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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10년만에 피아노를 배우며

| 조회수 : 1,557 | 추천수 : 10
작성일 : 2008-08-20 20:02:28
피아노 학원을 거의 10년 만에 다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배운 것은 대학교 방학 때이다.
별일 없이 집에서 머무는 방학이었던지 알바비를 털어 한 달간 피아노 학원을 다녔었다.

초등학교 때 이후 아주 오래 간만에 가졌던 교습의 기회였다. 피아노는 연습이 실력에 반영되는 솔직한 분야이면서도 의외로 감퇴가 빠른 운동기억이다.
즉, 내 실력이 고만고만 하다는 얘기다.

모든 것이 획일화 된 대한민국에서는 피아노 실력도 자로 잰 듯이 수치로 말한다.
나는 기초를 갓 넘긴 체르니 100번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체르니 30정도 치면 ‘조금 쳤구나’라는 말을 듣고 체르니 50을 쳤다고 말하며 ‘잘 하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왜 숫자가 낮을수록 좋은 건지, 숫자는 왜이리 건성건성인지 긴 이론 수업 시간 중에도 배운 적은 없다.)

내가 처음 피아노를 배웠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이다.
나는 음악 수업 때 반주를 치던 인기 많던 그 아이를 부러워했었다.
지금도 내 마음은 피아노를 향하지만 그땐 그다지 피아노를 즐겁게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를 되짚어 보니, 첫째는 넘쳐나는 학원생으로 인해 이론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학원에 가면 순서를 기다리면서 음표 그리기 등의 지루하고 반복되는 수업을 해야 했다.
연습시간은 길어야 30분 정도이다.

또 다른 이유라면 피아노를 배운 사람은 머리가 좋다는 선생님의 오만과 늦어지는 학원비 때문일 것이다.
피아노 책을 펴놓고 진도를 물어보던 엄마는 왜이리 진도가 늦냐며 학원에 전화를 해야겠다고 했었다.
열성적인 엄마라면 좋은 학원을 수소문 했었겠지만 그 대신 엄마는 피아노를 너무 싫어하던 동생과 나를 싸잡아 피아노 교습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피아노 학원과 나와의 인연은 끝났으나 쌩뚱맞게 엄마는 고등학교 입학 즈음에 피아노를 사 주셨다.
지금도 그 피아노는 짐받이 역할을 하며 부모님 댁에 덩그라니 놓여있다.
조율은 구매 이후로 한 적도 없다. 그런 피아노를 왜 사주셨는지 나는 의문이다.

피아노가 반가워 나는 다시 연습을 했지만 대학 입시 전형을 위해 전략적으로 구매한 것도 아니었다.
집에 피아노가 생겼지만 더 이상의 레슨을 받지 않았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피아노를 쳤더니 왼쪽 새끼 손가락이 아파왔다.
내 양쪽 새끼 손가락은 모두 안쪽으로 휘어 있어 원래부터 힘이 없다며 구박 덩어리 취급을 당했었다.
나는 오른손 잡이이기에 특히 왼쪽은 더욱 힘이 없다.

연습곡을 10번쯤 쳤을 땐 왼쪽 새끼 손가락이 뜨겁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프루스트는 마들렌을 먹으며 옛 기억이 떠올랐던가. 나는 뜨거운 새끼 손가락이 새 피아노를 받았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 당시 우리는 다가구 주택에 살고 있었다. 아직 봄기운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던 때라 밤이 되면 방은 스선한 기운이 돌았다. 마루는 외풍이 덜 하고 사람의 온기가 있어 그렇게 춥지 않건만 피아노 소음에 대한 가족의 민원으로 나는 그 온기로부터 차단당했다.

도대체 왜 피아노를 사줬는지 그때도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생긴 피아노가 반가워 몇 시간씩 내 맘대로 뚱땅거리며 연습을 했다.
여기서 내 맘대로란 마음이 흐르는 대로가 아닌 악보와 이질적인 소리를 내는 행위를 뜻한다. 손끝발끝 모두 시린 그 순간에 유일하게 뜨겁던 내 신체의 일부가 있었으니 바로 왼쪽 새끼손가락이었다.

오늘도 아프던 그 새끼 손가락은 나를 고등학교 입학 즈음으로 되돌려 주었다. 난데없는 피아노 앞에서 몇 시간이고 추위를 견디던 나름 행복하던 시간이었다.
첫사랑의 슬픔도 카드 결제일의 무거움도 모르고 늙는다는 게 뭔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조율도 하지 않을 피아노를 엄마는 왜 샀을까?
나는 결코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사준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급격한 속도로 기억력이 감퇴되는 엄마에게 지금 물어본다 해도 썩 좋은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
그저 주민등록초본을 바라보며 그 대답을 추측할 뿐이다.


내 주민등록초본은 두 장이다.
이제 나이가 서른인데 나의 주소지 목록을 적으려면 두 장이 꽉 찬다.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3개의 학교를 다녔다.
세 개가 모두 한 도시에 있었긴 하지만 서로간의 거리가 멀어서 당연히 이사도 했을 것이다. 전 학교에서는 소풍 일자가 늦은데 새 학교에서는 이미 소풍을 다녀온 뒤라 첫 소풍을 갈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을 뿐 가난이란 개념도 없던 나이였다.

세세하게 초본을 살펴보면 오랫동안 한 곳에 살기 시작한 때가 바로 피아노를 사던 때이다.
10년간 한 집에 살았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며 신기해 하던 나는 그 집에서 10년을 가까이 사는 식구들을 보며 이게 안정인가보다 생각했었다.


아마도 엄마는 오래 전부터 내게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잦은 이사로 엄두를 못 냈는지 피아노가 비쌌는지 모르겠다. 피아노를 가르친다며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우셨던 것 같다.

아직 피아노도 배우지 않은 네살배기 조카를 위해 피아노를 달라고 하던 올케 언니처럼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으면 피아노를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가보다.
십 여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철이 든 덕인지 아니면 초본이라는 것을 유심히 볼만큼 복잡하게 살 나이가 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엄마에게 조금 더 좋은 딸 노릇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sinavro
    '08.8.20 8:51 PM

    부모 마음은 자식을 낳아서 키워봐야 아는 것 같은데
    호호님은 벌써 부모님을 이해하고 계시네요.

    지금이라도 열심히 연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들만 둘 입니다. 고1. 고 3.

    둘 다 5살때부터 피아노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배우게 하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나중에 피아노가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큰 아이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도 제대로 뜨지 않으면서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피아노가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죠.
    수시로 두둘겨 댑니다.

    초등학교 때는 체르니 한 곡 가지고 거의 1년 피아노 친 적도 있어요.
    그래도 아무말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에게도 진도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피아노를 즐기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레슨이 목표였는데
    운이 좋게도 지금도 피아노 배우면서 큰 아이는 즐거워합니다.

    작은 아이는 정확하게 잘 치긴 하지만
    감정이입이 되지 않습니다.
    피아노와 아이가 따로 노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저는 직장관계로 해외에 체류 중인데
    여기에서는 밤 늦게 피아노를 쳐도 아무런 제재가 없습니다.
    오히려 클래식 음악 듣는다고 아래층 위층에서 즐거워 해 줍니다.

    열심히 연습하세요.
    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나이가 들면 더 절실해질거예요.

  • 2. key784
    '08.8.21 11:17 PM

    맞아요.. 저도 나이드니까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더라구요..
    음악을 즐기고. 운동을 즐기고. 춤을 즐기고...
    인생에는 뭔가 즐길거리가 (대출 잘 할주아는) 필요한거 같아요^^

    저는 어릴때 조르고 졸라서 삼익피아노 한대를 사주셨는데..
    되도않는것을 마구 뚱땅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고등학교때 시골로 귀농하시면서 짐된다고 구청에 보내버렸지만요...
    원글님 덕분에 어릴적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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