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에 함께 읽는 책 사유와 매혹, 지금 읽는 곳이 바로 르네상스, 아무래도 흥미있는 시대이다 보니
혼자서 이런 저런 자료를 뒤적이게 되네요. 어제는 사회경제사로 읽는 미술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동안 흗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지요. 그런 기분의 연장이기도 하고, 화요일 오전에 읽은
화가열전중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읽은 잔상이 남아있기도 해서 한의원가기 전 조금 남은 시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을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오래 전에 살았던 그녀, 눈빛이 여간내기가 아닌 느낌이네요. 마치 기싸움을 하듯이 그녀의 시선을 제가 받아치는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대결의 양상을 잘 못견디는 제겐 이런 기싸움은 현실에선 아마 미리
도망치게 되는 상황이 되겠지요? 그러고보니 나는 왜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군요. 그림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재미있게 느껴지네요.
한 시대에 한 지역, 특히 피렌체에 등장했던 무수한 사람들, 그들 각각이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유난히
그 시대에 몰려서 태어날리는 없고 시대를 열어가는 기운이 그들의 등장과 활약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원전 5-4세기의 아테네,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 과학혁명기의 유럽에 등장한 학자들
계몽주의 시대의 인물들, 이 시기에 왜 나는 끌리는가에 대한 해답이 보이는 기분이로군요.
신비하다는 단순한 말로 처리하기엔 더 미요한 이 그림앞에서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
그것은 아마 저만의 느낌은 아닐 듯 해요.
밀라노의 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코덱스를 구경했던 적이 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없으니 그저 제겐
그림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참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지요. 그 때 모르고도 받는 그 강렬한 인상은 다만
그의 이름에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감정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러니
기억은 지나간 것의 퇴적물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어쩌면 미래에도 잠복해있다가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가능성을 발생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아닐까요?
어제 한 여학생을 처음 만났습니다. 예고에 다니던 중 일년동안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다녀오고
2학기 복학을 앞두고 미술사 책을 함께 읽고 싶다고 해서요. 그 아이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나가게 될지
기대가 되네요. 좋아하는 마음이 앞서지만 도화지만 보면 얼어붙는 제게 실기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예고생과
더불어 읽는 미술사는 어떤 문을 열어주게 될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함께 읽는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네가 모르는 미술사의 세계를 가이드하는 것,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림 각각에 대해서
테크닉면에서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그런 점을 알려주길 바란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를 읽으면서
모르는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는 아이들과의 만남은 가능한가 다시 한 발 앞서서 생각이 번지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