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이르자 해녀의집이 보였다. 이제 스웨터를 벗을 때도 됐는데 한 할머니가 스웨터를 입고 서 계신다.
“안녕하세요!”
아이와 내가 함께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우리는 올레길을 걸으면서 꼬박꼬박 인사를 했다.
올레꾼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인사, 제주 어른들을 만나면 감사의 인사.
“이리 좀 와봐.”
할머니가 손짓으로 우리를 불러세웠다.
“인사를 해줘 고마워서…….”
할머니는 이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 이리저리 뒤지더니 밀감 두 개를 꺼내 내미셨다.
밀감농사를 짓는 사람이 할머니 먹으라고 준 건데 우리더러 먹으란다.
받고 보니 한 개는 물러서 먹을 수가 없다. 그래도 모른 척하고 껍질을 까서
맛있는 척하고 먹으려니 절로 얼굴이 찌그러진다.
“그거 못 먹겠는데.”
눈썰미가 좋으신 할머니다. 얼른 내 손에서 빼앗아 멀리 내던지신다.
에구, 올레길 걸을 때는 귤껍질 하나도 길가에 안 버리는데 동네 할머니가 마구 버리시다니!
아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할머니는 해녀라고 했다.
물에 들어가려다 몸살기가 있어 그냥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우리가 크게 인사를
해줘서 너무 고마웠단다. 보통은 그냥 지나간다며.
“나도 한때는 처녀였어. 나도 한때는 처녀였다고. 나 불쌍한 여자야.
나 스무 살에 시집와서 스물한 살에 우리 아들 낳았어. 남편은 다른 여자한테 가고…….”
해녀일을 해서 아들을 키웠다는 할머니.
어느새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아이 손을 잡고 마른 눈물을 흘리신다.
일흔도 훨씬 넘은 할머니의 마른 눈물은 우리를 당황시켰다.
아이는 어찌할 줄 모르고 내 얼굴만 쳐다본다. 할머니는 노래 한 자락도 불러제꼈다.
무슨 노래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 제주도 사투리까지 섞여 있어 사실 말 알아듣는 것도 쉽지 않다.
할머니를 뒤로 하고 걷는데 아이가 문득 말했다.
“엄마, 근데 누구나 다 한때는 처녀 아녜요?”
“그러게. 엄마도 한때는 처녀였지.”
처녀, 라는 낱말이 아주 낯선 단어처럼 느껴졌다.
나도 한때는 처녀였다.
할머니의 마른 눈물과 함께 처녀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얼마를 걷고 있는데
‘어여어여’,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정신없이 뛰어오고 계셨다.
우리는 깜짝 놀라 뛰어갔다.
“이거, 내 주머니에 있는 거 전부야. 가다가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어. 우리 예쁜 애기!”
할머니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재영이 손에 쥐어줬다.
그 돈을 차마 받을 수 없어 재영이는 엉거주춤하고,
나는 나대로 됐다고 할머니 손을 뿌리쳤지만 할머니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우리가 큰소리로 인사를 하자 할머니는 우리보다 먼저 뒤돌아 노래를 부르시며 우리를 따라
뛰어왔던 길을 되돌아가셨다.
스무 살 처녀가 결혼을 해 이듬해 아들 하나 낳고 물질을 하며 살아온 평생의 세월이 할머
니 어깨에 고스란히 올라가 있었다. 저 작은 어깨, 저 작은 몸. 할머니는 덩실거리며 길을
걷는다. 길에서 만난 아이가 당신에게 인사를 한 것이, 길에서 만난 당신 며느리 같은 여자
가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 즐거운 할머니. 할머니는 몸살기가 가시면 다시 물에 들어가시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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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처녀였다
올리브나무사이 |
조회수 : 2,360 |
추천수 : 231
작성일 : 2010-07-05 17: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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