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에 공무원 시험 합격 후 발령을 기다리던 중에
계속 공부를 위해 서울 생활을 하다가
발령을 받기 전에 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해
34개월 하고 5일을 복무하고 만기 제댜하고
바로 서울시와 우체국 발령을 받아
서울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마살이 끼었는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92. 12월 지금 살고 있는 해남에 정착 23년 째 살고 있습니다.
1990년대 말 방송을 타고
서울과 부산 두 곳 백화점에 납품을 하면서 잘 나가다가
1999년과 2001년 한 해 걸러 두 번 태풍을 맞으면서
거래 계좌기 지불정지 당하고
부동산이 압류 경매로 넘어가면서 신불자로 전락
얼마 남지 않은 닭들 먹일 사료 살 돈이 없어
살아 있는 닭들을 굶겨 죽여야 하는 처지에 몰리면서
막다른 상황까지 내몰리기도 했습니다.
어렵던 시절 매 주 주말이면
분당 서현역에서 시범단지 가는 입구에 가서 고구마를 팔기 시작히면서
질 좋은 고구마를 시중보다 싸게 팔기 시작해
차츰 경제적 안정을 찾을 즈음
다음 날 아침 분당 갈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던 중에
음주차량이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와 정면 충돌로 척추가 깨져
깨진 척추 적출 수술을 받고 오랜 재활기간을 거쳐
계속 입원 치료하라는 병원의 권유를 쀼리치고
각종 약을 끊은지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나이도 있고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격으면서 자신을 관조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병원에서 최월 할 때
병원에서는 절대 일을 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라고 당부를 했는데
가벼운 농사일을 하고 농산물 인토넷 거래도 해오면서
많은 돈은 아니어도 제법 쏠쏠한 수익을 올려나름 나눔도 해오면서 살다 보니
마음이 즐겁고 몸도 내성이 생겨 차츰 적응해가면서 즐겁게 삽니다.
국가유공자여서 먹고 사는 문제 걱정이 없으며
대부분 자급자족 샹활로 크게 돈을 쓸 일도 없는데
22대 총선이 지나면 34살 되는 아들이 결혼 생각 없이 혼자 사는 것이 다소 걸리지만
부천에 스튜디오를 갖고 사진작가로 활동 남 못지 않은 소득으로 걱정할 일이 없어
마음 푠하고 몸도 편해 하는 일도 잘 풀려
요즘은 조선 후기 이해조와 고전 소설의 쌍벽을 이루셨던
조부님의 원작을 추적 발굴해 문학관 설립에 열심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쁜 샹활중에도 봄 채소 재배할 준비를 하고
많지 않지만 댤걀을 꺼내고 택배를 준비 보내느라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열심히 삽니다.
올해 들어 제가 확실히 장담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사람일수록 도시보다 농촌이 훨씬 살기 쉽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10원 한 장 없이도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농촌입니다.
농촌으로 이주할 경우 지자체에서 적지 않은 생활안정금이 지원되기도 하지만
사방에 널린 냉이. 달래. 쑥을 캐도 생활이 어렵지 않으며
쑥을 캐 각종 쑥 떡을 만들어 파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은 배추 값이 싸 밭에 버리는 배추를 걷어다 김치를 담아 팔아도 되고
봄이 되면 고사리. 산머위. 산미나리. 산두릅. 산 취 들을 채취해도
일당 벌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시잔이 지나면 각종 채소를 직접 재배해
채소로 팔아도 졸고 반찬을 만들어 팔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일이 아니라 사람으로 관념을 탈피하고 발산을 전환하면
세상에 불가능은 없으며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과 판단입니다.
즉 일거리를 구하거나 창업이 자본이나 장소의 문제가 아니며
한푼 없어도 창업을 할 수 있고 대상도 널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섣불라 나서지 못하는 것은
경직된 사고와 관념 때문이라면 잘못이라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