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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인가, 제약인가 — 공급론에 답함

My Proust 조회수 : 244
작성일 : 2026-07-19 10:20:54

최근 시장에 확산되는 하락론 가운데 가장 정리된 형태는 이른바 공급론입니다. 골자는 이렇습니다. 메모리는 원유와 같은 산업이다. 수요는 경제 성장을 따라 완만하게 움직일 뿐이고 사이클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공급이다. D램의 연간 출하량은 이미 수만 페타바이트에 달할 만큼 모수가 거대해서,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아무리 늘어도 전체 수요 증가율은 10% 남짓에서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슈퍼사이클은 허구이며, 지금의 가격 급등은 2022년 7월에 시작되어 한 번도 끝난 적 없는 감산이 만든 인위적 쇼티지의 결과다. HBM 때문에 범용 D램이 부족해졌다는 설명은 기업들의 선전이다 — HBM은 용량 기준 전체 메모리의 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격 효과를 보정하면 올해 수출 물량은 오히려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 그런데도 봄부터 현물 가격 일부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공급 과잉 전환은 이미 시작됐다. 피크는 3분기, 늦어도 4분기다. 장기공급계약은 주가를 위한 수사일 뿐이고, 최근 미국에서 제기된 집단소송은 3사의 의도적 동시 감산을 명시하고 있다.
감산의 시점도, 가동률도, 신규 팹이 결국 공급 과잉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통찰도 사실이거나 경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문제는 데이터가 아니라, 데이터에서 결론으로 건너가는 세 개의 다리에 있습니다.


첫째 다리: 2022년의 감산이 2026년의 부족을 설명하는가
감산이 2022년 7월, HBM 본격화 이전에 시작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공급론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 당시 기업들은 모두 적자였습니다. 다운사이클에서 적자 기업이 생산을 줄이는 것은 담합이 아니라 교과서적 대응이고, 실제로 그 국면에서 삼성전자는 오랫동안 감산 동참을 거부하며 점유율 확대를 노렸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메모리 산업은 구성원의 이해가 엇갈려 OPEC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2023년의 삼성전자가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질문은 “감산이 언제 시작됐는가”가 아니라 “이탈자의 역사를 가진 산업에서 왜 4년째 공급 절제가 유지되는가”입니다. 자발적 절제라면 사상 최고 마진 앞에서 벌써 누군가 배신했어야 합니다. 배신이 없다면, 절제가 아니라 제약을 의심해야 합니다.


둘째 다리: 6%라는 숫자는 어떤 자로 잰 것인가
그 제약의 이름이 HBM입니다. 공급론은 HBM이 용량 기준 6%에 불과하므로 94%의 생산 차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용량 기준’이라는 자가 문제입니다. HBM은 같은 용량을 만드는 데 범용 D램보다 웨이퍼를 두세 배 소모합니다. 다이 면적이 크고, 적층 수율이 낮고, 베이스 다이가 따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용량으로 6%인 HBM이 웨이퍼로는 그 몇 배의 생산능력을 점유한다는 뜻이고, 글로벌 웨이퍼 투입 총량이 2022년 피크를 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 이 점은 공급론 자신의 관찰입니다 — HBM 비중이 늘수록 범용 메모리의 실질 공급은 산술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현상을 용량의 자로 재면 ‘핑계’가 되고, 웨이퍼의 자로 재면 ‘병목’이 됩니다. 공장이 소모하는 것은 용량이 아니라 웨이퍼입니다. 저는 후자의 자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문제가 수출 물량 추정에도 있습니다. 명목 수출을 가격으로 나눠 물량을 계산할 때, 지난 1년의 가격 상승분에는 순수한 인상분만이 아니라 저가 범용품에서 고가 HBM·DDR5로의 믹스 전환이 섞여 있습니다. 혼합 평균가격으로 나누면 물량 감소는 실제보다 크게 잡힙니다. 물량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수치는 그래서 상한선으로 읽는 것이 안전하고, 그 절반만 실제라 해도 해석은 크게 달라집니다.


셋째 다리: 현물의 동요가 계약의 세계를 예언하는가
현물 가격 일부가 봄부터 흔들린다는 관찰은 사실일 것입니다. 다만 현물 시장은 소비자·유통 재고가 오가는 얕은 시장이고, AI 수요의 본체 — HBM과 서버용 고용량 모듈 — 는 애초에 현물로 거래되지 않습니다. 공급론은 장기공급계약을 주가용 수사라고 일축하지만, 선급금이 오가고 고객사별 맞춤 베이스 다이가 설계되는 계약은 가격이 떨어지면 위약금 내고 갈아타는 양해각서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맞춤 설계된 부품은 갈아끼울 수 없고, 갈아끼울 수 없는 부품의 가격은 현물의 중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납니다. 집단소송 역시 가볍게 볼 일은 아니지만, 소장의 주장은 입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D램 담합 소송은 2018년에도 제기되어 기각된 전례가 있는, 이 산업의 오래된 장르입니다. 법적 리스크로 관리하되 산업 진단의 근거로 삼기에는 이릅니다.


공급론이 옳은 곳, 그리고 남는 단 하나의 질문
공정하게 말하면, 공급론이 옳은 지점들이 있습니다. 용인과 청주, 미국과 중국의 신규 팹이 물량을 쏟아내는 2027년 전후, 공급은 반드시 시험대에 오릅니다. 2023~2025년 중국의 메모리 설비투자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합친 것의 두 배였다는 지적은 공급 측 위협의 실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가리킵니다. 

다만 바로 여기서 공급론과 저의 길이 갈라집니다. 공급론은 이 시험을 영원히 반복되는 동일한 사이클의 한 국면으로 봅니다. 돈을 벌면 공장을 짓고, 공장이 물량을 쏟으면 불황이 오는 — 원유와 같은 순환 말입니다. 저는 이 사이클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현물 시장이 가격을 결정하던 범용품의 시대에 사이클의 진폭은 잔인할 만큼 컸습니다. 그러나 선급금과 연 단위 장기계약으로 물량이 선판매되고 고객사별 맞춤 설계로 제품이 반쯤 파운드리 서비스가 되어가는 시장에서는, 같은 공급 충격도 다른 폭으로 흡수됩니다. 원유의 유비가 놓치는 것이 이것입니다 — 원유는 영원히 균질한 상품이지만, 메모리는 지금 상품이기를 그치는 중입니다. 물론 다음 다운턴은 올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2019년이나 2023년과 같은 얼굴로 오리라는 보장은 공급론의 어떤 데이터에도 없습니다.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래서 두 가지입니다 — 시험의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확신, 그리고 시험의 규칙이 예전 그대로라는 가정입니다.


수요가 신규 물량을 흡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은 메모리 가격 차트가 아니라 수요의 상류에 있습니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은 2026~2027년 약 1.8조 달러의 AI 인프라 투자를 예고했고, TSMC는 순이익 77% 급증과 함께 사상 최대 설비투자를 재확인하며 그 칩들이 지금 실제로 팔리고 있음을 증언했습니다. 이 가이던스들이 유지되는 한 2027년의 물량은 흡수될 공산이 크고, 꺾인다면 공급론이 옳았던 것이 됩니다. 판정의 첫 기일은 멀지 않습니다. 7월 말부터 이어질 빅테크 컨퍼런스 콜의 설비투자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하락론은 강세장의 취기를 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 역할은 존중하되, 데이터에서 결론으로 건너가는 세 개의 다리 — 시점의 혼동, 자의 선택, 현물의 과대평가 — 는 건너지 않겠습니다. 4년째 풀리지 않는 감산은 절제인가, 제약인가. 저의 답은 제약이고, 제약이 만든 부족은 담합이 만든 부족보다 오래갑니다.

IP : 118.235.xxx.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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