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풀빵 조회수 : 1,127
작성일 : 2008-09-28 13:25:35
어제 모란공원의 하늘은 한없이 푸르렀습니다. 고인이 가시는 길 춥지 않고 외롭지 말라고 하늘도 좋은 날씨를 허락하셨나 봅니다.

해맑고 건강해 보이는 영정 속 사진은 기륭전자 입사원서에 붙였던 2004년의 사진입니다. 고 권명희 조합원은 워낙 말수가 적고 수줍지만 꼼꼼한 성격으로 기륭전자에서 근무하는 동안 자부심을 갖고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 노력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노조 가입으로 인해 해고된 이후에도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투병 중에도 계속 농성장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기륭전자로 돌아가 다시 일하는게 고인의 소원이었기에 유족들도 기륭전자 앞에서의 노제를 찬성하셨습니다.

화장을 기다리는 동안 고인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키만 웃자랐을 뿐, 아직은 어린 중1, 중2의 딸, 아들을 남겨두고 어떤 심정으로 눈을 감으셨을 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하는 모습들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왜 이리 애처롭게 보이는지요. 고개 숙인 채 눈감고 계신 남편 분의 낡은 운동화에서 보살피는 손길이 부재했던 짧지 않은 시간이 느껴졌습니다.

모란공원 납골당은 작은 방 안에 열쇠가 꽂힌 물품보관함처럼 생긴 납골함이 자리잡고 있는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봉인식을 짧막하게 치르고 유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남은 음식을 나눠먹으며 고인에 대해 담소를 나눴습니다. 멀리 계시던 유족들도 적적하리라던 예상과 달리 마지막 가시는 길 많은 이들이 함께 한 것에 대해 고마워하셨습니다.

거리도 멀고 길도 막혀서 농성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다 됐지만 그 자리에서는 추도 미사와 촛불문화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앉아 계신 수녀님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봉인식 끝나고 우스갯소리를 들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천당으로 오라 하실 거고 부처님은 극락왕생하라 하실 거다, 두 분 다 오라하시니 이번엔 골라서 가실 거다 라고요. 어느 곳이던 이미 편히 쉬고 계시겠죠.

시간이 늦어 딸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오는 내내 고인 남편분의 낡은 운동화와 뽀송뽀송 아이처럼 어린 따님의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조합원분들이 이모처럼 보살피겠다 하시지만 저 역시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란공원 납골당 앞에서 등돌리고 서 계시던 분회장님 앙상한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뼈 밖에 안 남아도 똥배는 그대로라고 농담까지 던지며 담담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겹치며 많은 것을 책임진 자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까 문득 애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분회장 복귀 후 첫 집회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현장을 찾아 이제 무엇을 해야할 지 차분하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아, 그날은 얼마 전 다시 딸아이 유치원 앞으로 돌아와 제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비스킷 나눠먹기'도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고 구본주 작가의 조각전도 열린다고 하고요. 마침 딸아이 유치원 개교기념일이기도 해서 하루 종일 머무를까 합니다. 그날도 어제처럼 햇살이 좋았으면 합니다.
IP : 61.73.xxx.17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8.9.28 1:30 PM (220.122.xxx.155)

    가족들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프네요. 어린것들을 놔두고 가는 마음이 어땠을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2. 치열하게
    '08.9.28 1:34 PM (121.188.xxx.77)

    사시다 가신 님. ..좋은데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 3. .
    '08.9.28 2:23 PM (121.166.xxx.133)

    그렇게 어린 아들 딸을 두고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 일면식도 없는 저도 한없이 슬퍼집니다. 살아남은 이들이 더 좋은 세상 만들어서 가신 님의 한을 풀어드려야겠습니다.

  • 4. ⓧPianiste
    '08.9.28 2:31 PM (221.151.xxx.234)

    수고많으셨어요. 분명 좋은곳으로 가셨을거에요.
    가시는 길 외롭지않게 많은 분들께서 가주셨다니 너무 감사할 따름이네요.

    기상청 날씨정보 보니까 월요일에 강수확률 20% 에요. (살짝 흐릴거같네요.)
    풀빵님의 바램처럼 햇살이 좋길 기원합니다.

  • 5. idiot
    '08.9.29 1:45 AM (124.63.xxx.79)

    잊고 지냈는데, 이곳에서 '모란공원'이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됩니다. 그 이름을 들으니 여러가지 기억이 한꺼번에 확 밀려왔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한 음식점에서, 20년 전에 가리봉동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재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법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진 사람들. 우리가 한참 열심히 만날 땅시에는 모두 순수하고 푸른 청춘들이었는데.. 세월 참 많이 흘러갔더군요.

    그들과 함께 모란공원에 가야 할 일이 가끔 있었지요.

    기륭전자 앞에 가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20년 전에 비해 무엇이 변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더 무서운 세상이 열려 있을 뿐이라는 생각뿐이지요.

  • 6. ..
    '08.9.29 12:58 PM (219.255.xxx.59)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슬프네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236083 단독주택 사시기 어떤가요 7 2008/09/28 1,755
236082 매실 건질때.. 6 궁금 2008/09/28 692
236081 일산근처 6 걱정맘 2008/09/28 613
236080 분당서울대병원 7 2008/09/28 831
236079 선물받은 애기화장품이.. 12 제조일이3년.. 2008/09/28 832
236078 원주에서 잘 하는 피부과,,,, 1 피부엉망 2008/09/28 339
236077 김치냉장고 김치통 사신다는분 4 찾아요 2008/09/28 686
236076 홍화씨 가루/환 믿고 구입할만한 곳 처.절.하.게. 추천 부탁드려요. 9 ⓧPiani.. 2008/09/28 1,104
236075 요즘 같이 입맛없을때 멸치젖갈에 쌈 싸먹는거,, 4 젖갈쌈 2008/09/28 785
236074 인터넷에서 중고로.. 3 프리설겆이 2008/09/28 410
236073 [웹자보] 여성정치포럼 1차 : 노동시장 내 성불평등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성정.. 김민수 2008/09/28 153
236072 에스티로더 갈생병 얼마에요? 6 화장품 2008/09/28 1,940
236071 호박고구마가 값이 좋아서 퍼왓어요 3 호박고구마 .. 2008/09/28 1,396
236070 아기.. 안낳고 살고싶어요.. 저같은 분 안 계세요..? 72 ... 2008/09/28 6,548
236069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6 풀빵 2008/09/28 1,127
236068 피부과 가서 어떤 관리를 받는게 좋을까요? 2 공짜점심 2008/09/28 803
236067 요즘 전세가 하락인가요? 16 걱정맘 2008/09/28 3,895
236066 애낳고 얼마나 배가 금방 들어가셨나요? 13 2008/09/28 1,085
236065 오늘의 아고라 명작 입니다 4 정직 진실 2008/09/28 930
236064 lg양문형 냉장고 쓰시는 분들 9 디오스 2008/09/28 1,091
236063 조계사 테러 부상자 치료비 송금 완료 11 풀빵 2008/09/28 427
236062 요새 82쿡은 촛불 드시나요? 14 궁금해요 2008/09/28 844
236061 멜라민이 인체에 2 질문 2008/09/28 627
236060 카모메 식당 14 ^^ 2008/09/28 1,477
236059 동의를 안해줘요. 12 남편이 위치.. 2008/09/28 1,173
236058 꿈해몽 잘하는분 계셔요~? ^^ 2008/09/28 195
236057 통마늘 진액 정말 효과 있나요? 9 질문 2008/09/28 1,218
236056 인천공항면세점에 모자를 궁금이 2008/09/28 514
236055 거영매트 괜찮을까요? 3 추운건시러 2008/09/28 694
236054 베란다 연결 기둥에서 물이 새네요. 3 베란다 2008/09/28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