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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不자유 조회수 : 1,356
작성일 : 2009-01-20 13:08:31
한때는 작지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더랬습니다.
언젠가는 '초원의 집' 자매들이 쓰는 것 같은 이층침대를 사주겠다며
매일 작업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시던 아버지
없는 형편에도, 50권짜리 세계소년명작동화 전집을 들여주면서
꿈을 키워 주셨던 부모님 얼굴에, 언젠가부터 그늘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겨울, 12월 말...술에 취해 휘청 휘청 들어오시는 아버지 양손에
통닭과 초코파이와 같은 휘황찬란한 만찬이 들려있었습니다.
철없던 우리는, 송년 파티를 한다는 설레임에 먹고 떠들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재롱을 떨었어요.
딸들이 재롱을 부리면, 땀냄새 술냄새나는 까칠한 수염으로
얼굴을 부비부비 하셔서 싫어했지만...
그날은 초특급 만찬에 너무 기뻐서, 그까짓것
아빠의 까칠한 수염도 기꺼이 받아줄 생각이었습니다.
여지 없이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는 아버지를 향해
자매들은 한달음에 안겼는데, 까칠한 수염으로 부비부비하는 순간
뜨거운 아빠의 눈물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우리 이사 가야 해.

1월에 우리는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 단칸 월세방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추운날 책보따리를 들고 갔지만, 책꽂이 하나 둘 공간이 없는 작은방.
50권짜리 전집을 버리라는 엄마와 , 어떻게든 둘 곳을 찾으려는 언니..
결국 제일 좋아하는 책 한권씩만 남기라는 말씀에
<소공녀> <80일간의 세계일주><로빈슨 크루소우> 세권을 붙잡고
방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내 책가방에 넣어다니겠노라고...
아버지는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가셨고.
이불 한 채 간신히 펼칠 수 있는 단칸방에서
네 남매와 어머니는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공부해라. 이 악물고 공부하면, 그래도 밝은 세상이 온다.
판검사도 될 수 있고, 사장님도 될 수 있다.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해라. 그 말이 저는 사실일 줄 알았습니다.
..............................

초등 시절,선생님이 과학장에 나가려면 원피스를 입어야 한다 하더군요.
실험 설계도 내가 했고, 실험도 모두 내가 했는데...
원피스를 입지 않으면 다른 친구를 내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된다는 어머니 말씀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시장에 가셔서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와 털이 달린 코트를 사오셨습니다.
철없는 마음에 그저 좋아서, 새 옷을 입고 온동네를 누비다가
돌아서는데, 등에는 막내를 업고, 한손은 셋째 손을 잡고
길에 떨어진 나무토막을 줍고 다니는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번개탄도, 숯도 살 형편이 못되어, 불쏘시개할만한 나무라도 있을까 하여
여기저기 다니면서 주워오셨던 어머니
등에 업힌 동생은 볼이 빨갰고, 셋째의 손은 차디차게 곧아 있었고.
가슴을 치는 죄책감에,길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었습니다.
그 후로는 어머니께 무언가 사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무엇을 사오라 해도, 말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하시는 부업을 밤새 거들면서 초등 시절을 보냈고
중학교, 겨울방학이면 아는 분의 공장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서
공장 일을 하면서 참고서 값을 벌어 쓰곤 했습니다.
다시는 힘이 없어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겠다,
다시는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책을 파고들었습니다.
.................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대학의 학생증이, 제게는 마치 구원 같았습니다.
시국을 이야기하는 선배들 앞에서, 마음만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배들처럼 공장으로 가서 컨베이어벨트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저때문에 대학을 포기한 언니, 어린 동생들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배운 서예 솜씨로, 플랭카드를 쓰라면 썼고,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풍물로, 문선대를 꾸리라면 꾸렸고.
마이크를 잡고 '사랑노래'든, '전화카드'이든 부르라면 불렀으나
컨베이어벨트 앞에 설 수는 없듯이, 투쟁가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자보에 쓰인 겨울 빈민활동 계획을 보고.
어릴 적 생각에 철거 지역 공부방에 갔었습니다.
그곳의 아이들과 함께 있어 주었다는 것이 고마워
철거민 아주머니는 라면이라도 끓여주고 싶어하셨지요.
그 아주머니가 꼭 우리 엄마처럼 느껴져 눈물이 돌고 했습니다.
철거가 예고된 날, 선배들과 함께 그곳에서 번갈아 규찰을 섰는데...
두려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래를 번갈아 불렀지요

<단결투쟁가>/ <의연한 산하>......

그렇게 비장한 노래들을 듣고 있는데,
철거대책본부장 아저씨께서 이번엔 내가 부르마 하셨어요.
턱수염이 덮수룩하게 나신 아저씨라, 투쟁가를 부르시지 싶었는데.
뜻밖의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시더군요.

<바리케이트 2>
여보게 이리들 와서 불을 피우세 규찰일랑 젊은애들 시키고
우리는 이곳에서 몸을 녹이고 따뜻한 얘길 나누세
밖은 추우나 이곳은 따뜻하네 모닥불 때문만은 아닐세
여보게 이리들 와서 불을 피우세 이 세상 밝혀보세
저 산 너머로 하얀 이 드러내며 뛰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가
저 바다 위로 떠오는 붉은 태양은 우리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밖은 추우나 짙은 어둠 밝히는 이곳은 따뜻한 새벽일세
밖은 추우나 짙은 어둠 밝히는 이곳은 따뜻한 새벽일세

.........................................

그랬습니다. 그랬더군요.
그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바라던 것은...
아이들이 하얀 이 드러내며 웃을 수 있는 소박한 일상이었는데
한겨울에 쫓겨나 책보따리 든 아이들 손 시리지 않게,
겨울은 넘기고 떠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아이들의 소중한 동화책을 버리지 않아도 되게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저도 그간 불러볼 용기를 내지 못했던 노래 한 곡을 불렀습니다.


<하늘>
프레스에 찍힌 손 가슴에 부여 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붙일 수도 *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 하늘이다

몇달째 임금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간
죄없는 우리를 감옥 넣는다는, 경찰 나리들은
나의 하늘, 하늘이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힘없이 살아온 내가.
우리 아가에게는 그 사람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하늘이 되고 싶다.
억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아껴주는
아 우리도 하늘이, 하늘이 되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

떠난 이들이 원했던 것은 ,아이들이 하얀 이 드러내는 웃음
한파 지나고 보금자리를 옮겨서,어디에서든 민들레처럼 모질게 살아내는 것
그런 소박한 것들을 위해 잡았던 화염병이,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면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좌우를 따지는 것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오늘만큼은 82 자게가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전략 교환 장소로 활용되더라도, 다른 회원분들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물 한 모금 넘기는 것도 죄스러운 마음으로...
제가 이리 길고 긴 고해성사를 하는 이유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은 몇 시간 뒤에 내릴게요)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IP : 211.203.xxx.231
1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9.1.20 1:12 PM (218.156.xxx.22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
    그리고 자유님 말따나
    오늘만큼은 82 자게가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전략 교환 장소로 활용되더라도, 다른 회원분들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
    .
    자유님...ㅠㅠ

  • 2. 히야
    '09.1.20 1:14 PM (116.37.xxx.61)

    가슴에 남는 글이네요..
    그러게요 너른 마음으로 양해 바랍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아서요...ㅠ

  • 3. .
    '09.1.20 1:16 PM (59.7.xxx.153)

    목이 콱 메여서...
    그랬군요. 자유님...
    눈물이 나다가 이제는 가슴이 막혀버리는 오후예요...

  • 4. 파란 자동차
    '09.1.20 1:16 PM (122.32.xxx.224)

    뭐라 드릴 말씀이.... 수고하셨습니다

  • 5. 용산
    '09.1.20 1:17 PM (125.129.xxx.41)

    울고 있습니다..

  • 6. ㅠㅠ
    '09.1.20 1:18 PM (210.95.xxx.35)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학과 공부보다는 다들 거리에 나가 최루탄가스 속에 지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먹었지만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습니다
    촛불을 들어야 하나요?
    이 답답한 마음....어떻게 해야 하나요?
    알려주세요ㅠㅠ

  • 7. ..
    '09.1.20 1:22 PM (222.237.xxx.149)

    가슴속깊이 파장을 남기는 글입니다. 참고 있던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이네요.
    원글님 글 내리지 말아주세요. 제가 비겁해 질때마다 다시 보고 싶습니다.
    제발......부탁드립니다

  • 8. 3babymam
    '09.1.20 1:29 PM (221.147.xxx.198)

    오늘은 정말 눈물을 멈출수가 없네요..
    자유님 글에...꾹 참았던 눈물이 또~

  • 9. ...
    '09.1.20 3:53 PM (218.238.xxx.5)

    사무실인데...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려 합니다.
    2009년 하늘아래 이런 일이...

  • 10. ㅠㅠ
    '09.1.20 3:59 PM (211.109.xxx.163)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글 내리지 말아 주세요.

  • 11. ⓧPianiste
    '09.1.20 4:31 PM (221.151.xxx.244)

    너무너무 맘에 와닿는 글이에요. ㅠㅠㅠㅠ
    저도 글 안내리셨으면 좋겠어요...

  • 12. 처음
    '09.1.20 4:33 PM (121.124.xxx.213)

    댓글 처음입니다
    조용히 지켜보았던 사람으로서...
    전 의식은 있었으나 대학은 못갔던 사람이랍니다
    컨베이어앞에 서있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지요
    님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 가끔씩 떠올리게 글은
    지우지 마세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게하도록.. 이요

  • 13. 쟈크라깡
    '09.1.20 6:55 PM (118.32.xxx.110)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흐릅니다.
    팍팍한 세월 희망 잃지 않고 살아온 님의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인고의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우리 아이들이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은데 .....

    글 내리지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합니다.

  • 14. 자유
    '09.1.22 7:54 PM (211.203.xxx.231)

    오늘쯤 내리려고 했는데, 댓글이 마음에 걸리네요.
    부끄러운 글이지만, 댓글 주신 분들 당부 염두에 두고 남겨두겠습니다.

  • 15. 하늘을 날자
    '09.1.23 7:35 PM (58.150.xxx.133)

    너무 마음 아픈 글 잘 읽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

    저 또한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남겨두시기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16. 2월 시작하는 날.
    '09.2.1 11:50 PM (222.238.xxx.180)

    오늘에서야 자유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눈물이 나네요. 지금도 명동성당 앞에선 경찰과 시민들이 대치 중이랍니다. 도대체 2009년 2월 밤이 이렇게 슬플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요?
    그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왜 이리 무자비하게 만행을 저지르는지...
    열심히 일한 당신, 편안하게 사세요. 하고 말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무슨 죄를 지어도 돈만 잘 벌면 된다는 그런 세상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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