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차례인가?
아니, “?” 물을 필요도 없이 내 차례가 저만치 다가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처음 세상을 본 뭣 찢어지게 가난했던 고향 충남 당진 송악 가학리 초가집
어린 1~2학년 것들이 책보자기 옆구리에 끼고 흘러내리는 코를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산딸기 따서 목구멍으로 넘겨 고픈 배를 달래면서 서낭당 고갯길을 넘을 때 용천배기 몇이서 큰 바윗돌에 앉아 어디서 동냥을 했는지 깡통에 보리밥알 몇 개 둥둥 떠 맴돌이를 하는 멀건 죽을 삼키는 것을 침 꼴깍 삼키며 바라보았던 한 시간여 걸어서 등하교를 했던 고향산길
초등학교 2학년 여름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어머니 손에 이끌려 기차와 버스라는 것도 처음 타 보고 듣도 보도 못했던 전차라는 것도 처음 타고 서울 올라와 서울사리를 시작했던 왕십리(마장동) 동명초등학교 옆 움막집
움막집을 벗어나 집이랍시고 장만한 움막집 보다 크게 나을 게 없는 행당동 무허가 판잣집
그 판잣집에서 20여년을 살았으니 그 판잣집에서 내 잔뼈가 더 이상 자람을 멈춘 지금의 뼈가 되었다.
그러니 내 뼈가 박달나무 같이 단단하지를 못하고 속이 텅 빈 오동나무 같이 푸석 뼈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어렵사리 공고전기과를 나와 전력회사에 들어가서 배고픔, 즉 절대가난에서는 벗어났다.
고생 끝- 행복시작인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를 않았다.
배고픈 고생에서는 벗어났으나 눈치 보기와 마음고생이 배고픈 고통보다 훨씬 더 골머리를 뜨겁게 했다.
그랬던 것도 벌써 20여 년 전의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눈뜨고 옛 추억을 더듬어 헤매며 꿈을 꾸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이렇게 옛 추억에 잠겨 허공을 맴도는 꿈을 꾸느니 기왕이면 내 고생과 잔뼈가 오늘의 뼈로 굵은 현장들을 들러보고 옛 추억을 되돌아보자고 큰 맘 먹고 시작을 했다.
내가 처음 하늘을 보았던 고향의 초가 삼 칸 집
용천배기들이 보리 죽 먹던 서낭당산길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길이 아예 없어졌고, 초가집만 몇 채 듬성듬성 있던 고향마을도 번듯한 아스팔트길이 보란 듯이 깔려 있었다.
초가집이 현대식주택으로 탈바꿈 한 것은 몇 년 전에도 가 보았지만, 아- 그 잘 지었던 주택도 온데간데없고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3층의 휘황찬란한 절(사찰)이 위용을 뽐내고 있을 줄이야?
같은 초가집에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처음 세상을 본 4촌동생과 이 잡듯 뒤져 보아도 옛 추억의 흔적이라고는 마당가의 젊었던 감나무가 노목이 되어 “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마장동 동명초등학교 옆 움막집
학교도 동네도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동명”이라는 초등학교 이름뿐이었다.
행당동 무허가 판잣집
천지개벽이 바로 이런 것이렷다.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들어서 있던 판잣집들은 온데간데없고 초고층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하늘과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그저 옛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행당동”이라는 동네이름과 가까이에 있는 “무학여고”라는 학교이름뿐이었다.
내 청춘을 늙힌 전력회사
“한국전력주식회사”가 “한국전력공사”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옛 을지로 본사가 옛 모습 고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것도 언제 어떻게 바뀌려는지?
세상은 자연만 빼 놓고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는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잊혀져가고 있다.
자연마저도 사람의 등쌀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잊혀 질 차례는?
내 얼굴 내가 못 보니 코앞에 와 있는데도 그저 못 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