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경이 되면 남편과 큰 아이들은 회사와 학교로 보내고 삼삼오오 슬리퍼를 끌고 저희 집에 오셨
지요.
늦은 아침과 점심, 그리고 간간이 간식까지 해결하고, 아주 가끔은 부업거리를 들고 와 함께 하시곤 하셨
죠?
여름에는 수박이나 옥수수, 감자 등이 시골에서 올라오곤 했는데 대형 냉장고도 김치 냉장고가 드물었
던 때라 큰 찜통에 쪄서 다 같이 나누어 먹고 특히 수박 같은 과일은 계속 잘라가며 그 자리에서 몇 통씩
해치우곤 했죠.
겨울엔 김장도 당연히 다 같이 하셨는데 어느 해 겨울인가는 트럭으로 한꺼번에 배추와 무가 올라와서
천 포기쯤 담으셨나 봐요.
우리 집 몫은 200포기 정도?(그해 우리 집 식탁이 상상이 가시죠? 김치 부침개, 김치 볶음밥, 김치 만두,
김치찌개 등등)
양념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어도 그때 김치가 참 맛있었어요.
그때까진 우리 친 할머니께서 젊으실 때라 겨울 내내 간식하라고 뻥튀기랑, 강정이랑 엿 같은 거 많이 보
내주셨는데 저희 자매들이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는지라 동네 아줌마들께서 거의 다 드셨지요.
지금 생각하니까 괜히 아깝네요. ㅋㅋㅋ
젊은 아기 엄마들은 애기 들쳐 업고 와서 젖도 먹이고 국에 밥을 말아 먹이기도 하셨는데 침을 튀기며 수
다를 떠느라 아이 입에 제대로 숟갈을 조준하기도 힘들어 보였지요.
주로 시댁 흉, 남편 흉, 애들 자랑 등 아줌마들 레파토리를 듣다보니 그게 또 은근히 중독성이 있더라구
요.
학교만 다녀오면 턱 괴고 방 한구석에 앉아서 아줌마들 얘기에 귀를 기울였지요.
남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하는 편이신 친정 엄마는 속상해도 내색도 못하고 아줌마들 가고 나면 혼을 내
곤 하셨는데. 야단을 맞아도 그때뿐이지 한 번 중독되니까 아줌마들 얘기가 너무 궁궁해 공부도 안 되는
거 있죠?
한 아줌마는 거의 매일 남편 흉을 너무나 리얼하게 보셨는데 길 가다가 그 댁 아저씨만 봐도 나도 모르
게 나쁜 X 소리가 터져 나오더라고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다른 집 아이들이 각자 엄마를 부르러 오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세워 각자의 집
으로 퇴근하셨어요.
걸쭉한 농담과 리얼 토크를 즐기시던 동네 아줌마들 덕에 일찍이 사람에 대한 공부를 톡톡히 한 셈이지
요.
철이 들고 부터는 그 오지랖이 더욱 넓어져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가 출간해 낸 책을 정신없이 사들이
적이 있었어요.
근데 비슷비슷한 책을 많이 읽다보니 식상하게 되더라구요.
심리학에 대한 관심도 어느 정도 엷어졌을 무렵 사람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핀 책이 바로 정혜신 박사의
사람VS사람이었어요.
원래 이 책은 전편인 남자VS남자의 속편 격인 책인데 전 친숙한 인물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이 책을 먼저
읽었어요.
지금 봐도 뉴스메이커인 정몽준, 이명박, 심은하, 박근혜, 김수현, 손석희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아~ 하고
탄성이 나오는 인물들의 내면이 잘 묘사되어 있어요.
특히 이 책의 장점으로 철저한 자료 조사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
도 있지만 개인적 만남을 통해 친밀감이 생기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할 수 있
지 않아요?
또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면 인터뷰를 물리게 했을 것이고 어떻게 자신을 보여줄까에 대해서는 인터뷰
어보다 한 수 위일 가능성이 높잖아요.
일종의 기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객관적인 인터뷰는 물 건너가고 상대방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만
이 전달될 거구요.
물론 작가의 자료가 100% 맞는 다는 보장 역시 없지만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노력만은 높
이 사고 싶어요.
두 번째로는 전문 작가 뺨치는 글 솜씨가 있다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파헤쳐 지는 인물들의 실
상에 빠져들게 하는 작가의 문장력은 오랜 수련을 거친 외과의의 환상적인 시술 장면처럼 멋져서 작가의
의견에 도무지 태클을 걸 수 없게 만들어요.(물론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제기하는 작가의 진보적인 성
향이나 편향적 시각에 대해 저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요. 하지만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시각 차이는 누구
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 역시 내 시야를 넓힐 수 있는 방
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가 때인 만큼, 또 이 책에서 언급된 인물 등 중에 유난히 정치인들이 많이 눈에 띄기 때문일까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일수록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의지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뛰어난 재능이나 지식이 바르지 못한 곳에 쓰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지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잖아요.
특히 정치인의 경우 이미지같이 겉으로 보여 지는 부분만 부각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올바른 판단이 힘
들구요.
공인일수록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고 실수를 인정하는 강한 도덕심이 선행 되야 한다고 봐요.
이 책을 읽으면서 신은 인간에게 지극히 공평한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어요.
돈이 많다고 해서 좋은 부모님을 가졌다고 해서, 본인이 똑똑하다고 해서 신뢰받을 수 있는 완벽한 인간
인 것은 아니니까요.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건 단점보다는 배울만한 장점을 많이 가진 멘토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바라
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