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해, 그리스 키클라데스 제도 최남단의 해안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 ―
‘작은 것이 아름답다.’
‘소박하고 작게 사는 것이 행복일 수도 있다.’
‘자연스럽고 느린 삶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자연과 교감하며, 허식 없는 소박한
내면적 지향志向과 그 생활양식은 현대에 들어 더욱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산토리니>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집과 일상’이 있을 뿐인데 세계인들을
유혹하여 불러들이고, 세계의 건축가와 그 학도들의 생생한 <교과서>가 돼 있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요.
개인적으로 인간의 의‧식‧주 양식에 있어, 럭셔리luxury보다는 <심플simple>
의 가치를 더 높이 치는데요, 미의 세계를 통찰하는 전문가들도 모두 같은
견해로 일치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게 되면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본래의 단순함과 소박함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가지요.
결국 인간들이, 장대하고 외적인 사치를 추구하다가 몰락하게 된 실증적 기록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기고 있는 걸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산토리니>의 Mystique Resort에서 보는 에게 해
그리스 정교회당
“바다 저 밑바닥의 조개처럼 숨겨져 있는 순수한 한 영혼, 이 영혼의 아름다움은
어느 날엔가 영원의 태양빛을 따라 환희 빛나리라.”
아르스의 성자, 요하네스 비안네 ―
우리나라의 ‘달동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덜 다듬어진 시멘트 계단입니다.
겉보기에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이 한 장의 ‘계단’ 사진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했지요.
계단을 둘러싼 주위의 하얀 벽면과 작은 파란색 대문, 그리고 <분홍 꽃>들이
잘 피어 호기심 어린 고개를 내밀고 있는 옥상과 연한 푸른빛 하늘........
호화 주택가의 비싼 재료로 잘 다듬어 놓은 계단보다도 훨씬 친밀감 있어
보이고 발자국 소리가 깊숙이 배인, 연륜이 느껴지는 <미학>으로 다가옵니다.
한 사물이 인간의 손에 의해 계단으로 만들어져 만인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구실을 하기에, 무정물無情物이기는 하지만 덕심德心이 있어 보이네요.
<리조트resort> 입구 ― 비워진 공간의 풍요함과 이 단순미!.........
풍차가 있는 곳
― 『 이아 마을』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환상적인 저녁 일몰을 보기위해 관광객들이 구름떼처럼 모인답니다.
풍차에 딸린 하얀 집에 전등불들이 켜지면서
<산토리니>의 밤을 아름답게 밝히고 있습니다.
별이 총총한 <산토리니>의 밤!
산토리니의 <Perivolas 리조트>
‘순백의 침실’
이 침실의 장식이 절제된 단순함과 아치arch 선이 그리는 침실 입구의 우아한 곡선미,
전체적인 <순백미純白美>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이런 선한 것들이 조화롭게 꾸며져
휴식하고 잠들어보고 싶은, 어머니의 태중胎中같은 ‘공간’을 연출하지요.
남의 집에 가게 되면 ‘이 집은 얼마나 채웠나.’를 보지 않고, ‘얼마나 비워져서 공간을
어떻게 살려내고 있는가.’를 봅니다. 땅값 비싼 도시에서 소유물들이 한 자리
씩을 차지하게 되면 정작 누려야 할 가족들의 영역이 협소해져 활동이 제한받게 되죠.
지나친 장식은 주인의 솜씨가 연출되기보다는, 가뜩이나 피로한 정신이 더 산만해
지는데, 침실의 이 심플함! 얼마나 감동을 주고 좋은가요.
서양의 옛 지혜에 “우리가 가볍다면 아무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라는 말이 있죠.
이 ‘가벼움’은 경박함이 아니고 ‘단순함’으로 인해 걸림 없는 해방을 말할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습관이나 체면유지 등 생활의 어떤 <무거움>을 유지하느라, 하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하는 부분은 없을까요?........
인류 유사 이래 현대인처럼 <소유물>이 많았던 적이 없었건만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까지 나와서 여전히 자신이 빈곤하다고 자책하거나 타인의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
하는데, 이건 심리적 ‘자해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신을 아는, 스스로 자족함과 건강함이야말로 으뜸 보재寶財입니다.
현대인은 생활의 비곗살인 ‘과잉’과 ‘불필요한 소비’를 빼낼 때 가벼움을 느끼게 되고
삶의 노역勞役에서도 풀려나는 해방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적은 것이 많은 것. Less is more.”라는 말이 있지요. 인간은 적은 <소유물>들을
가지고도 풍요로운 실존적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 순백의 단순미와 평범함의 미학 ― 산토리니의 조형언어
몸이 사람의 영혼을 담아내듯 집은 사람을 품는 <조형 공간>입니다. 그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한 세대가 형성되어, 가족이라는 혈육의 공동체가 탄생해서
성장해가지요. 지상에 자신들만의 공간을 위한 집을 꿈꾸는 것, 그것은 사랑과
더불어 한 가족의 행복한 살림을 위해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
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사회에서 이 집은 ‘주거개념’의 순수성을 벗어나 이윤 추구를 위해라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거래가 가능한 상품이 될 수도 있는 게 일반적 경향이죠.
“서울 어디 사세요?” 라는 말은 한 개인의 현재 주거지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힘과 능력을 어느 정도 상대에게 내보여지게 되는 언어가 되
었습니다.
<산토리니> 섬 달동네의 아름다움은 ‘평범성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산등성이 마루에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들 중 크고 화려한 고가高價의 주택은
단 한 채도 없는 듯이 보입니다.
현지 사진으로 보았을 때 ‘좋은 집보다는 좋은 이웃으로’ 둘러싸인 듯, 작고
<심플simple>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평범한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하니까요.
갈수록 큰 것과 많은 것, 그리고 화려한 것을 선호하고 익숙해져가는
현대인들에게 ‘평범한 것’ 은 그저 식상해서 하찮게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표준을 지니고 있기도 하답니다.
타인들에게 보여 주는 삶이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는 삶을 사는 이들의 단출한
생활과 꾸밈없는 주거 공간의 소탈함은, 현대에도 여전히 호소력 있게 암시
하는 가치와 덕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산토리니> 섬에서는 모든 건물의 외관과 실내의 주조색이 단순미와 순백미로
통일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육지로부터 먼 외딴 섬의 밀집된 환경 속에서
열린 공간을 지향하고, 이웃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은 평화로움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가식 없이 보여주는 <공간 미학>을 엿볼 수
있겠는데요,
높은 담을 쌓고 이웃과 단절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함께 살아가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따뜻하고 소담한 ‘공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평범함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편안함과 소박함을 드러내는 미학이며 가장 자연
스러운 살림의 <기본 양식>일 것입니다. 사실 옷도 항상 우리를 감싸주는
<평상복>처럼 좋은 옷이 없지 않은가요?(값비싼 의복은 대개 일 년 내내 옷장
안에 걸려 있기에)
평범하다는 것은, 무미건조함과 ‘정체된 현실’이 아니고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으며, 화려하고 사치한 장식과 허위의 날개가 제거된, 단순성과 질박함을
담고 있는 삶의 중용을 말합니다. 또 평범에는 무관無冠의 담백함이 있어서 늘
자연스러움이 흐르고 포용성이 넉넉하기에, 이 <평범>을 거부하게 되면
정신적인 긴장과 부자연함이 언제나 뒤따르게 마련이죠.
<평범의 미>는 어떤 환경에서도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기 때문에, 삶의 출발점
이면서도 종국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 만인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평범함은
거품으로 최정상에 올랐다가 나락에 떨어져 보아야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아주 고귀한 삶의 양식(style)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평범함 속에서도 개인의 ‘능력’을 비범하게 연마하는 노력은 지속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집은 자연 재료로 지어졌지만, 그 안에 주거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집이라는 대상을 투자 가치로 생각하면, <물건>
이라는 소모품 안에 들어앉아 사는 것이 되고, ‘존재의 안식처’로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진리와 사랑이 함께해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이 머무는,
우주속의 한 거룩한 공간이 되어 가족을 감싸 안고 품게 됩니다.
현대의 신도시 개발에서 보듯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시키거나, 타인의 희생
어린 삶의 기반이던 땅에서 난개발로 조성되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 안에서의
안락을 진정, 의미 있는 삶이 연출되는 살림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제 한 문명 속에서 자본주의가 ‘저질러 놓은’ 문제점을 성찰하며, 집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재산 형성의 절대 대상에서 벗어나
삶의 질이 진화하는 공간으로써 말입니다.
‘사랑의 내밀한 관계’가 조화로운 가정, 부모에 의해 <휴머니즘>의 가치관이
자녀에게 전승되고, 전통의 지혜와 미래의 지식을 탐구하며, 영혼과 육체가
휴식하는 존재의 보금자리가 집의 정의定義이니까요.
집이란 생명을 위한 삶이 있어야 할 곳이지, 빈번하게 사고파는 <투기상품>은
아닐 것입니다.
“몇 평집에 살아요?” 보다는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이 질문이 실존의
중요함이 될 것입니다.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에서 ‘존재의 자리’로 정착될
때 지상에서의 한 인간의 삶, 한 가정의 생활도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
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복잡함은 늘 개인의 삶과 정신을 무겁게 할 것이며, 단순성과 소박함이 체현
되었을 때, 비로소 개인의 영성(靈性, Spirituality)도 회복될 수 있겠지요.
어머니의 <태중胎中>처럼 아늑하면서 사랑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러한
평안한 공간 같은 소박한 집이야말로, 정작 우리가 추구하고 디자인해야
하는 ‘인간적인 집’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건축가들은 집을 디자인하고 만들지만 그 집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몫과 책임은, 존재자인 인간에게 영원히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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