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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과 엄마빤쓰

| 조회수 : 1,222 | 추천수 : 1
작성일 : 2005-11-30 16:07:07
일전에 서랍장 정리를 하면서
못 입는 옷들, 안 입는 옷들 치워버려야지 결심했습니다.
우르르 거둬내는데, 한구석에 '엄마빤쓰' 한뭉치가 눈에 띕니다.
엉덩이를 완전히 덮어주는 넉넉한 사이즈에
안정감있게 허리를 받쳐주는 고무줄밴드.
엄마빤쓰 다들 아시죠? ^^

결혼하고 1년 되었을 땐가요,
낮에 시댁에 들를 일이 있어서 갔는데
어머님이 조심스럽게 들고 나오시는 비닐봉투에
이 엄마빤쓰가 가득 들어 있었어요.
'이게 말이다...내가 입으려고 산 건데..
사서 한번씩 다 삶아가지고 입어보니까 너무 꽉 끼지 뭐냐.
면 100%야. 면이 참 좋은데 값도 싸서 많이 샀는데,
어떡하냐. 못입고 그냥 가지고만 있었지..
너는 젊은 사람이라 이런 거 안 입겠지만, 나중에라도 입을테냐.
이거 내가 일일히 다 삶아빤 거라 아주 깨끗해.
면 100%라서 감이 참 좋아. (이후 면 100% 다섯번 정도 더 나옴)
어떻게....너 갖다 입을래..?'
저는 오랜만에 보는 엄마빤쓰에 재밌어서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또 나름대로 어머님이 제가 듣기 좋도록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주시는 마음이 감사해서
선뜻 제가 입을께요 하고 들고 왔습니다.
하지만 엄마빤쓰는 한동안 그대로 서랍장 한구석에 있었습니다.
제가 입기에는 좀 커서 옷입을 때 맵시도 안 나고 괜히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지난 여름, 제가 몸이 많이 아팠더랬습니다.
잠도 잘 못 잘 만큼 힘들었는데
몸에 딱 맞는 날렵하고 맵시좋은 속옷들이
마치 저를 옥죄는 형벌 도구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때 제게 한줄기 희망과도 같이 떠오른 것이
바로 어머님이 주신 엄마빤쓰였습니다.
입으면 엉덩이가 조깅해도 될 만큼 넉넉한 공간의 엄마빤쓰는
여름 내내 아프고 지친 제 몸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안아주었답니다.
면 100%라서 그런지 정말 느낌이 좋더군요 ㅎㅎㅎ

저희 어머님은 제게 이것저것 잘 물려주십니다.
목이 따가워서 못 입는 니트들은 모두 제 차지가 됩니다.
어머님이 키도 작고 체구도 작으신 편이라서 상의는 사이즈가 같거든요.
올 겨울에는 무지외반증으로 발이 아파 못 신으시는 정장구두를 몽땅 물려주셨습니다.
네, 저는 어머님과 발 사이즈도 같아요.
덕분에 짱짱한 '엄마 구두'만 다섯켤레가 생겼으니 이걸 어찌할까요^^;;
고풍스런 가오리가죽 지갑에, 난감한 디자인의 화장품가방,
손거울이나 손톱손질세트 같은 잡다한 미용소품들,
아껴두고 안 입으시다가 사이즈가 안 맞게 되신 각종 교정속옷까지!
결혼하고 첫 겨울에는 모피코트를 덜컥 주셨다가(무지 놀랬음)
다음 겨울에 '너 안 입지?' 하고 도로 가져가신 적도 있고요(!),
이번에는 랑콤 콤팩트를 주셨다가, 친구분 선물로 줘야겠다고 다시 가져가셨습니다 ㅋㅋㅋ
이렇게 주셨다가 다시 가져가시기도 합니다.
일단 저 주려고 하셨던 것은 맞으니까 기분은 좋고,
제가 쓰지 않을 건데 도로 가져가시니까 오히려 처분을 고민할 필요 없어 좋죠.
또 미안해가면서 다시 가져가시는 어머님이 재밌기도 하고요 ㅋㅋ

네~ 네~ 덥석덥석 받아오고는 쓰지 않고 모셔두거나 치워버리니 오히려 어리석은 일일런지.
제가 네에, 좋아요, 제가 쓸께요 하고 웃으면서 받으면 어머님이 기분 좋아하시니까
안 쓸 거면서도 자꾸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성격이 있는 터라, 각종 '처지곤란의 잡동사니'을 모조리 정리해서 보내신 건가 싶어
약간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 어머님이 '니가 쓸려면 쓰고 쓸 데 없으면 그냥 버려라. 혹시 몰라서 보내는 거다'
이런 단서를 붙여주시지 않았으면 정말 속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처치곤란이라는 게, 결국은 어머님의 알뜰한 성격에서 나온 거구,
딱히 쓸 곳은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워 모셔두던 것들이겠지요.
알뜰하지 못하고 물건의 사연도 모르는 신세대 며느리는
안 쓸 것들은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거나 용도변경을 해버리거나
그도 아님 버리거나 그렇게 가뿐하게 처리합니다.
시어머니가 주셨다고 모두 소중하게 아껴쓰거나
처분하기 눈치보여 억지로 쓰는 성격은 못 되거든요^.^;;


사실 어머님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은 낡은 살림살이나 잡동사니처럼 너무 엉망이라
받으면서도 솔직히 기분이 안 좋고 무시당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 스타일은 완전히 무시한 색상과 디자인에 팍 김이 샙니다.
(어머님 앞에서는 이쁘다고 무조건 같이 칭찬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것들은 모피코트나 새 전기압력밥솥처럼
제가 받아도 되는 건지, 써도 되는 건지 헷갈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엄마빤쓰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제게 왔지만,
힘들고 지쳤을 때 눈물나게 고마운 말없는 사랑입니다.
촌스럽고 모양도 안 나고 흔하디 흔한 시장표 빤쓰지만,
면 100%라서 팍팍 삶아도 될 만큼 튼튼하고 또 부드럽답니다.
엄마빤쓰 좋~아요~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대호맘
    '05.11.30 4:21 PM

    읽어 내려갈수록 나나님의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지네요.
    어머님의 대한 배려도 느낄수 있구요.. 표현할수 없는 많은 것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지금 만큼만 하시면 어머님이 좋아 하실거 같아요~

  • 2. 라니
    '05.11.30 4:25 PM

    나나님의 따뜻한 마음,,,
    많이 받아 고맙게 쓰시고 ^^
    또 며느리 보심,,, 그렇게 따뜻하게 물려주시구요...

  • 3. lake louise
    '05.11.30 5:40 PM

    나나님같은 며느리 요즘 세상에 흔치않을 겁니다.
    어머님도 새아기 믿어주시니깐 그러시는거죠, 아무한테나 그러셔봐요..요즘 며느리들이
    얼마나 매섭다고 하시는데요..

  • 4. 창원댁
    '05.11.30 5:57 PM

    그 엄마빤쓰 두셨다가 임신하시면 입으세요.
    저도 아주 요긴하게 입고 있답니다.

  • 5. 나나선생
    '05.11.30 6:05 PM

    저는 솔직히 별로 그렇게 좋은 며느리는 못 된답니다.
    그저 일상에서 느낀 행복한 감정들을 골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가끔 적어보아요^^
    창원댁님 저도 마침 그러려고 빤쓰 잘 보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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