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느님의 자비주일. 미사보고 난 후에 쓴 글입니다.
자비(사랑)과 용서에 대한 저의 소고입니다.
자비란 무엇일까?
자비라는 단어는 주로 불교에서 많이 보아 왔었던것 같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자비 주일이라는 것이 있었다니.. 오늘 처음 알았다. 오랜 신자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처음 듣는 듯한 것이 많다니.. 참 부끄러울 따름이다 ;;;
어쨌건 자비와 사랑은 동의어 이다. 그러나 사랑은 감각적이거나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협소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자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듯 하다. 좀 더 크고 넓은 사랑의 의미로 씌여진게 자비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나의 경험으로 볼때 자비는 용서와 아주 관계가 깊은 것 같다.
오늘 신부님의 강론말씀대로 우리의 잘못에 대해 우리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도 그렇게 닮아야 하겠기에 생활속에서 실천을 해보려 하지만, 막상 그것을 가장 크게 가로막는 것은 나에게 있어 용서 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자비로운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모습들을 닮아보려 애쓴적이 많다. 사실 대부분 나의 삶은 그런 억지스런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고, 본성을 거슬러 자비로운 척 하려다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은 아픈기억으로 얼룩져 있다. 정말 그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비로운 척 하며 할말을 하는 대신에 기를 쓰고 참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압력은 언젠가는 빵 터져버리기 마련이다.
용서 없이 그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무조건 꿀~꺽 삼켜버린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막 흥분하면서 이런 말들을 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한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참고 넘어가줬는데..
어쩌면 그렇게 조금도 변하지 않고 또 그럴수가 있지?"
이는 주로 내가 많이 써왔던 말인데.. 어느날 갑자기 나는 내가 유독 저 말을 자꾸 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문제는 바로 내가 정말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용서가 되질 않는 상태에서 그냥 나는 어떻게든 자비로운 사람처럼 되기 위해 그렇게 멋진 성품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그냥 눈물을 삼킨 채 내 속을 억압해가며 자비로운 멘트를 날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내 속에서 없어지지 않는 그 뾰족한 것에 여전히 아파해야 했다. 어떤 스승이든 책이든 어릴때든 커서든 그런식으로 행동해야 바람직하다고 다들 권장해왔으니까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 줄 알았고 문제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속은 진정 자비로움이 없었거늘.. 저렇게 참고 자비로운 멘트를 날리면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것은 결국 화내는 타이밍을 잠시 뒤로 늦추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화에다가 은근한 불을 지피고 압력을 넣어서 후일 더 큰 화, 격노를 만들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내 속까지 자비로와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성경책을 아무리 읽어도 왠지 예수님은 뼛속까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결정적인 순간 3번이나 배신을 하고 비겁하게 도망가고 했어도 왠지 예수님은 그닥 큰 내면의 고통없이 자비롭게 대하실 수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만 든다. 본성이 자비로우신 예수님이셨기에 왠지 수월하게 저렇게 하실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다. 왠지 나처럼 크게 화가 나지도 않으셨을 것 같기에 읽으면서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그냥 넘어 갔었던 부분들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나라면 그 순간 어떤 멘트를 날렸을지 생각해본다.
" 아니 해도해도 너무 한거 아니야? 다른 제자도 아니고 수제자가 되어가지고 한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배신을 때리다니.. 아니 어떻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수없이 맹세까지 했으면서 수제자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비겁하고 졸렬하게 그리 재빨리 내뺄 수가 있는거지? 아 진짜 베드로 너무 심하다 심해. 너무 나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어. 난 용서못해! 아니 용서 안해 !! "
막 씩씩대며 분을 삭이는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그 배신감이 너무 커서 이미 쓰러져 병석에 누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베드로의 입장도 되어 본다.
" 아.. 정말 할말은 없지만.. 나도 어쩔수가 없었다고요 . 스승님은 붙잡혀 가셨지.. 사람들은 쫙 모여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바로 제자라고 말 한마디라도 하면 바로 잡혀가거나 그 자리에서 맞아죽을 듯한 분위기에서 저도 이미 공포에 질려 제 정신이 아니었다구요!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저도 모르게 3번이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이미 도망쳐 나와 있더군요ㅠ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왜 그랬는지.. 그런데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만..
저도 제가 이렇게 별볼일 없는 인간인줄 몰랐어요. 제가 배신할 줄 정말 몰랐어요. 제가 잘못한 것은 알지만.. 인간이기에..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 순간 어쩔수가 없었다고요.
제발 그만 다그쳐주세요! 제 잘못이 너무 크다는 것을 저도 안다고요. 저도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유다처럼 목매달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
뭐 대충 이렇게 외치며 변명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근데 상상해보니 나도 인간인 이상 베드로의 입장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라는 종족은 입으로 아무리 맹세를 했어도 실제 그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마구 호르몬이 분비되고.. 그 호르몬이 뿌리는 감정과 흥분에 따라 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내달린다. 그래야 인간은 안전해지니까.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극한 공포의 순간에 안전을 향한 움직임은 인간 내부에 거의 본능으로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절대절명의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움직여지는 그 본능의 흐름에 잠시 몸을 맡겼다고 하여 우리가 과연 베드로를 그렇게 손가락질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입장 바꿔 만약 내가 베드로라면 난 백퍼센트 안그랬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장담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능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경험해본적이 없거나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본다.
어쨌거나.. 나의 관심은 내가 이러한 베드로. 제대로 내 뒤통수를 때리고 배신을 한 베드로를 과연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에 있다. 베드로를 그리고 베드로 같이 내 인생에서 나를 배신했던 사람들을.. 진실로 용서를 해야 주님의 성품인 자비로움, 사랑의 성품을 가질 수가 있을터인데.. 인간에게 있어 이 용서라는 장애물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거대한 것 같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단지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아직 용서하지 못한 마음에 담아 둔 그 얽힘들 꼬임들이 내 안에는 얼마나 많던가? 엊그제의 그 일부터, 길게는 수십년 전의 일까지.. 아니 유아기 시절의 일까지.. 벼라별 일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있을것이다. 그때 그때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아 나의 내면에 아직 꼬여 있는 그것들.. 자유롭게 되지 못한 그러한 꼬임들이 수많은 별들처럼 나의 내면에 무의식에 촘촘히 박혀있다.
작은 것들은 그렇다쳐도.. 용서 하면 바로 생각나는 아직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세월가도 잊혀지지 않는 그런 큰 일부터 우선 생각해보자. 베드로처럼 나를 배신하고 혹은 나를 깊게 실망시키거나 상처를 주었던 그러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 나의 경우엔 그것이, 용서하지 못하여 남아 있는 그 검은 뭉치들이 주님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 같이 느껴진다.
용서하기. 진심으로 진정으로 마음속 깊이 용서하기.
생각해보면 용서는 내가 하는것이 아닌것 같다. 나의 의지가 발휘되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부분은 정말 내가 그 상태가 되어지기까지 내가 나를 열심히 설득하면서 애써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이는 분명 하느님의 개입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이는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 혼자서는 해내기가 너무 힘든 부분인 듯하다.
나의 노력들.. 우선 나는 역지사지로 생각해본다.
"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무리 그의 입장이라고 해도.. 나라면 그러지 않을건데 말이야 ! "
이는 주로 내가 그동안 해왔던 생각들이다. 이 생각으로는 용서에 전혀 닿을 수가 없었다. 용서와는 영원한 평행선 같은 저 문장은 용서하려는 노력에 하등 도움이 되질 않는다.
진심으로 마음속으로 용서하기 위해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내가 요즘 생각하는 것은 이렇다.
" 만약 내가그때의 그와 정확히 같은 처지라면..
그리고 그와 같은 불우한 성장환경을 똑같이 가졌더라면..
그리고 나의 의식수준이 그때 그의 의식수준과 같은 <의식수준>이라면..
아마 나도 그와 같은 말을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 라고......
아.....!!!!
아 근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뭔가 마음이 조금 움직이는 듯 했다.
만약 내가 그때 그의 <의식수준>에 있었다면..? 바로 이런식으로 생각을 해보니까 상대의 모습이 가능성 있게 좀 더 이해되기 시작했다. 상대의 처지나 성장환경을 역지사지 한 것을 넘어서서 <의식수준>이라는 부분까지 나를 벗고 그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니, 어쩌면 나라도 그처럼 행동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확 드는것이다.
그가 쓰고 있는 그 편협한 고정관념의 색안경을 똑같이 내가 쓰고 있다면..?
그가 생각하는 반경대로 나도 딱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면 나도 똑같이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겠다.. 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부분이 생각난다. 상대 이야기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나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절대 안되고,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다 벗어버리고 철저하게 그가 되어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나를 벗고 내가 상대가 되어 몰입하여 경청해야, 비로소 진심어린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 갑자기 그 책의 그 내용이 떠오르면서 이것과 연결되어 이해되기 시작했다.
자비심, 사랑가득한 성품이 되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용서를 잘 할 수 있어야 하고, 용서를 잘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을 역지사지로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철저히 벗어버리고 그의 속으로 들어가 그가 되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철저히 벗어버리는 것.
나라는 '분리된 개인'의 입장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이 그렇게들 자기를 비우라고 했구나.. 불교에서의 무아 사상도 갑자기 생각난다. 왜 나를 비워야 하지..? 도대체 나는 이렇게 괴로와 죽겠는데 저런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인거지.. ? 이렇게 의문을 가지며 씨름했던 지난날들이 갑자기생각이 난다.
나를 비워야 비로소 타인이 들어설 공간이 생기고,
나를 비워야 비로소 하느님이 내 삶에 개입하실 여지가 생기며,
또 나를 비워야 세상만물에 충만해 있는 사랑의 입자들이 비워진 내 안에 스며들어 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럴때, 그렇게 되고자 매일 조금씩 노력할때, 그리고 내 힘으로 역부족인 그런 상황에서 항상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그것. 바로 기도를 할때, 간절한 기도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간구할때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성품은 어리석은 인간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조금이나마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 그 자체이시고 자유 그 자체이신 나의 주님을 향해 한 발자욱씩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내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비워 상대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보는 것. 그리하여 내가 아닌 철저하게 상대가 되어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보는 것. 그러다 보면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그렇게 어느새 한덩어리로 녹아버리는 것이 용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하느님께 진정으로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열심히 실천하고 노력할때 바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용서가 되어지는 상태에 이르고.. 또 이게 가능해질때 하느님의 성품인 자비심(사랑)을 향해 나아 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