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더위가 가시지 않는 느낌이 지속되는 시간에 로스코 그림을 보다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그림중에서 유난히 빨강에 가까운 색이 많은데 몸이 더우니 그 색의 그림을 피하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감각이란 얼마나 절묘한 것인가 문득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그림을 보면서 바탕화면에 담아둔 그림들입니다. 아침에 맞바람이 불도록 집안의 창문을 다 열어두니 바람이 솔솔 들어오고, 갑자기 어제 밤에는
피하던 다른 색의 그림이 보고 싶어지는, 야 놀랍구나 이렇게 미묘한 변화라니 하면서 새로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이번 주 화요일 아이들과 한비자에 관한 책을 읽습니다. 한비자, 두 권의 책을 구해놓고도 다른 급한 것들을 읽느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던 책을 꺼내서 어제부터 읽고 있는 중인데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놀랄
정도로 한비자 안에는 시선을 끄는 대목이 많이 있네요.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친구들 여럿이 모여 있을 때 설명하는 것을 즐겼던 기억이 나는군요. 공부와 독서 이외에는 특별히 잘 하는 것이
없었던 제겐 학교 시험이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수업시간에 듣던 중 선생님이 강조하는 것을 기억하면 학교 시험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덕분이었겠지요? 물론 설명을 아주 재미있게 한다거나 그런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었을까요? 어린 나이부터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경험을 많이 한 셈인데
역시 지금도 아이들과 무엇을 해야 하는 경우 제가 준비하는 것에서 가장 열의가 생긴다는 것을 느끼고 놀라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과 고전읽기를 시작한 것이 제겐 상당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한 즐거운 탐색의
시간이 되고 있는 셈이지요.
혹시 더 참고가 될 책이 있나 책장을 뒤적이다가
아래쪽에 눈에 별로 띄지 않는 곳에 있던 중국 사상이란 무엇인가를 발견했습니다. 집에 들고 들어와서 펼쳐보니
아주 오래 전 군데 군데 줄을 그으면서 읽었던 흔적이 있으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지요!! 요즘 카렌 암스트롱의 책에서 중국의 고대사 이야기를 읽다가 만나는 내용들이 아주 쉽게
정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일본 교수가 아사히 문화센터에서 강연한 내용을 다듬어서
책으로 낸 것이라고 하네요. 단테강의도 구조주의 강의도 중국 사상사 강의도 다 시민강좌를 책으로 낸 것이라니
그들의 저력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에 골라서 보는 로스코와
어제 밤 고른 로스코가 사뭇 달라서 피부에 와닿는 감각에 따라서 화가의 그림을 고르는 일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놀라듯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책을 고르거나 음악을 고르는 것도 얼마나 다른지요!! 관심에 따라서 가고 싶은
여행지도 다르고, 몸 상태에 따라서 먹고 싶은 음식도 다르고, 이런 것을 보면 감각에 조금 더 마음을 주면서 사는
것이 소중하구나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맹자를 함께 읽은 영진이가 수업후에 올린
감상, 공자 이후는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네요. 단테가
궁금해서 읽었다는 아이, 처음 만났을 때 대화하면서 상당히 놀랐었는데 여러 권의 책을 함께 읽는 과정에서 변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책읽기는 결국 자신을 알아가는 열쇠가 되는 것, 자기를 확장해가는 것이겠지요?
어제는 젊은 독일인을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독일인이라고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유연한 사고를 하는 젊은이, 얼굴에 착하다고 써 있는 그런 젊은이와 만난 자리에서 넷이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요.그 자리에서 금방 친구가 되는 유빈이와 다니엘, 재미있더군요. 아마 독일 여행을 하면 다니엘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그것도 좋은 여행의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자신의 여자친구가
스카이프 상에서 선생님이 있는 곳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공간인가 궁금했다고 하길래 헤어지기
전에 행복한 왕자에 데리고 와서 잠시 이런 공간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지요.
돌아와서 수업중에 만난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왜 영어를 해야 하는가, 한국을 나서면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한국 안에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서로의 언어를 일일히 배워서 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 이것을 매개해 주는 것이 영어이니 과목이
아니라 필수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그러니 듣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시간을 많이 쓰면 어떨까?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없으면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이런 말을 자연히 강조하게 되더군요.
어제 밤에는 철학시간에 공자를 읽다가 그 안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국어 발음을 영어로 써놓은 것을 제대로 발음하는 법을 지금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두 남매에게서
여러가지 수정하면서 배웠습니다. 그 아이들이 제대로 가르쳐 주어서 그동안 이상하게 발음하거나 이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던 것이 해결되어서 기뻤지요. 도처에서 뻗어오는 도움의 손길, 그러니 셋이 모이면 두 사람이
다 스승이란 공자의 말은 정말이네 하고 함께 웃었던 시간이 기억나기도 하네요. 그래서일까요? 늘 그 날이
새롭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하다는 충만한 느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