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먼샤댐과 싼샤댐의 비극 :
준비 없는 대규모 토목공사는 재앙을 부른다
이 준 구
1. 머리말
최근 중국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황허(黃河)의 싼먼샤(三門峽)댐이 불러일으킨 재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62년 완공된 이 댐은 환경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
내로 밀어붙인 대규모 토목공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해주고 있
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그 참담한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양쯔강(楊子江)에 싼샤(三
峽)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 댐이 완공된 지 몇 년도 되
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심각한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어, 과연 앞으로 어떤 뜻밖의 재앙이 닥
치게 될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나는 중국의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4
대강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싼먼샤댐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 시점에
서부터 환경 측면의 문제점을 들어 줄기차게 반대한 선각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그의 정당한 지적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그 후 싼샤댐 건설 여부가
논의되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중
국정부는 이번에도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댐 건설계획을 밀어붙였다.
나는 이 두 댐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우리 사회에서 재현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환경에 미칠 악영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급
하게 밀어붙이는 4대강사업이 싼먼샤댐이나 싼샤댐의 경우에 비해 더 나을 게 없다는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두 댐이 일으킨 정도의 문제 혹은 그 이상의 문제까지 발생할 가능
성이 커 보인다. 너무 늦기 전에 냉정을 되찾아 과연 4대강사업을 이대로 밀어붙여도 좋은
지의 여부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차원
에서 중국의 그 두 댐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남들이 이미 써놓은 글들을 정
리한 것일 뿐 아니라, 내가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글에는 나름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사건 전개 위주의 평면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내 의견은 별로 드러
나 있지 못한 점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다.
2. 싼먼샤댐의 비극
1954년 4월 중국 국가계획위원회는 소련 전문가들의 지도하에 황허유역 개발계획의 밑그
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해 말 <황허 수해를 다스리고 황허 수리를 개발하는 것에 대한 종
합계획 보고서>가 작성, 발표되었는데, 그 안에 바로 그 싼먼샤댐의 건설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5년 7월 전국인민대표회의 2차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그 보고서에 따르
면, 싼먼샤댐은 350미터의 높이로 건설되고 그 안에 360억?의 물을 가둬둘 수 있도록 계
획되었다.
그 보고서는 싼먼샤댐 건설사업에 대해 긴 세월 홍수를 일으켜 왔던 황허를 국민에게 이
득을 가져다주는 강으로 바꾸는 동시에, 흙탕물이 흐르던 강을 맑은 물이 흐르는 강으로 바
꾸는 역사적 사업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아가 약 5만에 달하는 농지에 물을 공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90만의 발전까지 가능해진다고 덧붙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댐 하류의
뱃길 개선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득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보고서 어디를 보아도 1천 이상의 농지가 유실되고 60만 명 이상의 주
민들이 수몰지구로부터 이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상류에서
내려오는 토사가 쌓여 30년 정도가 지나면 댐 자체가 토사에 묻히게 된다는 점에 대한 언
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댐 하류로 토사가 내려가지 않게 만든다면 당연히 댐 상류에 토사
가 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싼먼샤댐이 갖는 이점의 홍보에만 눈이 먼 중국정부는 그 초
보적인 사실조차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싼먼샤댐 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그 계획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선 한 사람
의 선각자가 있었다. 황완리(黃萬里) 교수가 바로 그 사람인데, 그는 미국 Illinois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3년부터 칭화(淸華)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수리 전문가였
다. 1956년 5월 그는 황허유역 건설계획위원회에 싼먼샤 댐 건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황
허 싼먼샤 저수지의 현행 계획방법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다.
그 다음 해 6월에는 총리 주재하에 관련 학자와 엔지니어 70여 명이 모여 댐 건설계획의
타당성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황완리 교수는 싼먼샤에 댐을 건설해 물길
을 막으면 그 상류에 막대한 양의 토사가 쌓여 넓은 지역에 걸쳐 침수피해가 일어날 것임을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모든 전문가들이 모두 댐 건설계획을 지지
하는 상황에서 황 교수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정부가 추진
하는 사업에 훼방을 놓았다는 이유로 권력층에 의해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로 낙인찍힌 그
는 후일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1957년 4월에 첫 삽을 뜬 싼먼샤 댐 공사는 1958년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어 완공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물막이 공사가 완료된 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밀려오는
토사의 퇴적속도를 제어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주민의 이주문제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도 함께 밝혀졌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
행해 1962년 2월 완공에 이르게 된다. 토사가 가라앉아 맑아진 물이 댐 하류로 배출되는
광경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댐 위에서 걸러진 토사가 빠져나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수십 억 톤에 이르는
토사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통관(潼關) 지역의 하상은 4.5 이상 높아졌으며, 종전에는 아
무 문제가 없던 황허의 지류 웨이허(渭河)에 토사가 가득한 물이 덮치는 문제가 발생했다.
댐이 건설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완공도 미처 되지 못
한 상황에서 이런 심각한 문제가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문제점을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고 판단한 중국정부는 1962년 3월 싼먼샤댐 계획에 대한 대대적 수정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수정안에는 대규모 발전소 건설 계획을 포기하고, 저수지 수위를 낮추는 동시에 하류
로 퇴적된 토사를 방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침수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댐
의 높이를 최대한 낮추어 물이 자연스럽게 하류로 흘러내리게 하자는 방안도 제시된 바 있
다. 문제점을 보고 받은 마오쩌둥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판단이 내려질 경우 댐을 부술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저한 사전 검토 없이 밀어붙이다가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나자 철거 운운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1964년 “싼먼샤 개발계획 수정안”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2개의 터널을 뚫고 4개의
파이프를 연결해 토사 퇴적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해법이 제시되어 있었다. 1968년 8월 2개
의 터널과 4개의 파이프가 완공됨에 따라 토사 퇴적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완화되기 시작했
다. 그러나 그 대책만으로는 충분한 대응이 될 수 없어, 토사가 계속 쌓여가는 문제는 아직
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말처럼 싼먼샤댐의 재앙은 아직도 현재진
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양상이다.
1992년 8월 황허의 지류인 웨이허(渭河)와 뤄허(洛河)에 큰 홍수가 나서 4백? 이상의
전답이 유실되고 5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 중 3만 명은 돌아갈 집을
아예 잃어버리는 큰 손실을 겪었다. 애당초 싼먼샤 지역에 살고 있던 수십 만 명의 이주민
들은 아직도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한 채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바로 이 싼먼샤 댐의 사례는 정치 지도자의 부질없는 과욕이 민중의 삶을 얼마나 어
렵게 만들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약 중국정부가 황완리 교수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싼먼샤 댐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부터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난 상황에서 그들도 황 교수의 말
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황 교수를 선각자로 추앙하기는
커녕 온갖 박해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1961년 숙청된 황 교수는 베이징 부근
농촌으로 내려가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살 집이 없어 토굴에서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싼먼샤 지역으로 추방되어 변소 청소를 하는 노동형을
받기도 했다.
1980년 2월 드디어 “우파가 아니었다는 결정문”을 받고 복권이 되었지만, 정당한 이의
제기를 한 것이 죄가 되어 2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비참한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
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쯔쟝에 싼샤(三峽)댐이 건설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다시 한 번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어올렸다. 애당초 그는 정치적 풍향에 따라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바
꾸는 처세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3. 싼샤 댐 - 역사는 반복되는가?
중국정부는 싼먼샤 댐의 실패에서 배운 바가 별로 없었다. 그 실패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양쯔강을 막아 대규모 댐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싼먼샤댐의
건설로 인해 생긴 문제가 거의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싼샤
(三峽)댐 건설 계획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양쯔강 중상류 후베이(湖北)성의 세 협곡을
잇는 싼샤댐은 길이가 2.3나 되고 390억 톤의 저수량을 갖는 세계 최대의 댐이다. 규모
가 큰 만큼 발생이 예상되는 문제점의 심각성도 싼먼샤댐의 경우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컸다.
중국정부가 싼샤댐을 건설하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황완리 교수는 지도급 인사 여러
명에게 편지를 보내 계획의 포기를 촉구했다. 황 교수는 관련 데이터를 얻을 수 없어 당국
에서 발표한 내용만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적한 싼샤 댐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선 그는 싼샤 댐은 강물이 운반하는 모래를 차단함으로써 해마다 장
쑤(江蘇)성 북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삼각주 조륙운동에 교란을 가져올 것을 우려했다. 또한
충칭(重慶)시 위쪽의 강바닥에 모래가 쌓여 뱃길이 끊어지게 될 뿐 아니라, 위쪽으로 계속
쌓여가는 토사는 쓰촨(四川)성의 농토를 훼손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황완리 교수는 당시로서 싼샤 댐 건설 이후의 강물 흐름이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계산할
방법이 없음을 지적했다. 장기적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 하상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양쯔강의 모래 퇴적량을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황 교수는
지도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에게 단 30분의 시간만 주면 싼샤댐을 건설해서는 안 되
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고 썼지만 아무도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1986년
중국정부가 주최한 싼샤댐 관련 토론회가 열렸을 때 그의 이름은 토론자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1994년 공사를 시작할 시점에서 책정된 예산은 약 108억 달러였으나, 2008년 완공 때까
지 투입된 총비용은 250억 달러에 이르렀다. 당초 책정된 예산의 두 배 이상이 투입되어
비로소 공사를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댐 건설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주민
의 수는 112만 8천 명에 이른다. 구석기, 신석기시대의 유적지, 한나라와 6조시대의 유적
지, 명, 청 시대의 유적지 등 수많은 역사유적들이 물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도 싼샤댐이 초
래한 막대한 비용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싼샤댐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공사를 통해 수력발전, 홍수예방, 하상물류와 고용
촉진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싼샤댐 건설을 통해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홍수를 예방할 수 있으며, 1만톤급 화물선이 내륙으로 직접 들어올 수 있어 물류혁명을 이
룰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수력발전 이외의 혜택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제시한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수력발전의 경우에도 얻는 전
력에 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나 클 것임을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싼먼샤댐의 교육효과 때문인지 싼샤댐 건설이 논의되는 과정에서는 상당수의 반대자들이
나타났다. 1992년 제7차 인민대표회의에서 댐 건설 문제가 표결에 붙여진 결과, 찬성
1,767표, 반대 177표, 기권 664표로 통과되었다. 통과되기는 했지만, 인민대표회의 의결 역
사상 찬성표의 비율이 가장 낮은 결정이었다. 이는 싼샤댐 건설계획을 추진하던 시점에서도
중국사회의 찬반 논란이 격렬했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 사람들은 싼샤댐을 ‘리펑공정’(李鵬
工程)이라고 부른다. 당시 총리직을 맡고 있던 리펑이 그 계획을 주도적으로 밀어붙였기 때
문이다.
싼샤댐이 약속된 혜택을 실제로 가져다주게 된다면 리펑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으로
중국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자들이 우려했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현실로 나타
날 경우에는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망친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 뻔하다. 역사의 판정
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을 종합해 보면 리펑에게 아주 불리한 판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완공된 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서도 심각
한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싼샤댐과 관련해 가장 심각하게 우려되는 문제는 수질오염이다. 2003년부터 부분적으로
발전을 시작한 싼샤댐 저수지의 수질은 이미 심각하게 악화된 상황이다. 오염된 물이 댐 하
류로 방출됨에 따라 양쯔강 전반의 수질이 악화되는 ‘싼샤댐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댐 건설로 인해 유속이 늦어짐에 따라 강의 자정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 수질오염의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양
쯔강 물이 흘러드는 인근 바다의 오염까지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싼샤댐이 완공되기도 전인 2007년 가을 일군의 중국 과학자들은 이 댐으로 인해 산사태
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각종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 사실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정부 고위 관리들도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과학자들은 생물다양성의 파괴도 우
려했는데, 그들의 우려가 단지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싼
샤댐 건설은 지구상에서 오직 양쯔강에만 서식하던 민물 돌고래 바이지툰(白鱀豚)의 멸종을
가져왔다. 과학자들은 싼샤댐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몰린 생물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한다.
2008년 1월 중국 최대의 영자신문인 China Daily는 양쯔강 수위가 142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상하이의 식수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기사를 냈다. 싼샤댐에서 양쯔
강으로 방출되는 물의 양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물을 가두어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댐이 오히려 물 부족 현상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빚은 것이었다. 양쯔강의
수량이 줄어들면서 달팽이가 급속도로 번식해 주혈흡출증(schistomiasis)이라는 병이 지역
주민들에게 널리 퍼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달팽이가 배설한 유충이 사람의 피부를 뚫고 체
내로 들어가 발생하는 이 병은 발열, 식용감퇴, 근육통증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싼샤댐이 앞으로 주변의 생태계에 미칠 악영향은 지금 이 단계에서 아무도 자신 있게 예
측할 수 없다. 댐 공사를 통해 조성된 거대한 인공호수가 야기할 기후 변화와 생태계 교란
이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빚어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싼샤댐에 고였다가 흘러나
오는 물이 더 많은 모래를 운반하게 됨에 따라 양쯔강의 하상과 물흐름이 크게 달라지는 현
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홍수 예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댐이 뜻하지 않은 곳의 홍수
피해를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싼샤
댐의 위협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규모로 현실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싼샤댐 건설에 시종일관 반대해 왔던 황완리 교수는 마지막 병상에서도 “싼샤, 싼샤는 절
대 안 돼.”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임종 직전 그를 찾았을 때 그는 통곡하며 싼
샤댐을 걱정했다고 한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결코 눈물을 보였던 적이 없었던 스승이 통
곡하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를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한 선각자의 길고
외로운 싸움에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싼먼샤와 싼샤의 비
극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4. 맺음말
4대강사업으로 인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로서 싼먼샤댐과 싼샤댐의 비극에 대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바로 우리가 그런 고통
을 겪고 있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 거대 토목사업들 사이에
놀랄 만큼 큰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움을 느낀다.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거대 토목사업을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이 서로 너무
나 닮아 있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제발 4대강사업의 결과만은 달랐으면 하는 간절한 바
람을 갖고 있다. 만약 싼먼샤댐과 싼샤댐에서 불거진 문제들이 4대강사업의 경우에도 그대
로 재현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 중국은 그나마 거대한 땅덩어리
의 일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국토 전체에 걸쳐 그런 문제가 발생
할 텐데 정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4대강 유역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우리나라 전
체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국토의 지형을 바꿀 만큼 큰 토목공사라면 의당 충분한 사전 검토와 긴 준비기간을 거쳐
야 한다. 그렇게 착실히 준비하고 공사를 시작하더라도 끝내고 나면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절실한 토목공사라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여건이 변화하면 전혀 필요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근시안적 시각에서 공사를 서두르다 보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하게 될 수 있는 것
이다.
황허와 양쯔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댐을 건설에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중국 지도
자들에게 황완리 교수는 귀찮기만 한 존재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다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보면 황 교
수야 말로 그들이 은인으로 극진하게 모셔야 할 사람이 아니었을까? 마음을 열고 황 교수의
충정을 받아들였다면 중국 역사에 자기 이름이 부정적으로 오르내리는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똑같은 일이 그대로 반복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일은 자꾸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서 혹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면 비슷한 상황에서 좀 더 현명한 대처를 할 수 있고 따라서 한층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 역사 공부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해보라고 간곡하게 권하고 싶다.
참고문헌
尙蔚, 『싼먼샤에서 싼샤까지』(從三門峽到三峽), 華夏文摘, 2000.
趙城, 『외로운 강물의 길, 황완리 90년 풍파 인생』(長河孤旅:黃萬里九十年人生滄桑), 長江
文藝出版社, 2004.
梁昌軍, 『수리 전문가 황완리, 임종 전까지 싼샤를 반대하다』(水利專家黃萬里-臨終前反對
建三峽工程), 中華文史週刊, 2007.
戴晴, 『한을 품고 돌아가신 황완리 선생, 이제 아무도 싼샤를 반대하지 않을 것』(黃萬里教
授抱憾辭世-中國再無人反對三峽工程), 淸華大學 bbs-green earth , 2001.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준비 없는 대규모 토목공사는 재앙을 부른다
솔이아빠 조회수 : 349
작성일 : 2010-03-29 22:54:02
IP : 121.162.xxx.111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솔이아빠
'10.3.29 11:16 PM (121.162.xxx.111)임혜지 "4대강사업 그렇게 자신 있으면 수출해라"
"보를 철거 않고도 수질개선? 그게 성공한다면 대박 아니겠나"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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