에서 여름 안거를 마친 후
이곳 곡성 동리산에서 동리산문을 개창한 거죠.
그의 지리적 동선은 당나라~서해~완도 청해진~화순 쌍봉사~곡성 동리산.
839년 그가 귀국할 때 상황을 저 비문에는 이리 전하고 있네요.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온 것 같다./
당시 혜철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혜철은 이후 동리산에 선당(禪堂)을 열고 가지산문의 도의와 실상산문의 홍척, 그리고 사굴산문의 범일 등과 함께
마조도일의 종지에 대해서 경연(競演)을 펼쳤다 합니다.
혜철은 이렇게 선문을 일으킨 후 77세 되던 경문왕 원년(861)에 입적하는데,
경문왕은 스님에게 '적인(寂印)'이라는 시호와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태안사의 종교사,사상사적 위치가 가늠되시죠??
얘기를 더 진전시키자면 이러합니다.
혜철 보다 20년 앞서 도의( 道義, 생몰년 미상 ) 는 821년에 귀국합니다.
그러나 서라벌 입성은 험난했겠죠. 신라말기 부패한 왕족과 결탁한 화엄교단이 가만히 놔둘리가요.
'왕 외에 또다른 부처라 니!' 당치도 않았을 거구. 서라벌 권력 입장에서는 빨갱이도 이런 빨갱이가 없었을 겁니다 .
결국 도의는 서라벌서 멀리 떨어진 설악산 골짜기 양양 땅 진전사로 들어와 선종 종조(宗祖) 가 됩니다.
도의는 염거 ( 廉居, ?~844) 에게 전하고 , 염거는 다시 보조선사 체징( 體澄, 804-880) 에게 전합니다 .
염거는 진전사 인근 억성사(선림원)로 가 2대가 되고,
염거의 제자 보조선사 체징은 장흥에서 가지산문 (迦智山禪門, 보림 사)을 여니 3대가 됩니다.
셋을 통털어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이라 부릅니다.
1대니, 2대니 하는 내용은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창성탑비에 있는 내용이네요.
드디여 신라말 서라벌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호족들은 힘을 얻습니다.
'누구나 一家를 이룰 수 있다'했으니 궁 예,견훤,왕건 같은 호족들도 왕에 대한 욕심도 생길 터.
호족들은 앞다퉈 귀국한 선승들을 모시기 시 작했고 자신의 원찰을 건립하는데 열을 올리니 '九山에 禪門'~~~~!!
장흥 가지산문( 迦智山門 ) 보림사 ,남원 실상산문( 實相山門) 실상사,곡성 동리산문( 桐裏山門 ) 태안사,
문경 봉림산문( 鳳林山門 ) 봉암사, 성주 성주산문( 聖住山門 )성주사,강릉 사굴산문( 闍崛山門 ) 굴산사 ,
원주 사자산문( 師子山門 )법흥사 , 해주 수미산문( 須彌山門 ) 광조사,,,이리.
신라 왕실도 약해지는 구심력을 조이기 위해 변방의 성종 계열 선사들에 구애를 하죠.
입적한 선사에 시호를 내리고 최고 조각가로 승탑을 세워주는 각종 특혜를 배풀고. 한마디로 선종 천하 시대가 열린 것.
865년에 조성 된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철불 좌상~~
뒷면 등에는 1,500여명의 향도(香徒)들이 결연하여 조성하였다는 내용의 명문이.
주체는 도피안사 소유자인 철원 일대 호족이였겠죠.
'咸通六年己酉正月' 이라는 구절이 있어 경문왕 5년의 확실한 조성연대를 갖고 있는 국보.
좌대 까지 철불로 조성 당대인에겐 엄청난 위엄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 선종계열 사찰이 주조한 불상들은 금동불,석불이 아닌 대부분이 철불이라는 것.
이런 흐름은 고려 중기까지 이어지는데 문화 예술사적으로도 대변혁인게죠.
선종 계열 선사들은 애초 유학 전에는 화엄사상으로 무장했습니다.(태안사 혜철도 유학전에는 부석사서 화엄사상을)
그러나 당나라로 떠나 보니 현지는 선종 천하! 당연 선종으로 갈아탈수밖에.
당시 교통편은 해상왕 장보고(785~846)가 장악하고 있던 선단을 이용.
그래서 초기 선종 계열 사찰은 서라벌서 멀고 완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집중되었습니다.
선종 신봉자인 장보고는 대표적인 선종 지원 세력.
장흥보림사,화순쌍봉사(도윤이 쌍봉사서 선풍을 일으키고 제자 절중이 원주로 가 사자산문을),
남원 실상사,성주 성주사 등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장보고가 846년 피살되고 10년 후 청해진 까지 폐쇄되면서 동종의 재료가 되는 동의 유입이 막혔네요.
당에서도 일시적인 폐불 정책으로 값비싼 동종의 재료인 구리 때문에 약탈되는 수난을 겪고.
당연 대안으로 값 싼 철불이 유행을. 이는 유학승들이 귀국하면서 말기 신라에도 그대로 전파됩니다.
더욱이 철불은 거칠어 강인한 호족 이미지와도 맞아 떨어졌고.
한마디로 구산선문의 사찰들이 호족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저렴한 이점이 철불 시대를 열게 한 거죠.
나아가 지방호족들의 군사력이 강해지면서 무기 제철 기술이
자연스럽게 철불조성에 응용되었을 터.
혹자는 도선의 비보풍수와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무거운 철불이 강한 땅의 기운을 죽이는 사찰 비보(裨補)의 수단인 거죠.
그래서 서산 보원사지 철불과 같은 2m가 넘는 대형 철불이 만들어 집니다.
나아가 철불의 이미지를 선수행 수단으로 해석하기도~~
선종은 언어,문자가 아닌 직관적인 방식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특징이 있죠.
기존의 화려한 사실주의적 불상조성이 교종의 한 수행방법으로 비유한다면,
철불의 거친 조형성,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선종의 직감적인 선 수행의 화두 같은 거.
이처럼 호족들은 자신의 강한 이미지를 위해 철불 주조에 나섰고 ,다시 사찰을 통해 더욱 영향력을 확대.
당연 왕건도 선종에 귀 귀울인 개성 일대 호족.
결국 선종은 왕건의 고려 건국의 정치적 이념이 되었습니다.
태안사 3대 조사 광자대사도 신라 왕의 요청을 뿌리치고 왕건 편에 섰죠.
당연 태조의 반대급부도 커 이때 태안사는 송광사,쌍계사,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리는 대사찰로 거듭납니다.
끝으로 이곳 태안사 적인선사,광자대사 승탑처럼 구산선문과 관련된 사찰에 남아있는
불상, 부도탑, 부도비 등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된 것.
강릉 굴산사지의 당간지주,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상, 성주사지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쌍봉사 철감선사탑(사진) 등
구산선문의 위풍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 최치원이 사산비명(四山碑銘)을 남겼으니 당대 구산선문의 위상을 짐작케 하네요.
사산비명은 지리산의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초월산 숭복사지비,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로 입적한 4명의 승려를 위해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말합니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글씨도 직접 썼고.
조선풍수의 비조 도선국사(827~898) 얘기를 안할수가 없네요.
도선의 사상 모태도 이곳 태안사일 가능성이 크니까요.
도선 관한 기록으로 신빙성이 높은 것은 고려 의종 때
최유청이
왕명 따라 찬술한
'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
이책에 의하면 도선은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영암 구림리에서 출생,898년에 백계산 옥룡사에서 72세로 입적합니다.
15세 때 화엄사에서 중이 되어 화엄학을.20세에 곡성 동리산파의 혜철의 문하에서 선을 익힙니다.
23세 때부터 태백산 등 각처를 운수행각하다 37세 때부터 광양 옥룡사에 주석.
지리산 변 화엄사에서 15세 때 중이 되고, 5년 후 동리산문 태안사에서 혜철 문하에 든 후
37세 때 부터 입적 때까지 인근 광양 백운산 지맥인 백계산(550) 옥룡사에 주석했으니 태안사와 그는 땔레야 뗄수 없는.
도선의 호가 옥룡자인데 이곳 지명 광양시 옥룡면도 도선 호에서 따온 것.
옥룡사는 동리산 남동쪽을 넘어 넘어 그리 멀지않은 곳 있습니다.
개창조 적인선사에 이어 2대 조사가 여(如)선사요,3대 조사가 태안사를 대사찰로 일군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
그런데 여선사는 40여년을 조사로 있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선지 행적이 밝혀지지 않고 있네요.
여선사의 제자 광자대사는 승탑에 탑비까지 경내에 있는데도 말이죠.
일부에서는 여선사를 도선국사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도선의 사상은 제자 동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 이어져 독자적인 옥룡사파로 발전합니다.
동진대사 경보~~
왕건 등 후삼국 사극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언급되는 스님이죠.
도선과 같은 동향(영암 구림리)으로 당나라서 귀국 후 견훤의 스승이 되었다가 고려 3대에 걸쳐 왕사를 지냈습니다.
도선에 대한 시선은 크게 둘로 갈립니다.
조선풍수의 비조라지만 풍수도참승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선이 도선비기를 통해 왕건 탄생을 예견했다'는 등등
고려왕조가 도선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겠네요.
이후 현종은 대선사로,숙종은 왕사로,인종은 선각국사로 추증하며 도선을 원효,의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정도였으니 까요.
두번째는 '옥룡도선'에서 알수있듯 35년간 옥룡사에서 옥룡사파 일문를 거느린 선승이라는 것.
이는 그가 태안사에서 적인선사의 제자로 선맥을 이었다는 주장하고도 연결됩니다.
여하튼 도선 사상적 기초는 태안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광양시 옥룡면 백운산 옥룡사지~~
옥룡사(玉龍寺)는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銑)'이 35년간이나 머물다 입적한 곳입니다.
1878년 화재로 모두 소실(燒失)되고 절터에 남아있던 유물들은 일제가 반출하려다 파손.
당시 도선과 동진대사 경보 승탑,탑비가 있었다네요.
와서 알았지만, 다섯번째 인물은 변호사 조영래입니다.
1990년 폐암 3기 선고를 받고 이곳 태안사로 내려와 투병생활을.
유난히 절집 풍경을 좋아했다던 조영래,그는 1990년 12월 43세 짧은 생애를 마칩니다.
석탑 호수 너머 산등성이 서쪽이네요.
죽음을 사색하고, 죽음과 대화하며 호수 잔디밭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을 그를 상상해봅니다.
세월호 참극 며칠 후인 2014년 4월 21일 예술의전당~~~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 있었습니다.
단원들과 지휘자 데이빗 진먼이 입장하고 객석의 박수가 잦아들 즈음, 한 사람이 무대로 걸어 나옵니다.
무대 맨 앞으로 바짝 다가와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공연에 앞서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바흐의 '에어(Air)'를 연주하겠습니다.
박수는 삼가 주시고 묵념으로 추도해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스위스 대사관 직원의 발음은 어눌했지만, 진심을 느낄 수 있었던.
링크 음악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더 친숙한 '에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rVDATvUitA
이제 태안사를 떠납니다.
아랫 쪽에서 바라본 태안사~~
산문을 나섭니다.
곡성역을 향해.
산문을 막 벗어나니 충혼탑이 보이네요.
압록에서 곡성경찰이 인민군 제603 기갑연대를 섬멸한 보복으로,
태안사에 주둔한 경찰 작전지휘본부를 기습공격해 48명의 경찰관이 전사.
이때 일주문과 능파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태안사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밤이 되면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며 사람들의 발길은 끊겼습니다.
이렇듯 태안사는 전쟁 참화가 남긴 상처가 컸던 곳.
그러다 1985년 부터 청화스님(1923~2003)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능파각을 지납니다.
산문을 나서자니 의문이 하나 듭니다.
이렇게 대단한 위상을 지녔던 동리산문이 고려초 전성기 거친 후 왜 급격히 쇄잔해 갔느냐는 것??
인근 도선의 옥룡사파의 융성을 제외하곤 별다른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네요.
간간히 고려 후기 최우가 중창했고,효령대군이 태안사를 원당으로 삼았다는 기록 정도.
역시 종교도 물적 기반 위에서 튼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지로 시주조차 재대로 되지않았을 거라는.
그러고 보니 태안사엔 그 흔한 사하촌도 었네요.
대찰 아랫 마을 사하촌은 주막에 숙박에 장터가 서는 왁자지껄 그런 곳이죠.
이땅엔 '중장터'라는 지명도 있습니다.중을 위한 장터.
차창밖 보성강~~
압록을 지나니 섬진강이.
레프팅~~
자전거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17번 국도~~
섬진강 강가를 따라 달려오던 17번 국도는 압록을 지나 구례에서 잠시 19번 국도를 만난 후 순천,여수로 이어집니다.
유 현감의 말마따나,
하늘 닮은 섬진강은 쉴 새 없이 흐르면서도 속도로써 우리를 재촉하지 않고
그 옆에는 물길 따라 자전거길, 자동차길, 기찻길, 숲길이 겹을 이루고 있네요.
곡성 기차마을의 종착지 가정역~~
구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는 13.2km.
가정역에서 옛 기차를 탑니다.
기차는 섬진강과 나란히 달리고~~
이런 풍광이 아직 이땅에 남아 있다는게 축복.
조태일의 시,'시골기차'를 놓칠수가 없겠네요.
알고 있 시는 아니고요 조태일 문학관에 전시된 거를 찍어와 옮깁니다.
시골 기차
-조태일-
곧은길 마다하고
산모퉁이 바짝 붙어
돌아돌아 구부러 간다.
그늘 느린 늙은 소나무 굳은 눈물에
몸 뒤척이며
쉬엄쉬엄 감돌아간다.
노을이 타는 강물 아래
자갈밭 모래밭서 노는
물고기 등허리 어루만지며
희뜩 희뜩 맴돌아 간다.
단풍물에 흠뻑 물들어
산비둘기 산까치 등에 업고
느린 물과 함께
자장자장 누워서 간다
정말이지 나를 실은 시골기차는,
산모퉁이 바짝 붙어 쉬엄쉬엄 물고기 등허리 어루만지며 느린 물과 함께 누워서 가네요.
곡성역 도착~~
이걸 어쩌나요?? ktx 표가 매진!
서둘러 무궁화 끊습니다. 타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값에도 내부가 쾌적하고 좌석은 오히려 ktx 보다 넓고.
단지 두시간 더 걸릴뿐. 귀경길 바쁠거 없으니 만족입니다.
우측으로 남원이 보이고~~
압록,태안사 일대의 그 맑은 하늘은 어딜 가고 미세먼지가 멀리 지리산 스카이 라인을 막았네요.
어!
어디서 많이 본 지명이네요.
오수의 '오'자를 자세히 보니 아래 변이 개 '犬'이더라는.
올커니! 그거로구나,'오수의 개'!!!
고려시대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임실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가는 풀섶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풀섶에 불이 났고 개는 개울물에 몸을 적시어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죽었다는 이야기.
주인은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나무로 자랐다는.
그 나무가 오수(獒樹)이고 오수는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고.
오(獒)는 ‘개 오, 길이 잘 든 개 오, 키가 4척인 큰 개 오’ 입니다.
오(獒)는 여기서 생긴 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