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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이는 방식
아주 먼 옛날에는 개개의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것이 없었을 겁니다. 있었다 해도 ‘곰을 잘 잡는 백발 사내’, ‘남자를 잘 후리는 다리 밑 거렁뱅이 여자’ 하는 식의, 호칭이라기보단 그 사람의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최소한 그 사람을 가리킨다는 걸 알게 하는 서술이 있었을 뿐이었겠죠. 문자로 치면 일종의 상형문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는 철수를 가리킬 때 그저 ‘철수’라고 쓰면 되지만, 그때는 백발을 늘어뜨린 채 곰을 잡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철수’를 가리키는 지표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죠.
그때는 인간의 머릿속에 ‘개인’이라는 관념이 발아조차 되지 않았을 때고, 따라서 이름과 같은 가뿐한 기호로 개인을 명료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으며, ‘곰을 잘 잡는 백발 사내’라는 식의, 내용이 두루뭉술한 진술을 사용해도 혼동이 없을 만큼 인구수도 적었을 테니까요.
그러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간은 그보다는 좀 더 좁은 범위로 구성원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거예요. 제가 읽은 한자 자습서는 그 필요성이 (너무나 당연하게) 가족을 단속하는 문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구요.
자, 사위가 어두워가는 저녁 무렵이 되었습니다. 외부는 온통 위험한 것투성이죠. 늑대와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산에서 내려오기도 하고 도적들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또한 그 시간이 되면 식구가 다 둘러앉아 끼니를 해결해야 하죠. 생산력이 낮은 단계의 사회라 식구 수대로 상을 따로 차리거나 아직 못 돌아온 식구를 생각해 음식의 일부를 남길 형편이 못 됩니다. 무조건 같이 모여서 부족한 대로 먹어치워야 해요.
하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밖에 있는 식구를 찾아서 데려와야 합니다. 그러나 사위가 어둑해져 있을 때라 누가 누군지 좀처럼 분간하기가 힘이 드네요. 바로 그 지점에서 개똥아, 쇠똥아, 말똥아... 하는 개별적 구분을 위한, 단순명료한 기호가 등장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사회의 규모가 작으니까 그 기호의 개수가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에도 보면 남자 이름으로 요한, 요셉이라는 이름이 줄기차게 등장하고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도 여럿 됩니다. 그 몇 개의 이름들로 다 해결이 됐다는 뜻이겠죠. 요한이 여러 명이더라도 아랫말 요한, 윗말 요한, 세례자 요한, 사도 요한 하는 식이면 ‘구분 끄~~읕’?
갑자기 왜 이름 얘기를 꺼내게 됐냐면요, 인터넷으로 무슨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걸려든 어느 블로그의 포스트 때문이에요. 그걸 읽으니 옛날 한문 자습서에서 봤던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고 이름을 붙이는 방식에서도 -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 그 사람의 성향과 철학 같은 것이 드러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배우 명계남은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 이름에 ‘생명’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비오’를 붙여줬다고 하죠? 그러다 둘째가 태어나자 ‘그럼 넌 눈 오냐?’ 해서 ‘누노’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구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저는 자연인 명계남이 와락 좋아졌더랬어요. 뭐랄까... 기지도 기지고 격식을 뛰어넘는, 무심한 듯 과감한 사고의 탄력성이 그 작명방식에서 느껴졌달까요? (뭔 말이야?ㅋㅋ) “인생 뭐 있어? 그냥 가는 거야!”라고 하지만 그 ‘그냥’이 결코 아무 생각 없는 ‘그냥’은 아니라는... 물론 아이 이름 짓는 게 무슨 장난이냐,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요.-_-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세계 최초로 복제양을 탄생시킨 월머트 박사라는 사람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근무하는 연구소가 스코틀랜드 시골구석에 있다는데(한 마디로 시골 가축농장-_-), 거기 처박혀서 맨날 현미경과 논문과 책만 들입다 파는 사람이 세계 최초로 복제양을 만들어놓고는 이름을 ‘돌리’라고 붙여 놓았잖아요. 그 복제양이 ‘유방’에서 채취한 체세포로부터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왕가슴으로 유명한 미국의 컨트리 의가수 돌리 파튼의 이름을 따온 것이죠. 참고로, 돌리 파튼은 키가 152cm인데 가슴둘레는 130cm라고 합니다. 키와 가슴둘레의 비율을 함 생각해보시길.-_-
그러니까 월머트 박사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연구 성과물에 마릴린 먼로보다 왠지 더 천박(?)해 보이는 여가수의 이름을 붙여주면서 혼자 씨익 웃지 않았을까. 니들, 내가 여기에다 대단히 심오한 뜻을 가진 이름을 붙일 줄 알았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 이거야...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여기 명계남과 월머트 박사보다 더 깨는(?) 분들이 있네요. 오래 살아. 졸라 안 자라. 주당. 소주.... ㅎㅎㅎㅎㅎㅎ. 저 분들이 돌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복제양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이름을 ‘도희’라고 지었을 것 같네요. 가슴 하면 돌리 파튼보다는 전설의 젖소부인 시리즈가 더 왓다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나저나 이름- 제목을 붙이는 건 늘 골치 아파요. 이 글에도 뭐라고 할까... 고민 됐다는.-_-
1. 프리댄서
'09.5.8 1:27 PM (218.235.xxx.134)http://weet12.tistory.com/189?srchid=BR1http%3A%2F%2Fweet12.tistory.com%2F189
2. ㅎㅎ
'09.5.8 3:18 PM (203.247.xxx.172)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프리댄서님 글은, 명화 원본을 우리 동네 학교 무료전시로 만나는 듯한 황송한 기분이 들어요...ㅎㅎ
린네 이야기가 떠올라서 퍼봤습니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자신의 위대함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긴 글을 썼다. 그는 “역사상 더 훌륭한 식물학자나 동물학자는 없었다.”고 선언했고, 그의 분류법은 “과학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식물학의 왕자”라는 뜻으로 프린케프스 보타니코룸(Princeps Botanicorum)이라고 새겨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의 자신감에 대해서 이견을 표시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훗날 잡초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사실을 발견해야만 했다.
린네의 놀라운 점 중에서는 끊임 없이, 때로는 열병처럼 성(性)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일부 쌍각 조개류와 여성 외음부의 유사성에 집착했다. 그래서 그는 대합 조개류의 일부에 불바(vulva, 외음부), 라비아(labia, 음순), 푸베스(pubes, 음부), 아누스(anus, 항문), 히멘(hymen, 처녀막)과 같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는 식물을 생식기의 특징에 따라 분류한 후에 놀라울 정도로 의인화된 호색적인 이름을 붙였다. 그가 남긴 식물과 그 거동에 대한 설명에는 “난교성 성교”, “불임의 첩”, “신부의 침대”와 같은 표현들이 쉽게 발견된다.3. 프리댄서
'09.5.8 6:36 PM (218.235.xxx.134)흐... 린네 얘기 잘 읽었습니다. 아주 재밌는 사람이네요.
식물학의 왕자이면서 자뻑의 왕자이기도 하군요.^^
자기한테 이견을 표한 사람 이름을 나중에 잡초에다 붙여버린다니, 유치하면서 좀 귀엽기도 합니다.^^
목사 아들이라는데 '일부 쌍각 조개류와 여성 외음부의 유사성' 같은 것에 집착하기도 하고. ㅋㅋ
린네 얘기 들으니까 새삼 서양은 분류 혹은 분석에 기반한 체계화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만 해도 우리는 가야금 산조면 끝나는데 그 사람들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비창> 작품번호 13번 중 3악장 론도, 알레그로' 하는 식으로 우선 얼개 자체가 참 엄격하죠. 고기도 우리는 그냥 지글지글 굽는데 살짝 익힌 것, 중간 정도로 익힌 것, 완전히 익힌 것 등으로 나누구요. 아주 적절한 비교는 아니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게시판이 설경구, 송윤아 결혼 얘기로 왁자지껄하네요.^^;4. phua
'09.5.8 6:39 PM (218.237.xxx.119)많이 배우게 해 주셔서 캄~~사^^
그러나 용량의 부족으로 가끔 넘쳐서 실종 되어 버린 다는 것...
그래도 배울꼬야... 열씸히.5. phua
'09.5.8 6:43 PM (218.237.xxx.119)고거이( 지금 게시판의 상황) 82에서 젤로 아쉬운 점...
저도 솔깃은 하지만...6. ...
'09.5.8 7:12 PM (173.3.xxx.35)프리댄서님 글은, 명화 원본을 우리 동네 학교 무료전시로 만나는 듯한 황송한 기분이 들어요.22
아이디를 보면 그 사람의 잠재의식이랄까 그런 것이 생각됩니다;;;
이름이 갖는 주술(?)이 있나 생각도 하고요.
제가 가입때 지은 아이디를 보면(여기뿐 아니라) 제 소망을 담았더라구요.
그리고 근래엔 실례를 자주 접하게 되니^^;; 특히 잘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답니다.
2메가비트, 정ㄸㅇ,....부모님이 다른 글자를 넣었더라면 별명이.....하면서요.7. 프리댄서
'09.5.8 8:43 PM (218.235.xxx.134)에궁, 오히려 제가 황송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게요, 이메가와 정ㄸㅇ은.... 좀 똑바로 하지, 부모님들까지 욕 먹이고.^^
음... 김지하가 어느 날 글을 쓰면서 '지하'라는 필명을 안 쓰고 '영일'이라는 본명을 썼었어요.
그 필명을 쓸 때마다 거기에 드리워진 지난 세월의 좌절, 고통, 치욕, 상처... 그러니까 한 마디로 뭉뚱그리자면 '업보'라는 게 떠올라 괴로웠던 모양입니다. 그것에 대해 쓴 시도 있는데 제가 참 좋아하는, <애린2> 시집에 실린 19번째 시예요.
절망이라 부르지 말라 내 이름
퇴폐라 부르지 말라 내 이름
내게도 분명 이름이 있는 것을
부모님 지어주신 그 이름
절망도 퇴폐도 아닌 분명
김영일이란 내 이름.
저는 여기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시는 분들이 임시로 쓰신 닉 가운데 아주아주 인상적이었던 게 '내 뱃살을 전여옥에게'와 '떡을해써501'이었어요. ㅎㅎ '떡을해써501'은 'SS501'의 패러디일 텐데 처음 걔네들이 나왔을 때 조카들 앞에서 '에스에스오공일'이라고 읽었다가 몹시도 무식한 이모로 취급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대체 걔네들 이름을 '더블에스오공일'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요~8. 프리댄서
'09.5.8 8:51 PM (218.235.xxx.134)그리고 원글에서는 빼먹었는데 사실, <한자 백 가지 이야기>라는 책을 쓴 일본인 학자에 따르면, 名이라는 한자는 고대 중국의 제사의식에서 나왔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당에서 아이가 태어났음을 조상에게 고(告)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名에서 윗부분[夕]은 그때 바치는 고기를 가리키고 아랫부분[口]은 축문을 담는 그릇을 가리키는 거라나요?
그러므로 그 일본인 학자의 주장에 따르자면 한자 名이 저녁에 밖에 나간 식구를 부르던 데서 연유했다는 주장은 ‘민간 어원설’의 한 예로 치부돼야 하는 거죠. ‘소나기’가 소를 두고 내기를 한 데서 연유했다는 설과 같은. 저 사람이 금석학의 대가랍니다. 그러니 저 사람 주장이 신빙성이 높다는 거죠. 쩝... 개인적으로는 저녁 어쩌고 하는 설이 훨씬 더 마음에 드는데.-_-
아, 그리고 푸아님.
실은 저도 그 얘기 듣고 깜짝 놀랐어요. 당근 어떻게 된 사연인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