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처럼 적어서 다체?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려요 *^^*)
나만의 힐링푸드 떡국
시골에 큰어머니가 계신다 아들은 네 명이고 딸은 없다
명절이면 눈 마주칠 사이 없이 분주히 부엌과 마루를 오가며 차례음식을 차려내고는 숨 돌릴 사이 없이 수 십여명의 밥상
을 차려내곤 하셨다 추석에는 나물비빔밥에 특유의 젓갈내가 나는 배추김치가 전부였고 설날에는 떡국이 나왔는데 고명이
라곤 노른자 흰자 가늘게 채 썬 달걀고명에 가위질한 김 몇 가닥이 전부였다 김을 무척 좋아하던 나는 떡국이 차려지면 주
섬거리다 김이 좀더 많이 엊혀진 떡국 앞에 앉곤 했다. 그렇게 단순하다 못해 소박한 떡국이래도 이만저만한 정성이 아니
라는 걸 철들고서야 알았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란 말이 있다. 쌀알 한 톨이 만들어지기까지 농부의 땀이 칠근이나 소요된다는 뜻인데 얼핏 과장되
어 보이지만 고단한 과정과 수고의 의미를 합쳐서 생각하면 될듯하다
큰아버지 내외께서 직접 재배한 쌀을 뭔가 나타날 듯 늘 어두컴컴한 시골창고 옆, 문지기처럼 버티고 서있던 도정기를
통해 쌀알이 아이보리빛깔로 탈피하여 주르륵 흘러내린다
쌀을 씻어 물을 빼고 큰 대야나 손잡이 달린 바케스에 쌀을 넣고 하루에 몇 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 늘 똑같은 풍경을
늘 그래왔다는 듯이 바라보며 방앗간에 가서 떡을 해오신 다고 했다 하루해가 저물 즈음 돌아와 온기가 남아있는
떡살을 일일이 방바닥에 널어 말려 썰기 좋게 꼬득해지면 동그랗지도 너무 어슷하지도 않은 살짝 어슷하고 얇은 떡살을
썰어낸다 했다. 명절마다 수 십명의, 그야말로 식구(食口)들을 먹이고 또 한 봉지씩 들려 보낼 정도의 양이면 어느 정도
썰어야했을까, 짐작이 가질 않았다
떡국에 올려지는 계란고명은 또 비린내가 안나는 고소하고도 노란색이 선명한 것이었는데 반들반들 질이난 안채 마루에
앉으면 마주보이는 닭장 속 토종닭들이 낳은 알로 구워낸 것이었다
닭장은 앞에서 보면 자그마해보이는데 높이가 넉넉하고 뒤곁이 길어 닭들은 높이 날기도 하고 충분히 산책도 할 수 있고
가끔 졸린 표정으로 알을 품는 암탉의 모습도 볼 수 있는 풍경을 지녀 알을 얻어먹어도 적어도 미안하지 않는 환경이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줄맞춰 쫑알거리던 노란 병아리 몇 마리도 생각이 난다,
간은 집간장으로 했다, 여름 태양에 땡글땡글 익었을 메주콩으로 메주를 담아 바람도 불고 볕도 좋은 날 걸었을 것이다
좋다는 날을 골라 장을 담그고 깊은 색깔로 우러난 간장 -장독에서 근심없이 퍼왔을- 그런 장으로 간을 낸 떡국,,
소박해보이기 그지없지만 하나 하나 정성을 담은 내게는 소중한 떡국 이었다.
결혼하고는 한 번도 명절에 그 곳에서 그 떡국을 먹지 못했다. 나또한 큰어머니 처럼 종부가 되어 큰어머니처럼 눈 마주칠
사이 없이 일하며 시간을 보내야했으니, 그래서일까
떡국은 그리움이고 어린 시절의 추억의 일부분이자 정성의 집합체로 여겨졌다,
신혼때 혼자서 밀린 집안일을 하다 허기가 져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큰어머니의 떡국살이 눈에 들어왔다, 살림이라곤 모르
던 시절, 살림교과서라는 것이 존재했더라면 목차 정도 겨우 훝었을 그런 시절 곁눈질로 익혔던 솜씨로 멸치육수를 내고
집간장으로 얼추 비슷하게 간을 맞췄더랬다, 가을은 하염없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 막 결혼하여 생경하던 모든 것들이 합해져 어깨를 짓눌러왔고 짐짓 무던하려했던 마음은 익은 떡국살처럼 풀어져갔다
결국 떡국을 앞에 놓고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시 못 올 그리운 시절과 고단한 시간의 알 수 없는 깊고도 검은 터널 앞
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때의 나는 그저 작은 아이였다.
이후로 가끔 일이 잘 안풀리거나 수다 떨 친구가 그 날따라 바쁘거나
마음이 구멍났을때. 떡국은 나의 위로가 되어주고 구멍을 메워주는 보수제가 되어주었다,
참 고마운 나만의 음식,
여전히 큰어머니는 때가 되면 늘 그래왔던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떡국살을 썰고 계신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정성이
나는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