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이 14편의 글을 읽어내려 가면서 몇차례나 눈시울을 붉혔는지 모른다.
대구태생이고 북한 사람들을 외괴인으로 여겼고, 북한을 달나라보다 더 이상한 나라로 여겼던 아줌마가...
남편과 함께 10일간 북한을 여행하며 한꺼풀, 한꺼풀씩 벗겨내려간 그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자신을 안내해준 안내원을 딸처럼 생각하게까지 되었다는...
14번째 마지막 글에서 "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는 그녀의 말이 절로 와닿았다.
결국 나는 이 글에 책값에 해당하는 1만원이라는 원고료를 아낌없이 보내고야 말았다.
표현 구구절절이 와닿을뿐 아니라, 긴 글 한편, 한편을 읽다보면 어느새 북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나 또한 북한을 여행하고픈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어서 가서... 재미교포 아줌마처럼 북한동포의 환대를 받고 싶다.
딸아이와 캄보디아 여행길에 들렀던 북한식당에서 받은 그 환대를 ... 우리 북녘 땅에서도 말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Issue/series_pg.aspx?srscd=0000011008
14편의 글 중에 10번째 글을 복사해서 올려봅니다.
(정감 어린 사진들까지 보려면 위 사이트를 클릭해서 직접 보시길...)
1편 부터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읽어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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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50cm 북한 군인들, 믿기지 않았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⑩] 조선미술박물관과 아리랑 공연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교회를 떠나 평양 시내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물끄러미 차창 밖을 내다봤다. 수많은 생각에 잠긴다. 설경이가 조용히,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본다.
"녀사님, 어데가 편찮으십네까?"
내 표정이 몹시 어두웠나 보다. 자동차가 김일성 광장 앞에 도착해서야 나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영혼의 간절한 바람이 현실의 시간 앞에서 잠시 나래를 접을 수 있었다.
다시 만난 김일성 광장, 그리고 선조들의 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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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매스게임을 연습하던 생기발랄한 아이들과 이들을 지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이날은 볼 수 없다. 일요일이기 때문인가 보다. 큰 광장이 텅 비어있어 쓸쓸해 보인다. 아이들이 없는 광장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군인들의 퍼레이드가 머릿속을 지나간다. 과거에 봤던 이 광장에 대한 기억의 파편이다.
이제는 이 광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뛰놀고,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연습하다가도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던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광장으로, 회색빛 기억 위에 밝은 무지개 색을 덧칠해 가슴속에 간직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광장 옆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박물관 안에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해설원이 활짝 웃는 얼굴로 걸어 나오며 우리를 반긴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해 역사적으로 귀중한 미술 작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었다. 나 같은 미술 문외한이 어찌 우리 선조들의 예술성을 이해하겠는가. 이 미술 작품들이 내게 주는 감동은 그저, '너희들은 남이 아니노니...'라는 선조들의 소리 없는 질책뿐이다.
해설원이 정성을 다해 작품마다 설명을 해줬지만, 전시물들이 조금은 어설프게 보관돼 있는 듯해 걱정됐다. 이때, 남편이 또 한소리 한다.
"이렇게 허술하게 전시를 해 놓으면 얼마 가지 않아 작품들이 훼손될 텐데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아요?"
남편은 마치 시찰 나온 사람처럼 지적하고 넘어간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고픈 말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점이 남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또 한 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서글서글하게 생긴 해설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뗐다.
"좋은 충고 감사합네다. 그러나 선생님, 귀한 작품을 이토록 장애물 없이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없으실 텐데 걱정해 주시는 마음 잠시 덮어 두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세히 마음껏 감상하십시오."
"집에 가면 남편한테 한바탕 해야겠습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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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원은 작품 설명 중간중간에 농담도 잘 한다. 지금까지 만난 해설원 중에서 가장 재치와 유머가 넘치고 붙임성이 많은 해설원이었다.
"선생님, 부인께서 오십이 넘었다는데, 저렇게 젊게 보이니 남편을 잘 만나서가 아닌가 싶습네다."
기분 좋으라고 한 농담을 남편은 "참, 듣던 중 옳은 말을 여기서 듣네!"라며 기고만장이다. 이때다 싶은지 자화자찬하느라 여념이 없는 남편. 1년에 한두 번 연중행사처럼 별미를 요리한답시고 온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놔 나는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쁜 상황을, 매일 나를 위해 만찬을 차려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남편의 자화자찬이 끝나자 해설원은 감격하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받아친다.
"이렇게 자상하신 남편이라면 나는 업고도 다니겠습네다. 당장에 오늘 집에 가면 남편한테 한바탕 해야겠습네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람 사는 이야기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대화가 북한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얘기란 말인가. '남편을 잘 만났다'라는 얘기는 내가 태어난 한국이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미국에서도 일부 여성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북한 여성들은 '인간의 행복은 당과 조국에 달려 있을 뿐, 여자의 행복이란 남편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으로 믿고 있던 내게 이 여성 해설원의 농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이 사회는 내가 건너 배우고, 간접적으로 들어서 알고 있던 그런 사회가 아니라, 내가 아는 인간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지 '잘 만난 남편'이란 어떤 남편인지 같은 여자로서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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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여성 해설원은 전시장을 둘러보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얘기를 나눈다. 나는 작품 감상보다 그들의 대화 내용에 더 귀를 기울였다. 남편은 이 해설원과 헤어지면서도 농담을 하며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 농담은 쉽게 이뤄질 수 없을 것처럼 들렸다.
"다음에는 우리 둘만 조용히 만납시다."
"기다리겠습네다. 그런데 선생님, 오늘 녀사님으로부터 무사하실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됩네다."
여성 안내원은 내게 눈을 찡긋했다. 우리는 끝까지 웃음 속에서 작별인사를 나눴지만, 우리의 뒷자락에는 헤어짐의 아쉬움만이 끌려오고 있었다. 미술관 앞에서 광장을 바라보니 언제 나왔는지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이제 이 광장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군사 퍼레이드 장면과 함께, 매스게임 연습을 하는 아이들과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조선미술박물관 해설원의 모습이 어우러져 내 마음속 깊이 담기게 될 것이다.
공연보러 온 사람들... 스타디움은 북적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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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설명되는 <아리랑> 공연을 보러 간다. 멀리서 보니 연꽃 모양을 한 스타디움 지붕이 보인다. 15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경기장이라고 설경이가 힘주어 얘기한다. 가까이 도착하고 보니 과연 세계에서 제일 큰 경기장이라 할만큼 규모가 엄청나다.
우리는 공연 예정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이미 많은 관광객들과 구경 온 사람들로 경기장 앞은 시끌벅적. 북한에 전기가 부족하다지만 이곳 경기장 앞은 마치 축제 마당처럼 불빛으로 화려하다. 분수대에서 각양각색의 불빛을 받으며 분수쇼가 진행되고 있다.
꼬부랑 할머니가 어린 손자의 손에 이끌려 굽은 허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힘겹게 쫓아가신다. 아이가 분수대 앞에 가더니 흥에 겨워 펄쩍펄쩍 춤추며 뛴다. 힘겹게 쫓아온 할머니도 큰 호흡을 몇 번 내쉬시더니 마냥 귀여운 손자의 모습에 손뼉을 치면서 장단을 맞추신다. 축제 기간 동안 멀리서 <아리랑> 공연을 보러 평양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와 아이, 둘 다 등에 부풀어 터질 것 같은 배낭이 있었다.
옆에서 사진을 찍던 남편이 속상해한다. 카메라의 배터리가 나갔단다. 찍고 싶은 장면들이 많은데, 그럴 수 없게 돼 무척이나 안타까워한다. 나는 "머리와 가슴으로 담아 가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낭만적인 말로 위로해봤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남편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눈동자 조리개를 활짝 열고 최선을 다해 머릿속 카메라에 담아가는 수밖에...
고난의 행군 떠올리다 눈물 흘린 설경이
공연시간이 임박해 오니 어디서 몰려 왔는지 스타디움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내 옆으로 한 그룹의 군인들이 지나간다. 설경이가 군인들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저 군복 같은 교복을 입은 남녀 중학교 학생 한 단체가 구경을 하러 온 것인 줄 알았을 게다. 너무 체격이 왜소하고 작아 어린 학생들처럼 보인다. 일부 군인들의 키가 내 눈에는 150cm 정도로 보인다. 이들이 군인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섞여 있는 여성들의 키가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런데 여성들도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난 너무 의아해 설경이에게 "저 여자아이들도 군인들이야?"라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설경이 말로는 수많은 여자아이들도 군대에 지원해 간다고 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나 같으면 도저히 못할 텐데... 여성이 군대를 지원해 남성 병사들과 함께 생활을 한다니!
남편이 만룡 안내원에게 물어본다.
"혹시 저 군인들이 어렸을 때,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시절, 잘 못 먹어서 그런 게 아닌가?"
"네, 맞습네다. 잘 보셨습네다, 선생님."
나도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북한 여행을 오기 얼마 전에 남편에게서 들었다. 1995년도부터 연달아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로 농토가 다 초토화돼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명피해.
만룡 안내원 말로는 그때 만룡 안내원도 칡뿌리를 끓여 먹었다며 도시인 평양보다 되레 농사를 짓는 지방사람들이 덜 고생을 했단다. 또, 조선 사람들이니까 해냈지, 다른 나라 사람들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설경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내가 설경이에게 나즈막이 말해줬다.
"남녘의 많은 동포들도 쌀을 보내고 싶어했어. 그런데 지금 남과 북은 대치하고 있는 상태잖아. 그래서 일부 남녘의 동포들이 북에 쌀을 보내면 군량미로 쓰인다며 반대하고 있거든."
"잘 압네다. 오래전 쌀이 남포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운송 수단이 안 좋다보니 인민 군대 트럭들이 운송을 위해 동원됐습네다. 당시 이를 지켜 보던 남조선 대표단이 몹시 불편해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네다. 군대 트럭이 쌀을 실어 날랐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충분히 리해합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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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공감이 됐다. 원산에 갔을 때 적어도 수십 년은 돼 보이는 낡은 트럭들이 뜨문뜨문 다니는 것을 봤으니까. 북한 농촌의 주요 운송 수단은 내가 어린 시절 봤던 소달구지인 것 같았다.
'고난의 행군'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지금 군대에 갈 만한 나이가 됐나 보다. 저 군인들도 사람이요, 내 아들 딸처럼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들인 것을. '북한에 식량을 보내야 한다' '아니다. 보내면 군대로 다 가기 때문에 안 된다'며 사람 생명이 달려있는 식량을 가지고 탁상공론하며 옥신각신 논쟁을 벌이던 텔레비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쌀 보내기를 반대하는 한 토론자는 "북한은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급자족해서 나온 쌀은 군대로 안 가나?
쌀을 보내면 그것이 어디로 가느니 하는 논쟁 이전에 어서 빨리 평화체제를 만들어야겠다는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그때는 나도 북한 군인들을 사람이기 이전에 그저 '무찔러야 하는 악당 로봇'이라 생각했다.
남쪽에서는 남아도는 쌀의 보관비용, 그리고 버리는 음식만 천문학적 액수라고 하는데... '가난한 자, 약한 자,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병든 자'의 친구가 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떠한 마음으로 이들을 보시고 계실까.
내가 설경이를 안고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를 하는 사이, 남편과 만룡 안내원은 군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만룡 안내원의 말로는 6년 전부터 북한에서는 병역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고 한다. 지원제를 택했단다. 남편이 깜짝 놀라 말했다.
"의무제가 아니라 지원제라고? 이런... 새빨간 거짓말하고는... 아니, 지금 여기 널린 게 군인들인데 이게 다 지원병들이란 말이야?"
"아니, 선생님. 왜 제가 선생님께 거짓말을 하나요. 6년 전부터 바뀌었습네다."
"그럼 의무제가 아니라면... 누가 군대에 가려고 해?"
(북한 군 복무제도가 지원제라는 언급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6년 전부터 지원제가 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지원제가 아니라 징집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 편집자말)
의심 많은 남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만룡 안내원이 계속 말을 이어간다.
"선생님, 그래도 남자는 다 군대에 지원해 갑네다. 여자들도 군대 안 갔다 온 남자하고는 결혼도 잘 하지 않으려 하지요. 또, 여기서는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고 말하기도 합네다."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 남이나 북이나 같은 말을 쓰고 있었구나. 이 말이 또 한 번 내 가슴을 때린다. 그런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북한에 방문한 이래 여기 사람들의 말은 다 신용이 갔는데, 병역이 지원제라는 말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만룡 안내원이 거짓말을 했던 걸까?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화려했던 <아리랑>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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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석 자리의 표를 산 우리 부부는 스타디움의 가장 중간에 앉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앉아서 봤다는 주석단 바로 옆자리다. 광대한 경기장을 한눈에 품어 볼 수 있었다. 경기장 분위기에 한층 더 압도됨을 느낀다.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반대편에서는 2만 명으로 이루어진 카드 섹션단이 연습을 하고 있다. 실제 공연 할 때에는 8만 명이 경기장 무대에 더 등장 한다고 한다. 간단히 이뤄지는 카드섹션 연습 장면 하나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10만 명이 한꺼번에 공연할 것을 생각해 보니... 상상만으로도 공연 보러 온 제값을 다 치른 것 같다.
이 큰 경기장이 어느새 다 찼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나 보다. 아름다운 조명빛에 카드섹션이 파도처럼 넘실대기 시작한다. 공연이 시작된 시각부터 끝날 때까지 10만의 공연자와 수만 명의 관객이 혼연일치가 돼 한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눈이 두 개밖에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영상화면처럼 흐르는 카드 섹션의 퍼레이드를 보고 있노라니 8만 명의 공연자가 경기장 그라운드에서 화려하게 펼치는 공연을 놓칠까봐 내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2002년의 붉은 악마가 떠오른 순간
공연하는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어떻게 저 많은 인원을 동원해 연습할 수 있었는지, 연습을 시킨 사람들, 연습한 사람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공연의 웅장함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 측면이나 기술 실력 등은 인간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그저 '벌어진 입을 다물 길이 없다'는 말밖에.
이 공연을 보면서 내 기억 속 또 다른 장면이 연상된다. 2002년 대한민국 전 국토를 붉게 물들였던 '붉은악마'들의 응원이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하나 돼 세계가 놀라도록 응원하지 않았던가. 전국 방방곡곡, 모든 광장에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모여 열광하고, 흥분해 서로 껴안고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남과 북의 이 뜨거운 열정이 하나돼 빛을 발하게 된다면 그 어떤 빛보다도 정열적인 에너지로 온 세상을 따사롭게 덮을 것이다. <아리랑> 공연을 보는 내내 우리 민족의 숨길 수 없는 강렬한 열정들이 서로 껴안는 빛으로 승화돼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등대가 되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해본다.
다음날에는 평안북도에 있는 묘향산을 가기 위해 북쪽으로 간다고 한다. 지금 여기가 북쪽인데 더 올라갈 북쪽 땅이 있단 말인가. 한반도가 그리 작은 땅덩어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