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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이'-

| 조회수 : 1,554 | 추천수 : 9
작성일 : 2005-02-20 23:41:22






“나는 레이 찰스를 모른다”라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 유명한 가수고 “나는 레이 찰스를 안다”라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 위대한 가수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고 나서는 더 이상 레이를 모른다고 할 수 없게 됐다.


영화 ‘레이’를 보러가기 전 나는 대학시절 동창과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의 대화 내용은 시중의 경기가 안 좋아 문 닫는 가게가 많다는 것과 저작권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 음반 시장이 침체를 못 벗어나고 있다는 얘기에 집중돼 있었다.


“사는 게 그렇지, 뭐.”


얼큰한 생태찌개 위로 소주가 몇 잔 오간 뒤 우리는 ‘레이’ 시사회장으로 향했다. 시사회장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동굴 속처럼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엉켜 울렸고,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다들 빈손으로 잔칫집에 온 듯 어색해 하며 상영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8년 플로리다. 그레이 하운드 버스가 허름한 시골로 들어오면서 영화는 시작됐다. 제이미 폭스가 노란색 뿔테의 선글라스를 끼고 진정 보이지 않는 긴 여행길 앞에 서 있었다. 아니, 레이가 거기에 있었다.


“레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남부에서 자라났고, 흑인이며 나 또한 예술가다. 레이는 나 스스로를 알게 해주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없다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나는 레이 찰스의 영원한 학생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제이미 폭스는 레이 찰스가 되어갔다. 테일러 핵포드 감독은 제이미가 많은 장면 속에서 배우나 의상이나 그 밖의 세트들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연기를 했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이 흐르자 관객들은 서서히 현실감을 잃고 영화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완벽한 립싱크로 마무리된 레이의 노래는 더 이상 레이와 제이미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지런한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웃음과 어깨가 통째로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리는 제스처, 약간 팔자로 벌어지고 뒤꿈치부터 땅에 닿는 듯한 걸음걸이, 그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의 가난과 불행한 사건들 위에 완벽하게 재현됐다.


회상 장면으로 처리된 어린시절은 시력을 잃어가는 어린 레이와 동생 죠지의 익사 장면을 담고 있었는데 영화와 레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다. 더 이상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일곱 살 이전에 레이가 보았던 것들은 흙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가족의 가난뿐이었다. 그런 그가 암흑 속에서 일궈낸 주옥같은 노래로 명성을 쌓아간다.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을 담고 있는 영화다.


1961년 조지아주는 인종 차별에 반대한 레이가 연주를 거절하자 주 내에서의 공연을 금지시켰다. 1979년 조지아주는 공연금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사과와 함께 그의 노래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를 조지아주 노래로 선포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실질적인 아메리칸 드림은 그의 사후에 이루어진다. 레이는 생의 마지막에 “모든 걸 사회에 환원하고 여러분께 받은 사랑만 갖고 갑니다”라고 유언하고는 2천만달러를 아프리칸-아메리칸 대학과 맹인 농아 자선단체에 기부를 했다고 한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은 말을 잃었다. 시작할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친구 녀석이 말했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보이는 게 아무리 부질없다고 해도….”


신이 내게서 빛을 거두어가며 명성과 부를 주겠다고 약속을 한들 그걸 따를 수 있을까? 레이는 과연 강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공식 행사자리에서 늙은 가수의 목소리는 찌그러지고 쇠약하고 불분명해서 거의 듣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는 에너지를 모으려고, 숨을 모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드디어 가늘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6주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사람의 일생을 그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로 친다고 한다. 레이가 언제 모든 이들에게서 잊혀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창완|가수〉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진진진
    '05.2.21 12:39 AM

    오늘 티비에서 영화관련 프로에서 레이를 맛보기로 보았는데 주인공의 연기가 눈길을 끌더군요
    흑인노래의 애잔한 혹은 쉰듯한 때론 끈끈한 노래와 함께요
    옛적에 들었던 노래들이라 (어릴때) 반갑기도 하고요
    애들에게도 흑인 특유의 음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기회라 애들과 보러가렵니다

  • 2. 피글렛
    '05.2.21 6:49 AM

    Georgia on my mind.....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인데....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어요.

  • 3. 깜찌기 펭
    '05.2.21 1:13 PM

    개봉만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갈수있을지.. ^^;;

  • 4. tazo
    '05.2.21 2:13 PM

    Jamie foxx주연배우지요 얼마전 저희도 이영화 디비디로 보았는데 스페셜피쳐에 나온걸보니까.영화를 위해 Ray에게서 94개의 그의 곡을 직접 배웠답니다. 음악을 전공하였다고는하나 그건정말 쉬운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영화의 음악은 물론 Ray의 목소리의 노래 이지만 피아노 칠때의 손의 버릇까지도 배웠다고 하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경외감 마저 갖게 해주더군요. 그리고 영화 찍는동안 가짜 눈거풀을 눈에 붙여 진자 장님으로 영화에 임했다더군요.가슴이 찡하던 영화였습니다.

  • 5. 커피러버
    '05.2.22 11:39 AM

    저도 티비에서 맛보기로 보곤 정말 기다려지는 영화입니다.
    아그들 땜에 영화관에 간지 몇년인거 같은데 이런 대작은 영화관에서 봐야 감동 찌릿찌릿할 것 같은데..
    넘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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