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을때까지 있을까요..??
1. ...
'19.4.23 5:55 AM (222.110.xxx.56)아무리 노력해도........운명을 거역할수 있을까요?
2. ...
'19.4.23 6:27 AM (112.166.xxx.57)인간에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게 바로 자신의 죽음이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죽음을 체감하는 정도가 다르더군요...
죽음에 대한 별 생각없이 살다가 말기암 선고 받고
그날부터 죽지 않으려 치료에 전념하는 사람
건강한 젊은날부터
육신과 영혼이 소멸하고 아무것도 되돌려 기억하고 느끼고 생각할수 없는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허무와 공포로 괴로워하는 사람
그렇게 누구나 살아있고 싶고 영원히 자신의 오감을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행복하고 싶듯이
공자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말년을 지났고
누구에게도 공평한 최후의 결말 죽음을
톨스토이 자신도 피할수 없음에 평생 극심히 고통스러워했더라고 ....
말 안하고 내색하지 않아도
곧 또는 조만간 그리고 언젠가 성큼 자신에게도 예외없이 닥쳐올
명백한 돌이킬 수 없는 삶을 떠나는 죽음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ㅠ.ㅠ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고 노심초사 다가오는 운명을 두려워하기보다
오늘을 아름답게 사는 목표에 정진하다 보면
세상에 이상적인 선행도 하게되고
나 하나의 안위보다 수많은 타인을 위한 겸허한 소금이 되는 성자의 영혼이 깃들고
인류를 위해 나를 태우고 가는 보람과 기쁨에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고
기꺼이 내 한목숨 헌신하는 행복으로 떠날수 있으리오 ~3. 지나가다
'19.4.23 6:32 AM (135.23.xxx.42)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나이 80 넘어서 계속 살고 싶을까요 ?..
건강을 잘 지켜도 우리 몸은 정확하게 우리 나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 그리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낍니까. 어차피 70대 중반 넘으면 살만큼 살았고
나머지 인생은 인간답게 산다고 말 할 수 없을거에요.
전 솔직히 70대 중반에 주위사람들에게 피해없이 깨끗하게 가고 싶어요.4. ...
'19.4.23 6:38 AM (112.166.xxx.57) - 삭제된댓글"선생은 곧 죽을 것만 같소."
공자가 대답했다. "그렇소."
"선생은 죽음을 싫어하시오?"
"그렇소."
뜻밖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공자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공자도 인간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2)고 했지만, 공자도 죽음이 두려운 때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이때였을까? 그렇게도 그가 겪은 곤경은 혹독했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죽음에 대한 처절한 두려움의 체감은 끝없는 나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찬란한 생명이 넘치는 삶의 현실에 대한 절절한 자각이기도 하다.
공자는 죽음에 대한 계로의 질문에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3)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죽음은 모르겠다거나 죽음 같은 것은 알 필요가 없으니 지금의 삶이나 열심히 살라는 충고가 아니다. 삶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무지(無知)의 고백은 죽음에 대한 앎[知]을 배경으로 한다. 그것은 죽음을 체감함으로써 생겨난,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과 애착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죽음을 생생하게 체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에 대한 생생한 체감은 삶의 현실에 대한 강렬한 긍정과 애착을 낳았다.5. ...
'19.4.23 6:38 AM (112.166.xxx.57) - 삭제된댓글"선생은 곧 죽을 것만 같소."
공자가 대답했다. "그렇소."
"선생은 죽음을 싫어하시오?"
"그렇소."
뜻밖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공자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공자도 인간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지만, 공자도 죽음이 두려운 때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이때였을까? 그렇게도 그가 겪은 곤경은 혹독했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죽음에 대한 처절한 두려움의 체감은 끝없는 나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찬란한 생명이 넘치는 삶의 현실에 대한 절절한 자각이기도 하다.
공자는 죽음에 대한 계로의 질문에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죽음은 모르겠다거나 죽음 같은 것은 알 필요가 없으니 지금의 삶이나 열심히 살라는 충고가 아니다. 삶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무지(無知)의 고백은 죽음에 대한 앎[知]을 배경으로 한다. 그것은 죽음을 체감함으로써 생겨난,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과 애착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죽음을 생생하게 체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에 대한 생생한 체감은 삶의 현실에 대한 강렬한 긍정과 애착을 낳았다.6. ...
'19.4.23 6:41 AM (112.166.xxx.57)"선생은 곧 죽을 것만 같소."
공자가 대답했다. "그렇소."
"선생은 죽음을 싫어하시오?"
"그렇소."
뜻밖이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공자도 인간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지만, 공자도 죽음이 두려운 때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이때였을까? 그렇게도 그가 겪은 곤경은 혹독했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죽음에 대한 처절한 두려움의 체감은 끝없는 나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찬란한 생명이 넘치는 삶의 현실에 대한 절절한 자각이기도 하다.
공자는 죽음에 대한 질문에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죽음은 모르겠다거나 죽음 같은 것은 알 필요가 없으니 지금의 삶이나 열심히 살라는 충고가 아니다. 삶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무지(無知)의 고백은 죽음에 대한 앎[知]을 배경으로 한다. 그것은 죽음을 체감함으로써 생겨난,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과 애착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죽음을 생생하게 체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에 대한 생생한 체감은 삶의 현실에 대한 강렬한 긍정과 애착을 낳았다.7. ...
'19.4.23 6:44 AM (112.166.xxx.57) - 삭제된댓글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세상을 더 살면서 점차 받아들임에 익숙해진다. 어릴 적엔 물고 있었던 사탕만 빼앗겨도 울며불며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이들도 조금씩 크면서 자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을 보고도 참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성인이 돼서는 아주 큰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황을 여유롭게 넘길 수 있게 되고 백발의 노인이 될 즈음엔 이 세상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거의 없을 정도로 성숙해진다. 그러나 성숙한 백발 노인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있으니 그게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 다가오면 성인군자같이 행동했던 사람도 두려워 떨며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힘겨운 걸까? 나는 레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간다. 판사로써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몸에 묵직한 통증을 느낀다. 처음 통증을 느꼈을 때 그는 별 것 아닐 거라며 웃어넘기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그는 이유를 알기 위해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으러 다닌다. 그러나 그 어떤 의사들도 통증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느 날 처남이 이반을 방문하고 그를 보고 놀라는데 이반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보고도 아내와 주변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가져올 이득에만 관심하는데 이 때문에 이반은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절망감과 주변인들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된다. 죽음이 점점 다가오면서 주변인들에 대한 증오와 고통은 더 커지고 그는 침상에 누워 자신이 닥친 상황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 것이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싶지 않기에 올바르게 살았다며 자신을 위로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성공한 인생을 살 때 자신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한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를 위로해주는 것은 아내도 자식들도 친구들도 아닌 자신의 종 제라심뿐이다. 죽음의 날이 다가오면서 3 일 동안을 비명을 지르며 보낸다. 그는 이제 진정으로 그의 인생이 끝이 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모든 것이 끝난다.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다. 이제 끝이다. 죽음에 마지막 날에 그는 자신이 인생을 올바르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갑자기 자신이 여태 것 가지고 있던 증오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그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죽는다. 이반은 죽기 직전까지 삶의 끊을 놓지 못했고 그로 인해 괴로움을 느꼈고 이러한 괴로움은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사라졌다. 이반이 판사로 잘나갈 때 행복했던 그의 모습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절망하는 그의 모습을 대조해 보며 나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과 함께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해왔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살고, 비싼 차를 사기 위해서 살고, 넓은 집을 사기 위해서 살고, 명품 가방을 메기 위해서 살고,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 살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 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그러나 우리가 평생 동안 추구하고 사는 이 가치들은 우리가 죽는 순간 전부 사라진다. 우리가 죽으면 맛있는 음식은, 비싼 차는, 넓은 집은, 명품 가방은, 명예는, 성공적인 커리어는 다 어디로 가는가? 죽을 때는 살아생전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반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은 판사일 때 사회에 최고 정점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아리따운 아내와 자식들도 있었고 넓은 집도 있었다. 그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의 힘은 매우 막강해 사람의 목숨도 죽이고 살리는 선택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맞이하자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가 가졌다고 생각했던 아리따운 아내도, 사랑했던 자식들도, 그 크고 넓은 집고,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권력도 전부 순식간에 가치를 잃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서, 죽음이 가져가버리는 가치들을 내가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내 가슴을 누군가 치는 듯한 평생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나도 제 2 의 이반이 아닌가? 명문대에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 사회에 나가서 성공해서 좋은 차를 사야한다는 생각, 수 백 평이 넘는 수영장이 딸린 집을 살 거라는 생각, 전국에서 유명해져서 사회 정상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살지 않았는가? 내가 추구했던 이 모든 가치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죽으면 전부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은 내가 이전부터 본 책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마틴루터킹 같은 인물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흑인인권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마틴루터킹은 실제로 인권운동을 하면서 백인들에게 살해위협을 수 없이 받았지만 죽음이 두려워 물러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죽음도 불사할 수 있었을까? 이는 마틴루터킹이 죽음 후에도 지속될 불멸의 가치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전에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한 일들은 전 세계 흑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고 이들은 마틴루터킹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틴루터킹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까지 탄생할 정도로 흑인들의 대한 차별이 줄어들 수 있었다. 마틴루터킹 이외에도 수많은 위인들은 이처럼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영원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고 수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은 그들이 남긴 가치를 간직하며 살아간다. 마지막 페이퍼를 쓰면서 나의 가치관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큰 변화가 왔다. 이전에는 단순히 사회적 성공만 생각했다면 파이널페이퍼를 쓴 이후에는 내가 하는 노력들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때도 이쯤이다. 사실 한국에서 영어강사로써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빠른 길은 단어 몇 개를 섞어서 말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일시적 방법들이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짜 영어를 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말 몇 마디만 나오게 해주면 만족을 하고 실제로 영어실력이 늘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단기적 영어말하기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진짜 영어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강세라는 것은 영어에 왜 필요하며 듣기와 읽기는 인풋이고 말하기와 쓰기는 아웃풋이기 때문에 인풋이 없이는 절대 아웃풋도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들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이지만 세상에는 영어를 잘하길 원하는 수많은 눈 먼 학생들을 속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교육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사실을 내가 알리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바탕으로 영어를 가르치기로 다짐했다. 지금은 20 대 아직 창창한 나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죽음을 맞이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80 이 넘은 나이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좋은 시계를 차고 있다 고해도, 좋은 차를 샀다고 해도, 궁궐 같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나를 진정으로 기쁘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내 욕심만 채우기 위해 인생을 산다면 이반일리치가 겪은 상황을 똑같이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죽기 전에 많은 이에게 뭔가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이반과 같이 처절하게 고통 받으며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8. ...
'19.4.23 6:47 AM (112.166.xxx.57) - 삭제된댓글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세상을 더 살면서 점차 받아들임에 익숙해진다. 어릴 적엔 물고 있었던 사탕만 빼앗겨도 울며불며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이들도 조금씩 크면서 자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을 보고도 참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성인이 돼서는 아주 큰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황을 여유롭게 넘길 수 있게 되고 백발의 노인이 될 즈음엔 이 세상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거의 없을 정도로 성숙해진다. 그러나 성숙한 백발 노인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있으니 그게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 다가오면 성인군자같이 행동했던 사람도 두려워 떨며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힘겨운 걸까? 나는 레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간다. 판사로써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몸에 묵직한 통증을 느낀다. 처음 통증을 느꼈을 때 그는 별 것 아닐 거라며 웃어넘기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그는 이유를 알기 위해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으러 다닌다. 그러나 그 어떤 의사들도 통증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느 날 처남이 이반을 방문하고 그를 보고 놀라는데 이반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보고도 아내와 주변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가져올 이득에만 관심하는데 이 때문에 이반은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절망감과 주변인들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된다. 죽음이 점점 다가오면서 주변인들에 대한 증오와 고통은 더 커지고 그는 침상에 누워 자신이 닥친 상황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 것이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싶지 않기에 올바르게 살았다며 자신을 위로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성공한 인생을 살 때 자신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한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를 위로해주는 것은 아내도 자식들도 친구들도 아닌 자신의 종 제라심뿐이다. 죽음의 날이 다가오면서 3 일 동안을 비명을 지르며 보낸다. 그는 이제 진정으로 그의 인생이 끝이 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모든 것이 끝난다.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다. 이제 끝이다. 죽음에 마지막 날에 그는 자신이 인생을 올바르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갑자기 자신이 여태 것 가지고 있던 증오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그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죽는다. 이반은 죽기 직전까지 삶의 끊을 놓지 못했고 그로 인해 괴로움을 느꼈고 이러한 괴로움은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사라졌다. 이반이 판사로 잘나갈 때 행복했던 그의 모습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절망하는 그의 모습을 대조해 보며 나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과 함께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해왔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살고, 비싼 차를 사기 위해서 살고, 넓은 집을 사기 위해서 살고, 명품 가방을 메기 위해서 살고,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 살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 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그러나 우리가 평생 동안 추구하고 사는 이 가치들은 우리가 죽는 순간 전부 사라진다. 우리가 죽으면 맛있는 음식은, 비싼 차는, 넓은 집은, 명품 가방은, 명예는, 성공적인 커리어는 다 어디로 가는가? 죽을 때는 살아생전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반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은 판사일 때 사회에 최고 정점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아리따운 아내와 자식들도 있었고 넓은 집도 있었다. 그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의 힘은 매우 막강해 사람의 목숨도 죽이고 살리는 선택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맞이하자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가 가졌다고 생각했던 아리따운 아내도, 사랑했던 자식들도, 그 크고 넓은 집고,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권력도 전부 순식간에 가치를 잃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서, 죽음이 가져가버리는 가치들을 내가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내 가슴을 누군가 치는 듯한 평생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나도 제 2 의 이반이 아닌가? 명문대에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 사회에 나가서 성공해서 좋은 차를 사야한다는 생각, 수 백 평이 넘는 수영장이 딸린 집을 살 거라는 생각, 전국에서 유명해져서 사회 정상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살지 않았는가? 내가 추구했던 이 모든 가치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죽으면 전부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은 내가 이전부터 본 책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마틴루터킹 같은 인물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흑인인권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마틴루터킹은 실제로 인권운동을 하면서 백인들에게 살해위협을 수 없이 받았지만 죽음이 두려워 물러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죽음도 불사할 수 있었을까? 이는 마틴루터킹이 죽음 후에도 지속될 불멸의 가치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전에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한 일들은 전 세계 흑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고 이들은 마틴루터킹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틴루터킹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까지 탄생할 정도로 흑인들의 대한 차별이 줄어들 수 있었다. 마틴루터킹 이외에도 수많은 위인들은 이처럼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영원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고 수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은 그들이 남긴 가치를 간직하며 살아간다.
9. 다가오면
'19.4.23 7:11 AM (59.6.xxx.151)더 커지겠죠. 다른 모든 일처럼요
다만 체념하는 거고요
몸이 기억한다
원래 영장류의 수명은 오십년이에요
깨끗이 가고 싶다는 모두의 소망이지 병에 시달리고 치매 아니여도 노화에 오는 판단력 상실등을 겪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요즘 치매니 뭐니 가 많아진 건 몸 노화는 이십년이상 늦추는데 뇌 노화는 사십대만 되어도 옛날만 못해 할 정도로 막아지지 않아요
암튼 오래 살고 싶다 는 원글님이 솔직하신 겁니다
며칠 전에도 운동하면 기대수명이 짧다 운동하지 말자 가 베스트였어요
운동이 몸에 활력을 주는 건 맞으니
그러먼 운동하며 활기있게 살다 일찍 죽으니 좋은 일이겠죠?ㅎㅎㅎ10. 궁금한게
'19.4.23 7:41 AM (114.206.xxx.206)원글님 나이가 어찌 되시나요.
생활이 정말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힘든일 안겪으신 분인지..
전 나이 오십에 하도 풍파 많이 겪어서인지 삶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어요.
그렇다고 죽고싶다가 아니라 그냥 어느날 잠자듯 조용히 가버리고 싶다 라는 생각이 많이 들던데..11. 궁금한게
'19.4.23 7:43 AM (114.206.xxx.206)아 마흔이라고 쓰셨군요...
12. 아주아주
'19.4.23 7:59 AM (125.187.xxx.37)막연하게 죽으면 편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가비고 있어요. 죽는 과정만 너무 힘들지 않다면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크지 않은 것 같은 사람입니다 . 50중반지났어요
전 가끔 운전하다가 저 트럭이 내차를 받아준다면 죽을 수 있는 거구나 . 그런 생각해요. 그럴 때 크게 무섭지는 않아요. 근데 못죽고 다치기만 할까봐 그건 무서워요13. ....
'19.4.23 8:11 AM (112.170.xxx.23)죽으면 너무 평온할거 같지 않나요?
나쁘지 않을거 같은데14. .....
'19.4.23 8:14 AM (1.227.xxx.251) - 삭제된댓글저도 암 선고 들었을때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이 들었어요
뭐랄까 이제 이 힘든 세상 안살아도 되는구나..같은거요
죽음이 두려움 공포라기 보다 최고의 카타르시스, 평온함, 다른세상에서 태어남 이라고 생각합니다15. 죽음은
'19.4.23 8:22 AM (1.250.xxx.139)공평합니다
나만 죽는게 아니고 이세상 모든 사람은 죽거든요
저는 죽음이 아직까지는 두려운 대상은 아닙니나
어찌보면 이세상 고단한 삶을 마무리 한다는 것이
홀가분 하기도 할거 같아서
저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구요16. ..
'19.4.23 8:22 AM (223.33.xxx.221)오랫동안 살고싶다는 생각도 너무 무섭네요
집착같아서...
저는 개인적으로 노신분들이 보약 엄청 챙겨드시는 분 보면 좀 무섭더라구요 ㅠ17. ...
'19.4.23 8:30 AM (175.198.xxx.247)죽음 자체는 괜찮은데
죽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울까봐 그게 무서워요.
정말 죽는 본인만 알겠지만 고통없이 갈 수 있지만 제 수명 다 하기 전에 미리 신청해서 자는듯 안락사 하고 싶어요.18. 아무리 100세
'19.4.23 8:30 AM (119.198.xxx.59)시대라고 해도
80 넘어서 계속 살고 싶을까?
ㅡㅡㅡㅡㅡㅡㅡㅡ
살고 싶을 거예요
이 좋은 세상~~하면서 죽기 싫다던데요
올해 90세인 할머니가요
그리고 키에슬롭스키 다큐에 잠깐 스치듯 출연한
족히 200살은 되보이는 할머니가
자기 꿈은 장수하는 거래요
실제 나이는 100세 가까이 되더군요.
오래살아도 오래산 것처럼 안느껴지나봐요
실제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그 냥 이 세상이 한 순간의 꿈인듯
그래서 세월의 흐름을 본인들은 못느끼겠죠.
하긴 만 10세 이전에 느끼던
하루 24시간이 일주일처럼 길게 느껴지던 시간과
나이들어
하루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어찌 같을까요19. 돈떨어지면죽는거죠
'19.4.23 8:35 AM (218.154.xxx.140)자기가 돈 안벌면 이 좋은 세상~~ 안죽고 싶다. 되는거죠.
정부든 자식이든 돈 끊어봐요.
이 힘든 세상 빨리 "떠나고 싶다 되는거죠.
자기가 돈 안벌고 편하니 오래살고 싶은겁니다.
늙은몸 이끌고 돈벌러 다니면 누가 오래살고 싶겠어요?20. 그게
'19.4.23 9:06 AM (221.143.xxx.238)학습된거 아닌가요? 어린시절부터 가족이나 주변으로부터 죽음은 나쁘고,흉하며,아프며 어떠어떠하니 죽음은 마땅히 공포스럽고 괴로운거다 하고요. 죽음에 대한 공포란 감정이 인간에게 없다면 자폭 테러리스트나 광신도가 되기 딱 좋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철학과 인생관, 가치관, 사상, 역사, 이념, 종교 등의 시발점이라고들 하고요. 어릴때의 감정들이 (예를 들어 어느 장난감을 사랑한다든가, 뱀장어를 뱀인줄 알고 징그러워한다든가.....) 변전하고, 변이 하고, 전환되고,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듯이 지금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확대되고 확대 공포반응을 일으키는 감정들도 앞의 과정들을 겪을지도, 인생의 거센 비바람과 풍랑이 몰아치면 삶도 지치고 생각들도 변전할수도 있는거고....
21. ㅇㅇ
'19.4.23 9:14 AM (39.7.xxx.229)여기 댓글다는 분 중에 90프로는 님 심정 이해 못하고 다는 거예요. 저도 님 같이 죽음의 공포가 너무 심해서 중학교때는 자다가 갑자기 '죽음'이 너무 무서워서 깨서 울고 그랬어요. 나 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건데 그거에 대한 깊은 공감이 일반사람들은 잘 안돼요ㅡ 그래서 저런식으로 죽으면 평온하지머~~ 이렇게 댓글 다는 겁니다. 저건 죽음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거예요. 나 라는 존재가 아예 '무'가 된다는 공포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거예요.
저도 님하고 비슷한 나이인데요
아빠가 돌아가시고나서 약간 나아졌어요.
어쩌면 죽어서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뭐 그런걸로 약간은 극복되었어요..22. ㅇㅇ
'19.4.23 10:31 AM (222.114.xxx.110)너무 오래살면 필요이상의 많은 것을 알게되고 그럼 살아가는 의욕을 잃거나 나쁘게는 인간을 이용하고 군림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때가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23. ...
'19.4.23 11:00 AM (175.113.xxx.252) - 삭제된댓글39님네...저도 어릴때 갑자기 그런 생각하고 깨서 잠 잔적도 있어요.. 솔직히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거 그고 너무 무서워요..근데 그게 나이가 먹어도 그 공포감이 안없어지네요 ..
24. ...
'19.4.23 11:01 AM (175.113.xxx.252) - 삭제된댓글39님네...저도 어릴때 갑자기 그런 생각하고 깨서 잠 못 잔적도 있어요.. 솔직히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거 그고 너무 무서워요..근데 그게 나이가 먹어도 그 공포감이 안없어지네요 ..
25. ...
'19.4.23 11:02 AM (175.113.xxx.252) - 삭제된댓글9님네...저도 어릴때 갑자기 그런 생각하고 깨서 잠 못 잔적도 있어요.. 솔직히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거 그거 너무 무서워요..근데 그게 나이가 먹어도 그 공포감이 안없어지네요 ..
26. ...
'19.4.23 11:02 AM (175.113.xxx.252)39님네...저도 어릴때 갑자기 그런 생각하고 깨서 잠 못 잔적도 있어요.. 솔직히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거 그거 너무 무서워요..근데 그게 나이가 먹어도 그 공포감이 안없어지네요 ..
27. 나란
'19.4.23 4:59 PM (125.187.xxx.37)존재가 사라지는 게 그토록 두려우실 수도 있군요. 근데 그게 두렵지 않은 사람도 있답니다. ㅇㅇ님 생각을 안해본 게 아니라 두렵지 않은 거예요.
28. 평온
'19.4.23 5:24 PM (112.170.xxx.23)모든 사람이 죽음공포증을 갖고있는건 아니에요.
생각이 부족한건 39.7님인듯...29. .......
'19.4.23 7:28 PM (175.223.xxx.49)깊이 생각을 안해봐서 안 두려운거라니
그건 아닌데요.
저도 어릴적부터 많이 무섭다 생각했다가, 나이가 더 들면서 사람도 그냥 자연의 일부일뿐,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되었어요.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태어나고..그게 순리라는걸 받아들이면 그 두려움이 사라지더군요.
오히려 한참을 깊이 생각한 끝에 생각의 흐름을 바꾼거에요. 39.7님이야말로 더 생각해보세요.30. ....
'19.5.9 2:16 PM (121.152.xxx.123) - 삭제된댓글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단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 효과음처럼 죽음은 언제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온갖 몸짓이 끝나고 나면 자기의 소멸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고뇌 앞에서는 모든 즐거움이
물거품이 되었다.
20세기 말에 우디 앨런이라는 미국의 철학자(주1)는 그 시대를 풍미하던
정신적인 분위기를 이런 문장으로 표현했다.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기에, 인간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없으리라.31. ....
'19.5.9 2:17 PM (121.152.xxx.123)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단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 효과음처럼 죽음은 언제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온갖 몸짓이 끝나고 나면 자기의 소멸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고뇌 앞에서는 모든 즐거움이
물거품이 되었다.
20세기 말에 우디 앨런이라는 미국의 철학자는 그 시대를 풍미하던
정신적인 분위기를 이런 문장으로 표현했다.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기에, 인간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없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