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창촌 문화를 몰고 왔다고 하면 이런 의문이 떠오르죠.
인류가 생긴 이래 쭉 있어온 직업인데 조선에는 없었을 리가 없잖아~라고요.
그러나, 조선과 일본은 모든 사고방식, 성격, 문화 자체가 아주 달랐습니다.
우선 조선은 유교 선비문화로 기생문화가 있었지만 기생은 예인(예술인)으로서
1패, 2패, 3패가 있어 1패는 절대 매춘을 하지 않고 오직 예술로만 승부를 보았습니다.
2패, 3패도 매춘을 하긴 했지만 현대의 집창촌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 술과 기예를 묶어서
파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서울에 일본의 유곽과 비슷한 시설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유곽 문화는 매우 보편적인 것이어서 메이지유신 이래 정치인들도 모임하는 장소로
유곽을 이용할 정도였고, 공인된 집창촌으로 17세기부터 사무라이들이 성을 배설하는 장소로
수도 에도에 밥먹고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번성했다고 합니다.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수십만명의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자
일본인들은 본국에서 하던 필요에 의해 8천 3백평의 땅을 헐값에 사서
신마치라는 이름을 붙여 유곽 동네를 조성합니다.
임종국은 "밤의 일제침략사"에서 말합니다.
-매창불매음(노래는 팔되 매음은 하지 않는다)로 통하던 전통적인 밤의 세계에 왜풍이 밀려들어왔다.
1930년 무렵의 기녀 수는 게이샤(일본인이 이용하는 일본기생)가 도합 350명인데 비해 한국 기생은 500명이다.
이 해의 인구비율은 조선인 1천 9백 68만명인 데 비해 일본인은 5십만이다.
일인 1,434명에 1명꼴인 기생 수가 조선인은 4만 3천 700명에 1명 꼴로 일본인들의 호색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서울뿐 아니라 인천, 부산, 대전, 대구, 평양, 원산, 진남포, 청진,나남, 군산, 목포 등 다른 도시들에도
잇따라 설치된 유곽은 조선인들의 유교문화를 교란시키면서 청년들을 타락시켰습니다.
1919년 시카고 트리뷴 지는 12월 26일 지면에 "일본인들이 조선에 악의 시스템을 전달했다.
일본인이 조선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인종차별적인 공창을 만든 것.
조선에는 본래 이러한 악의 거리가 없었다.
이러한 공창은 조선인 남녀의 성적 타락을 위해 일본이 치밀하게 도입한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승우 저 "전쟁, 굶주린 일본 두려운 한국"에서 참조,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