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계획에 없던 몽테뉴와 파스칼 얘기를 했는데요.
★ Montaigne
Que philosopher, c'est apprendre à mourir (Essais)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 프랑스는 1562년부터 지속적으로 종교 전쟁과 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572년에는 프랑스 가톨릭이 신교도인 위그노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이 일어났고, 1598년에야 신교도들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 칙령이 선포되었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를 겪은 몽테뉴는 종교적 광신주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문명에 밝은 아버지 덕택에 어린 시절 라틴어와 라틴 문학과 학문을 익히면서 그리스 로마 문헌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인문주의 시대의 근대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몽테뉴는 <Essais>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몽테뉴는 ‘철학하기란 죽음을 배우는 것’ 이라고 말하면서 죽음은 우리가 부정하고 피해야할 대상이 아님을 강조한다. 인간이 아무리 거부하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해도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인간의 조건인 죽음을 피해야 할 악(惡)으로 여겨 고통스러워하고 동요되기보다는 언제라도 다가올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철학은 우리가 눈 앞에서 늘 죽음을 대면하게 하고 성찰하게 하는 훌륭한 예방책을 제공한다. 또한 죽음에 익숙해질수록 쓸 데 없는 집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죽음에 초연해지는 것은 유익하다. 즉 행복은 죽음과 관련한 사유에서 오는 고통을 줄임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몽테뉴의 생각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견해와도 유사한데, 실제로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세네카 등 헬레니즘 철학자의 구절이 빈번하게 인용한다. 스토아 학파에서 주장한대로 죽음은 인간이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이미 죽은 상태라면 죽음에서 오는 고통과 불안을 체험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초연해지는 것, 죽음이 다가왔을 때 겸허하게 소멸해 가는 것, 그것이 죽음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대처법이다.
몽테뉴가 죽음에 익숙해지기를 주장했다고 해서 현재가 의미가 없어진다거나 삶의 의의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는 자는 그들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고’, 죽음이란 ‘우주 질서의 한 부분, 세상 생명의 한 부분이다.’ 삶 역시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거나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을 잘 이끌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몽테뉴는 『에세』1588년 판에 처음 등장한 3권의 13장 ‘경험에 관하여’ (De l'expérience)에서 춤추고, 자고, 마시고, 산책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일상사, 소위 ‘세속적’인 행위들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L'homme n'est qu'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 mais c'est un roseau pensant. (Pensées)
인간의 일상을 긍정하고 지상에서 행복할 권리를 승인한 몽테뉴가 르네상스 시기 근대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반해, 파스칼은 현실에 던져진 인간 조건의 비참함에 주목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학자 코르넬리우스 얀세니우스가 주창한 얀센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수용한 신학 종파이다. 프랑스에서는 포르-루아이얄 수도원이 중심이 되어 이 교의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파스칼 역시 17세기의 주요한 얀센주의였다. 얀센주의는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인문주의화된 기독교와 당시 중요한 사회 권력이었던 예수회의 몰리나주의(molinisme) 모두를 공박하면서 초기 기독교 신앙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역설한다. 파스칼이 1656년에서 1657년에 Les Provinciales 을 발표, 예수회 도덕의 타협적인 태도(laxisme), 즉 세속화된 가톨릭을 반박하여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서 악한 본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개신교 칼뱅주의의 예정설과 유사하게 은총은 오직 신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있고 신의 선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스칼의 인간론은 매우 비관적이다. 인간은 허위와 공허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덧없는 인생을 산다. 특히 인간은 무력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 조건은 비참하다. 게다가 이성은 ‘기만적인 힘’ (puissances trompeuses)에 의해서 동요되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상상력은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환영에 빠지게 만든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의 본래적 조건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고 공허함을 잊기 위한 ‘위락’ (慰樂 divertissement) 에 헛된 시간을 보낸다.
파스칼에 따르면 게임, 사냥, 여자들끼리의 수다와 같은 사적인 일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왕이 공무를 수행하는 공적인 일 모두 ‘위락’ 에 해당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의 근원적 불행을 잊고 분주하게 보내지만 곧 권태가 찾아온다. 즉 사람들은 이러한 공허한 행복 속에서 휴식과 동요, 권태와 환영을 반복한다. 인간이 권위(autorité), 호기심과 학문(curiosités et sciences), 쾌락(volupté)을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만 이 역시 인간의 ‘무한한 심연’ (gouffre infini)을 채울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trois concupiscences)를 상기시키는 이러한 구절은 행복하기 위한 가능성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인간 본성을 깨달으라고 했기에 행복을 위한 길을 예비했지만, 파스칼이 보기에 인간이 자력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 그들의 결정적 한계라고 보았다. 인간은 연약한 갈대에 불과하지만 ‘생각하는 갈대’ 이다. 인간이 비참하지만 동시에 위대한 까닭은 동물이나 식물과 달리 자신의 비참함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천함과 위대함이 모순적으로 뒤엉킨 인간은 오직 신의 품 안에서 본래적인 삶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 보너스
달다구리를 사랑하는 우리들이 열광했던 사이트 링크합니다. ㅋㅋ
마카롱 하악하악~ <라 뒤레>
쇼콜라티에 피에르 에르메 사이트
마카롱의 유래
http://fr.wikipedia.org/wiki/Macaron (번역해오는 게 숙제.....................는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