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의 눈이라는 것이 그저 겨울에는 의례이 오는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내년농사와 산골아이들의 놀이를 위해서 꼭 와 주어야 하는 성스런 '예식'쯤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눈이 많이 오고 적게 오고에 따라 내년 농사 기후를 점치게 된다.우리 초보야 그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도시에서야 어디 눈을 그리 중히 여겼던가?
연말이라는 것도 그렇다.

동창망년회, 성당이웃들 모임, 남편회사 망년회참석, 이이들 부모모임 등 그저 망년회라는 의미도 안맞는 간판을 내걸고는 무얼 입을까, 무얼 신을까, 어떤 귀걸이를 하고 갈까 등에 온 신경계를 다 동원시킨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겉치례에 신경쓸 일이 없으니 속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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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올 기미가 보이면 우선 차를 집 입구 다리결에 미리 내려다 놓는다.
그래도 많이 오기 시작하면 마을 입구 국도변에 두고 걸어다닌다.
얼마전에 온 눈때문에 국도변에 차를 내려다 두었는데 일요일이 되었다.
바람과 눈보라가 밤새 구들방 앞을 알짱거리더니 아침에도 여전하다.
걱정이다.
푹푹 빠지며 걸어가는 것도 그러려니와 오늘 우리 부부가 성당에서 독서(성경말씀의 일부를 낭독하는 것)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한복을 입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눈이 무릎까지 차는데 걸어서 한복이라.........
결국 한복을 보자기에 싸들고 산골아이들을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온 식구 장화를 신었는데도 장화 사이로 눈이 삐집고 들어와 지 몸을 녹인다.
세상 밖으로 나와 있는 살이라고는 얼굴밖에 없는데 어찌나 얼어 뎅그랑거리는지 온 몸을 얼리고도 남음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산골식구들의 폼이 무슨 로보트 행진하는 것 같아 그 와중에도 웃음이 새어나온다.
진도가 너무 늦어 속도를 내려해도 앞에서 가슴으로 안기는 눈보라때문에 발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난 한복보따리들고, 남편은 산골식구들 신발보따리를 들고 눈보라 속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빚 판심하고 야반도주하는 장면이 별거 아니다싶다.
산골아빠도 귀가 몹시 시린지 어린 딸의 귀마개를 번갈아끼며 가고 있다.
같은 울진이면서 우리네 산골과 눈 하나 없이 봄날 같은 읍의 차이는 내가 봐도 심하다.
이런 날 성당에 가면 시선은 모두 산골식구들에게 고정된다.
무슨 에스키모인처럼 무장한 산골식구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미사가 끝나고 짜장면 사먹고 선우 아토피때문에 덕구온천에 다녀오니 어둑어둑해졌다.
이제 또 마을입구에 차를 두고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남편이 일전에 서울다녀 온 짐을 못가지고 올라갔으니 이참에 손수레에 싣고 올라가잔다.
맨 손으로 올라가기도 숨이 찬데 손수레를 밀고? 게다가 눈길을?
남편은 끌고, 나와 아이들은 밀고.
한복보따리, 신발보따리, 일 주일치 찬거리보따리를 손수레 손잡이마다 처마밑에 무청매달듯 주렁 주렁 매달고 올라오는데 40분은 족히 걸리는듯하다.
등골에서는 땀이 쉴새 없이 미끄럼을 타고.
잠시 쉴겸 네 식구 서서 시장에서 산 뻥튀기를 먹었다. 목이 마르면 눈덩이를 집어먹으며.
아이들은 모든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지에미 골병드는줄은 모르고.
이제 달도, 별도 제자리에 나와 앉았다.
작은 아이가
"엄마, 하늘 좀봐. 별이 많지? 그래도 우리 식구들 별은 내가 금방 찾을 수 있어."
아랫 배에 힘을 주며 끙끙 손수레를 밀고 있는 내 옷자락을 잡아끈다.
그 작은 손을 꼬옥 움켜 잡았다.
'그저 자연을 눈에 많이 담아두렴. 그리하여
별처럼 맑은 눈으로,
소나무처럼 곧은 정신으로,
봄바람처럼 따스한 가슴으로 세상에 나아가기 바란다.'
손수레의 짐을 다 정리하고 나서 배동분 소피아
(꽁지글 : 위의 사진은 다른 날 성당에 갔다가 목욕하고 돌아오는데 눈이 많이 와서 그 때도 차를 아랫 마을에 두고 걸어오는 장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