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2. 27 쿠스코에서
옷 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새벽에 호스텔에서 눈을 떴다. 역시 고산지대라 일교차가 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낮에는 여름 날씨이다가도 햇빛이 잠시라도 사그러들면 순식간에 쌀쌀해지니...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 로비를 나오니 예의 그 흑인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며 아침을 권한다. 호스텔에서 주는 아침이래야 간단한 빵에 잼, 버터 그리고 마테 차 정도지만 속을 채우고 나니, 그제서야 좀 움직일만 해진다.
어제 아메리카 에어라인에서 연락 받은 대로 배낭을 찾기 위해 새벽부터 택시 잡아타고 궁시렁 거리며 공항으로 갔다.
Lan Peru 카운터에 문의하니, 여권이며, 짐을 잃어버렸을 때 작성했던 신고서 등을 요구한다.
그것들을 제출하고 혹시나 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니, 잠시 후 직원이 배낭을 들고 나온다. 막상 배낭을 보니 가출했다 돌아온 자식을 본 것 처럼 가슴 뭉클~~
어디갔었어~~ 엄마 걱정했었다구 심정이 되어 배낭을 끌어안으니,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돈다..
.....조금 오버였나.....
어쨌거나, 마지막으로 배낭 무게를 재고, 인수했다는 증명으로 서명을 했다. 근데 배낭 무게가 약 10kg 정도.. 역시 이번엔 가볍군. 참고로 유럽 갔을 때는 15kg이 넘었었지, 아마...
어쨌거나 배낭을 찾아서 다행! 걱정 훌훌 털어버리고 셋째 날을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배낭을 풀어보니, 다행히 별 이상은 없었다. 삼일 동안 똑같은 옷만 입고 있다가 새옷으로 갈아입으니 살 것만 같다. 배낭을 정리하고, 필요한 물품들만 작은 가방에 챙겼다.
물론 귀중품은 바지 안에 따로 달아둔 비밀 주머니에 챙기고는 호스텔을 나섰다.
아침 시간의 골목들은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노점들로 꽤나 분주하다.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 있는 성당앞 계단에 앉아 잠시 그런 풍경들을 감상하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또 분단위로 아이들이 다가와서 엽서나 담배를 팔거나, 구걸을 한다. 일일이 거절하기도 피곤해질 무렵, 저 멀리서 경찰이 오는 게 보이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도망가버렸다. 그 광경을 보니 좀 안 되어 보인다. 저 아이들도 돈이 절실하게 필요할텐데...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추스리고 오늘 하루는 쿠스코 시내의 박물관들과 거석들로 만들어진 성벽으로 유명한 삭사이와망에 가보기 위해 지도를 펼쳤다.
어제 성스런 계곡 투어를 하면서 Boleto Turistico(US 10$ 단, 26세 이하, 국제학생증 소지자는 5$)라는 일종의 입장권을 구입했었다. 이 티켓은 쿠스코와 그 주변의 박물관 및 유적지 16군데의 입장권인데, 10일간 유효하다. 개별적으로 각각 입장권을 사는 것 보단 훨씬 싸게 먹힌다.
Oficina Ejecutiva del Comite나, 해당 유적지 및 박물관에서 구입하는 게 가능하다.
오늘은 이걸 마저 써먹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일단 가장 괜찮은 잉카 문명 관련 박물관으로 알려진 Museo Inka로 갔는데, 익, 여기선 이게 통용 안되고, 따로 티켓을 사야 했다. 하여간 볼만한 곳은 꼭 이런 다니까..(그러고 보니 첫날 꼬리깐차 입구에는 아예 이 티켓은 받지 않는다고 떡하니 써붙여놨던 게 생각난다.)
하지만, 왠지 손해보는 듯한 기분은 박물관에 들어서자 싹 사라져버렸다.
황금으로 된 유물들이야 대부분 스페인에게 약탈당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걸 보상하고도 남는 잉카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토기들과 장신구, 미라와, 충실히 재현한 잉카식 무덤들..
아쉽게도 박물관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여서 찍어오질 못했다.
대신 안 되는 실력으로 맘에 드는 건 몇 개 스케치.
잉카 이전 문명 중 하나인 Mochica 시대의 토기를 그린 것. 붉은 토기로 고추의 형태를 띄고 있는게 고추의 원산지 답다. 이처럼, Mochica토기는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동물이나, 식물, 사람)들을 주제로 삼은 게 많았다. 근데 골 때리는 게, 아무리 일상을 주제로 삼았다지만, 일부는 차마 똑바로 보기가 뭐시기 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한 것도 있어서 차마 스케치를 못했다.
페루엔 잉카 이전에도 여러 문명이 존재했었다. 지상 그림으로 잘 알려진 Nasca문명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박물관에서 본 Nasca토기는 Nasca 문양으로도 불리는 특이한 패턴에 꽤나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진 게 많았다.
위에 사람모양으로 그려놓은 게 pikillaqta라는 건데 서기 750년 정도 무렵의 물건이다.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 장신구나 부적이 아니었을지.. 재질은 푸른 비취나, 터키석으로,5cm로 자그마한데, 2등신으로 다른 형태들도 많았는데, 귀여운 게 많았다.
오른쪽에 그려놓은 게 Puynu라는 잉카시대의 토기인데, 옥수수로 빚는 '치차'라는 술을 저장하는 데 쓰인 것 같다.
바닥이 원추형으로 흙바닥(잉카 가옥의 바닥은 그냥 흙이 노출되어 있다)에 묻어서 썼는데, 이렇게 바닥이 원추형인 항아리는 거의가 큰 것이 대부분으로 약 70cm ~ 150cm정도로 보였다.
입구가 좁고 기다란 것과 낮고 넓적한 두 종류가 있었다.
그 외에도 잉카 시대의 생활상을 재현한 미니어처라든지, 미라, 스페인 침략 당시를 묘사한 그림들, 유명한 직물들을 보자니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또 하나, 스페인에서 그린 그림이었는데, 잉카와의 전투에서 시작하여, 그 왕을 처형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게 있었는데, 그 처형 장면에 카톨릭 신부가 입회에 있었고, 결국 왕은 목을 잘린다. 본래는 이교도라 화형을 시켜야 했는데, 육신의 보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잉카는 결국 죽기 전 세례를 받고 목을 잘리는 것을 택했다 한다. 그 그림을 보고 있자니, 사람이란 명분과 욕망 앞에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박물관엔 다른 스페인 식민지 양식의 건물들처럼 안뜰이 있는데, 그 안뜰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천을 짜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잉카 박물관의 안뜰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천을 짜고 있는 인디오 아주머니들..
이 지역의 직조 기술 또한 유명한데 몽땅 수작업으로 들어가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다.
박물관을 나와, 티켓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박물관을 두 군데 정도 더 갔는데, 역시 Museo Inka만 못하고, 그다지 관심을 끄는 것도 없어서 금방 나왔다.
나와서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쿠스코에 있는 한국식당 아리랑의 벽에 써 있는 낙서들..
여행 중에는 한국음식 안 먹고 현지음식을 고수하는 게 내 주의다.
사실 한국음식이 비싼 것도 있지만 굳이 평소에 먹을 수 있는 것을 밖에서까지 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교차가 큰 날씨와 장기간의 비행 후 무리하게 돌아다녀서였는지, 몸 상태가 영 안 좋았다.
그 와중에 발견한 한국식당..
"그래 체력 보충이 필요해!!!"
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며.. 결국은 들어가서 결코 싸지 않은(비싼!~) 만두국과 밥과 맛있고 푸짐한 반찬을 먹고 나니 힘이 불끈 솟는다.
있던 감기기운까지 그날 저녁 떨어져나간걸 보면.. 역시 한국인한텐 한국음식이 최고의 보약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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