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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상식> 아아 전대협이여
힘써 싸우셨던 분들중에
이런분들도 있었는지
이제야 글을 읽어 알게 되었어요.
독재와 싸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이제야 느끼면서
여기로 퍼나르네요.
이제 전대협이나 독재에 투쟁했던 그들을
다시 재평가해야할 시점이 된것같습니다.
과거를 알아야 지금 싸움에 대한 해법을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러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어 놀랐어요...
이번에 남편에게 전대협때 오월대 녹두대
이런이야기를 처음들었어요...
우리앞에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싸운사람이 있었는지
우리가 외롭다면 그들은 얼마나 외로웠었을까요..
잠시나마 그들이 어떠했는지 읽어봐 주세요...ㅠ.ㅠ)
오빠, 언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아 전대협이여
드디어 전대협 형님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풍물패를 대동하여 거리로 나섰습니다.
20년을 훌쩍 넘겨버린 세월의 흐름앞에서도 그들은 예전처럼 당당하기만 합니다.
'구국의 강철대오' 깃발 아래 뭉친 그들은 40대의 나이를 잃어버릴 만큼의 예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직 그들에겐 강한 연대를 통한 가슴 속 울림이 있습니다.
저는 한총련세대입니다. 대학 다닐 때 선배들로부터 전대협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전설이었습니다.
만약 전대협이 없었다면 지금 이만큼의 민주주의는 탄생하지 못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항상 부채를 안고 있는 기분입니다.
대학때 언론연합회 소속 TV방송국에서 일할 기회가 있어서 매년 한총련 출범식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7-8만 명의 대학생들이 라이터로 켜면서 부르는 진군가는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최루탄에 익숙해지고 부조리로 가득찬 현실을 개탄하며 거리에 서는 시간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다시는 없을 줄 알았는데 참 생각할 수록 이명박은 대단합니다. 씨밸롬.
바쁜 일 대충 끝내고 집에서 인터넷 방송 보다가 전대협 생각나서 이것 저것 읽어보다가 몇개 글 옮깁니다.
그리고 지금 광화문 출발합니다. 오늘은 제대로 함 해봐야겠습니다.
아아 전대협이여..
전대협 출정가 (출처 : 경향신문)
- 전대협 결성까지
1986년 10월 건국대 사태로 1,200여명의 대학생들이 대량 구속된 이후
학생운동 내부가 가장 집중적으로 고민한 문제는 ‘국민과 함께하는 투쟁’이었다.
그들은 극심한 패배감과 무력감을 떨치고 재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는 데 몰두했다.
전두환의 탄압을 뚫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87년 3월에 들어 대부분의 대학이 총학생회 선거에 돌입했는데, 우선 선거 양상이 이전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학우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치 현안을 떠나 학내 문제를
주요 이슈로 내걸거나 익살맞은 춤과 노래로 ‘문화유세’를 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후보들이 내건 주요 이슈는 대학마다 조금 달랐지만 대체로 대학신문 언론자유 보장, 부당징계 철회,
시국선언 교수에 대한 승진 누락 반대, 학생복지 확대, 부정입학 반대, 총장 퇴진, 학사경고 완화 등이었다.
고려대 이인영(현 열린우리당 의원)은 서창캠퍼스 유세에서 준비된 의전적인 원고를 찢어버리고
손가락을 깨물어 ‘서창의 고통과 함께하겠다’는 혈서를 써 지방 캠퍼스의 소외감과 불만을 해소하는 데
적극적 입장을 보임으로써 학우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연세대 선거에서 선보인 안치환(가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숙연하면서도 서정적인 노래로
급속히 대학가에 확산됐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
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참여 학생 수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이 노래는 6월항쟁 내내 시위참여자들의 애창곡이 됐고, 오늘까지도 명곡으로 불리고 있다.
규모가 작고 학생운동 역사도 일천한 서울시립대 총학생회 출범식에는 처음으로
서울시내 대학 학생회장 12명이 참석해 경험과 정보를 소통하는 교류의 장을 열었으며,
시립대생 2,000여명은 단과대학별로 토론회를 끝낸 후 단과대 깃발 아래 질서있게 출범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협동의 멋을 과시했다.
서강대는 학생총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자 학우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간의 관행을 깨고 스스로 유회를 선언함으로써 운영의 원칙을 준수했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이후 동원령에 의하지 않고서도 몇배로 많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서울대는 86년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84학번과 85학번 중심의 주력군 중 절반이 구속되거나
수배되는 치명적인 탄압을 받은 터라, 87년에는 총학생회 간부진을 세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그 척박한 동토에 박종철은 봄날을 예비하는 한 톨 씨앗이 돼 산화한 것이다.
서울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면서 철저히 대중노선을 견지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4·19와 5·18 행사 역시 이전의 정치투쟁 대신 학술 세미나, 풍자 마당놀이, 개사곡 경연대회,
마라톤대회, 판화 사진전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 중심으로 변화를 꾀했다.
철저히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한 학생회 운영은 지방대학에서도 그 호응이 뜨거웠다.
문교부에 따르면 87년 3·4월 두 달 동안 전국 73개 대학에서 451회의 집회·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중 45개대 242회가 학내 민주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운동권만의 힘겨운 선도적 정치투쟁에서
일반 학우 중심의 학내문제 투쟁으로 대거 전환한 이후 학생들의 참여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변에서 집회 모습을 소극적으로 지켜보던 관찰자들이 슬금슬금 집회장 앞으로 이동하는 변화가
일어나면서 집회의 적극 참여자와 소극적 관찰자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4·19기념일을 앞둔 4월 17·18일 양일간 전국 대학에서는 대규모 학내 시위가 일어났는데,
참여자는 47개대 2만7천여명에 달했다.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군사독재정부가
알 리 만무한 가운데 학생들은 이를 새기고 또 새겼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바꾸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가장 뜨거운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이 흐름을 연결해 마침내 5월6일 연세대에서 서울지역 23개 대학 대표가 모여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서대협)를 결성하고 8일에는 발족식을 갖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 대중투쟁 노선이
불러온 성과를 곧이어 확인하게 된다.
5월23일은 광주항쟁 7주년 기념행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학생들은 민통련의 ‘민주영령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종로 3가 탑골공원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박종철의 고문살해범이 은폐조작됐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민심이 들끓었지만
경찰의 봉쇄망은 철통처럼 더욱 견고해졌다. 오후 2시, 네거리의 신호등이 바뀌면서 차량이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호각소리가 들렸다.
차도의 행인들 속에 섞여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6차선 차도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차도는 차량과 학생들로 뒤엉키며 교통 흐름이 막혔다. 중무장한 전경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로마 병정처럼 열을 지어 접근해 왔다. 순식간에 탑골공원 앞 네거리는 3,0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로 채워졌다. 전경들이 연행을 시작할 즈음, 누군가가 외쳤다.
“여러분, 우리 모두 팔을 끼고 누웁시다.”
자연스럽게 ‘광주 출정가’를 합창하면서 학생들은 옆 사람과 팔짱을 굳세게 끼었다.
도로에 드러누운 연후에야 이들은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어두운 잿빛 하늘로부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려 이들의 몸을 적셨다. 전경들은 사력을 다했으나 거대한 사슬로 뭉쳐 있는
학생들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온 몸으로 비의 세례를 받으며 눈을 감은 채 ‘광주 출정가’를
계속 합창했다. 전경들은 방패로 학생들의 팔다리를 내려 찍기 시작했다.
사슬을 풀고 한 사람씩 연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연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일제히 “우우” 하는 야유와 함께
전경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나섰다.
“왜 학생들을 내려 찍느냐. 화염병을 가졌느냐, 돌멩이를 던졌느냐. 이 학생들은 맨몸이지 않으냐.”
항의는 이어졌고 전경들은 주춤거렸다. 그 사이에 차도 가장자리에 있다가 이미 연행됐던 학생들이
다시 풀려나와 대열의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다. 몇몇 행인은 전경들과의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비를 맞으며 누군지도 모르는 옆 사람과 단단하게 팔을 꽉 낀 채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종철이를 살려내라.”
학생들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렀지만 이내 빗물과 섞여버렸다.
아, 마침내 시민들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구나. 수배자를 밀고해 잡히게 하고,
더러 빨갱이라 비난하던 사람들이 연행되려는 자신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감격이 목울대를 울컥거리게 했다. 쇠파이프와 꽃병(화염병)을 들고도 늘상 경찰에 쫓기던 이들이 아니던가.
이들 가운데 절반 가까운 1,200여명이 이날 연행됐지만 곧 모두 풀려났다.
행인들의 말처럼 화염병도 돌멩이도 가지지 않았던 학생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학교로 돌아간 이들은 전날의 다짐을 다시 새겼다.
“돌아오지 못할 각오로 거리로 나갑시다.
단, 우리의 무기는 각목이나 화염병이 아니라 오직 순결한 도덕심과 뜨거운 결의뿐임을 잊지 맙시다.”
이날의 투쟁 이후 학생들은 5월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출범을 감격적인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국본이 결의한 6·10대회 총궐기를 준비하며 ‘호헌철폐 민주개헌쟁취
서울지역 학생협의회’를 구성한다. 6월6일, 5·23투쟁의 주력군들은 고려대에 모여
6월 민주항쟁의 전위로서 결의를 다진다.
87년 이들이 집중한 일대 개혁적 화두는 서울의 일부 대학 중심으로 전개됐던 학생운동을 대중화하고
전국화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목표를 성취한 결과 6월항쟁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6월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4·19 때처럼 대학이 소재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투쟁이 일어나고 진행됐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수도권과 지방에서 대학을 거점으로 항쟁의 전위와 근간을 장악했던 것이다.
6월항쟁 직후 이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국의 대학생들을 대표하는 조직인
‘전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전대협 주요활동 (출처 : 아고라)
- 전대협 / 오월대 / 녹두대를 중심으로
참고로, 본좌도 들은 이야기여... 틀린 거 있음 댓글 달라구~
시청광장에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깃발 뜬거 봤지?
느그들... '전대협/오월대/녹두대'가 뭔지 아나? 아는 사람은 그냥 패스하쇼~
전대협은 쉽게 말허자면, 전국의 모든 대학교 학생회장단들의 모임이여...
80년대 후~90년대 초까지 대학생들은 '전대협' 이름아래 하나였다구~
전두환이 노태우가 대통령할때 대학생들이 공부가 잘 되었겠어?
매일같이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날 일들이었다구...
지금 명박이가 하는 짓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구...
걸핏하면 시민들 잡아다가 남산으로 끌고가서 치도곤을 쳐대니까
그나마 겁대가리 없는 우리 대학생 형들이 젤 앞에서 매일같이 싸울수 밖에 없었다구...
그땐 데모할때 '촛불'같은 건 없었어.
뭐... 거의 90%의 학생들은 그냥 맨손으로 나갔어. 생각해봐...
여학생들이 쇠파이프 휘두르는 건 좀 이상하쟎어? 남학생들도 보통 깡다구가 아니면
전경애들하고 맞짱뜨기가 쉽지가 않았어...그때는 전경한테 잡히면
작살나는게 문제가 아니라 까닥 잘못하면 빨간줄이었단 말이여...
그런데도, 우리 형님들... 지금은 다들 애기아빠가 된 형님들인데...
그 형님들 중에 몇몇은 쇠파이프(파이..라고 불렀어)/화염병(꽃병...이라고 불렀어) 을 들고
제일 앞에 서서 수백~수천명의 자기학교 학생들을 보호하면서 전경애들하고
데모할때마다 맞짱을 떴단 말이지... 보통은 다들 쇠파이프를 들고 나가고 어느 순간 뒤에서 '
찔러 넣어준' 꽃병을 휘리릭~ 날려준단 말이여... 과격하다구? 웃기지말어...
내가 말했지? 전두환이 노태우 때 였다구... 시민한테 총 쏜놈들한테 꽃병이 뭐가 과격해... 앙?
하여간에 학교마다 그렇게 소위 '쇠파이프 들고 싸우는' 형님들끼리
본진의 학생들을 사수하기 위해 만든 '사수대'들이 있었어... 사수대의 싸움실력도 천차만별이라구...
보통은 학교크기순서대로 싸움을 잘하다고 생각하면 되... 당연한거 아니겠어?
학생수가 많으면 지켜야 할 시위대 규모도 크고 그런 학교일수록 '사수대' 숫자도 많으니까...
대략 전국적으로 잘 싸운다고 소문난 학교들이 몇개 있는데, 서울은 보통 고려대/성균관대/한양대
이 세 학교의 사수대가 서울집회때마다 젤 앞에 서는 경우가 많았어.
세 학교 모두 80년대만 해도 학교안에서 '여학생' 찾기 힘들 정도로 남자들이 득실득실한 학교였쟎어...
그런데, 이 학교들의 사수대도 한수 아니라 세수쯤 접어줘야 하는 사수대가 있었다고...
그게 바로 '오월대'여... 오월대란 학교가 어디 있냐구? 학교 이름이 아니라
전남대학교의 사수대 이름이 바로 '오월대'란 말이여... 쌈실력으로 하면 최고여... 그리고 또 하나...
바로 '녹두대'여... 전남대에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
조선대학교의 사수대가 바로 '녹두대'였다... 이말이지...
그때도 지금 같아서 서울에서 크게 한판 붙어야 할때는 지방에서 다들 올라왔는데,
그런 전국규모 시위에서 가장 '위급할 때'면 늘 오월대/녹두대가 앞장을 섰다고...
촛불집회 하면서 강달프/칼라티비/엠비쒸/오마이... 옆에 지나가면 박수치지?
그때는 '오월대'와 '녹두대'가 옆으로 지나가면 '박수'도 치지만 '안심'을 했다고...
아, 오월대랑 녹두대가 있구나... 오늘은 무조건 이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거지....
좀 길어졌지? 그래도 에피소드 하나는 말해줘야겠어...
녹두대와 오월대가 얼마나 위대한 사수대였는지 말이여..
때는 바야흐로... 19년전이여... 그러니까... 89년도란 말이지...
그것도 바로 8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일까지의 2박3일이여... 아주 정확하게 19년전일이네?
뭐... 무지하게 긴 이야기지만, 짧게할게...
89년 6월 29일에 한양대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다 모이기로 했는데
당연히 노태우는 못 모이게 하고 싶어서 한양대를 완전히 봉쇄를 해버린거여...
그나마 일찍 학교로 들어간 학생들도 있었지만 못 들어간 학생들도 엄청나게 많았다구...
근데, 그때 우리 형아/누나들은 지금하고는 틀려서 못 넘게 해도 어떻게든 뚫어내야 직성이 풀렸단 말이지?
그래서... 위에서 '지령'(그때는 다들 "택"이라고 그랬어)을 내렸어...
아, 그땐 핸드폰 아니라 삐삐도 없던 때야…
어느 학교는 몇시에 지하철 2호선 무슨역으로, 어느학교는 또 무슨 역으로 가서,
몇시에 들어오는 지하철을 무조건 타라!!! 그래서 우리 형아 누나들이 시키는대로 했다나봐...
지하철 열 칸이 다 대학생들로 가득차서... 짐칸에도 사람들이 올라가야 할 정도였대...
형 누나들을 태운 지하철이 한양대 역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올때쯤...
드디어 '오월대'와 '녹두대'가 한양대 안에 짱박혀 있다가 슬슬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
쇠파이프를 들고말이여... 그리고 X나게 내려치기 시작한거여...
전경들 깜~짝 놀래서 그때부터 한양대 정문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한거지...
여기저기 흩어졌던 전경들을 죄다 정문으로 모았을때쯤...
지하철은 뚝섬역으로 도착해... 그리고... 몇몇 학생들이 지하철을 막아 서고...
지하철 안에 있던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이 나와서
뚝섬역에서 한양대역까지 철길을 '냅다' 뛰기 시작한것이여...
오월대와 녹두대가 선봉에 서서 정문에서 전경이랑 '한판' 제대로 붙으면서
경찰애들 시선 붙잡아두고는 일반 학우들이 무사히 철길을 뛰어 사다리를 타고
한양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거지... 대단하지 않어? 아, 글 쓰면서... 닭살이 일어 난다....
그리고 그날 밤, 임종석 전대협 3기 의장이 3만여 학생을 앞에두고 엄청난 발표를 해버려...
'한국외대 임수경'이란 여대생이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때 평양에서는 '평양 학생 축전'이라고 해서 평양으로
전세계의 (주로) 공산권 국가의 대학생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도하고 뭐 그런 행사가 있었는데,
우리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임수경 학생을 일본으로 독일로 해서 결국
평양으로 들여보내버린 것이었어...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구...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을때였거든...
그리고 그 엄청난 사실을 '한양대'에서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 발표를 덜커덕 해버린 것이었어...
그 발표를 듣고 한양대에 모여있던 학우들도 놀랬지만 노태우도 놀래자빠져서
무조건 임종석이랑 전대협 지도부를 잡아들이라고 하지...
자, 한양대에 진입할때는 뚝섬역에서 냅다 뛰어서 들어가긴 했는데...
나올때는 어떻게 나올수 있을까? 뭐 명박산선을 어떻게 넘을까...
고민하는 우리랑 그때 우리 형/누나들이랑 처지는 비슷한거 같다.
그지? 아무튼... 학교 밖으로 나오기는 나와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은거여...
쇠파이프 휘두르면서 나올 수 밖에 없는데, 누가 앞에 설 것이냐?
얼마나 잘 싸워야 학생들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학교밖으로 무사히 다 빠져나올 것이냐...
고민들어가는거지...
드디어... 나와야 하는 때가 되었어...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어서 나오기로 했을때...
제일 선봉에 선 사람들이 누구냐... 바로 녹두대와 오월대야...
쇠파이프 단단히 붙들어 매고 녹두대와 오월대, 오월대와 녹두대가 선봉에 서서 길을 열기 시작한거야...
길을 연다고 싸움만 한게 아니라... 그 한가운데 전대협 3기 지도부를 호위하면서 싸움을 한것이란 말이지...
조선대/전남대 재학생들은 정말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대단하지 않어?
결과?
허접했으면 어디 아까 '뚝섬대첩(혹은 한양대대첩 이라고도 많이 불렀어)'이라고 했겠어?
당연히 이겼지... 그때 한양대 앞에 깔렸던 전경의 숫자는 지금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지 않았을 거야...
뭐..숫자가 뭐가 중요해... 그때는 아예 대놓고 학생들 두들겨패고 최루탄/지랄탄 쏴대던 시대였쟎어...
아, 너무 길게 썼다...
아무튼... 전대협/오월대/녹두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건...
'애기 아빠'들 뚜껑이 완전히 열렸다는거야... 두달 동안 촛불 보면서...
나이 마흔 살 가까이 된 사람들이... 많이 울었어... 난 알아... 그 사람들 마음을...
저 촛불을 같이 들고 싶은데, 아니 촛불 아닌 화염병이라도 들고 싶은데
속물이 될대로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고, 아직도 그 순수와 열정이 가슴속에 살아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했었고, 그 파~랗던 시절이 그리워서 촛불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려왔다는 걸 알아...
오늘은 2008년 6월 28일이야...
명박이하고 제대로 한판 승부를 하는 날이지...
난...
그때 그 형/누나들이 지금도 참 자랑스럽고,
그때 그 형/누나들보다 지금 물대포를 맞으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매일같이 촛불을 들어주는 동생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고마워...
우리는...
꼭 이길거야...
난 믿어.
왜냐면 말이지...
우리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두달동안 이미 우리는 승리해왔으니까.....
그냥...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깃발을 보고 길게 적어봤어...
쇠파이프 들란 소리로 절대 듣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냥… 전대협이 뭔지, 오월대는 뭔지, 녹두대는 뭔지,
그때 이십년전 우리 형, 누나들은 어떻게 데모 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적어본거야. 정말이야.
혹시 오늘 거리에서 전대협 깃발 아래 팔뚝질 하는 형/누나들을 보면...
아, 저 형/누나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저 사람들이 우리가 지금 마셨어야 할지도 모를 최루탄 가쓰를 다 마셔주어서
우린 물대포로 끝나나보다~ 하는 생각을 쫌만 해줬으면 해...
아무튼, 모두들 너무 고맙고 사랑해~~~
자, 이제 쥐 잡으러 가자!!!
1. 요즘
'08.7.2 6:15 PM (211.236.xxx.50)새삼 느낍니다.
그때 얼마나 외루웠을까 ~
임수경 북한갔다고 얼마나 욕들을 해댔는지..ㅠㅠ
임종석 전대협회장 우리고향출신이에요
내친구동네사는데.
얼굴잘생기고,공부잘하고,여학생들사이에서 인기짱이었어요2. 박쥐
'08.7.2 6:19 PM (118.127.xxx.207)저도 이거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들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그들에게 빛진 느낌이 너무 들어요..
지금 이렇게 민주주의 국가로
재탄생하게 된것이 그들 덕분인데
우리가 잊어 먹은것같아요..
그들이 해낼수 있었다면
우리들도 해낼수 있습니다..
우리의 외로움은 정말 그들에 비하면
너무 미안하기 까지 하더라구요...3. 기억해야 할
'08.7.2 6:20 PM (121.131.xxx.127)이제 우중에
곧 시국 미사가 다시 시작됩니다.
기도 부탁 드립니다
그때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발표하신 신부님은
고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이십니다.
지금은 선종하셨습니다.4. 덧붙여서
'08.7.2 6:27 PM (121.131.xxx.127)또 기억해야 할 분들이 계시죠..
저 자리에
저는 없었습니다만
최근에 읽은 후일담을 전해드리면
저때의 탈출을 위해
몇 학우들이 옥상에 올라가 노래와 구호를 선창하여
전경들의 관심을 돌렸다 합니다.
전원 무사히 탈출햇으나
그때 옥상에 있었던 학우들은
모두 구속되었다고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모욕은
우리에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결곡한 젊은이들의 희생에 대한 침뱉기이지요
그때 그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던
그 정권의 잔여세력중 많은 숫자가
집권 여당에 남아
지금 같은 짓을 자행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남는 걸 배웠습니다.
사제단이 오늘 비폭력을 강하게 외치는 까닭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반복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시도를 뛰어 넘어야 하는 거지요
허락된다면
단 한 번도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 들을 수 없는 이름
그게 386 세대에겐
전대협입니다.5. 정의를말할수있는사회
'08.7.2 7:02 PM (58.120.xxx.217)경향신문의 전대협 출정가를 읽어가는데 울음이 터져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땐 몰랐는데 제가 그런 시절을 경험했구나 하는걸 대학생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중학교1,2학년때였는데 저희학교와 담 하나 너머 국립대학교가 있었어요.
옆 대학교에서는 거의 매일 시위가 있고 최류탄이 터지고 가까운 거리인지라
너무 매워서 최류탄에 대해 잘 몰랐던 우리는 물로 씻어내려 했다가 더 매워 고생하고.
대학생 오빠들이 담을 넘어 저희학교로 뛰어 들어와 도망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죠
학교가 있는 동네에 당시 전대협 의장인 임종석의 수배전단이 얼마나 많이 뿌려졌는지.
학교에서 우리끼리도 대학생 언니오빠가 있는 아이들에게서 임종석과 전대협의 신출귀몰 무용담을 워낙 많이 들었는지라 수배전단을 주운 우리들은 그 종이를 교과서에 끼워 갖고 다니면서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제발 잡히지 말아라 기도하면서.
당시에는 그저 우리끼리의 얘기에 불과했고 이렇더라 저렇더라 였는데
그 때 들은 얘기들을 지금 다시 듣고 그 놀라웠던 이야기들이 사실인 걸 보면서
가슴이 저립니다.
사실 대학교 들어가서는 지금보다 눈물나게 전대협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습니다.
사람이 참 간사해서 지금 내가 이 현실에 처하니
“돌아오지 못할 각오로 거리로 나갑시다.
단, 우리의 무기는 각목이나 화염병이 아니라 오직 순결한 도덕심과 뜨거운 결의뿐임을 잊지 맙시다.”
'순결한 도덕심과 뜨거운 결의'에 큰 울음이 납니다.6. 메지로
'08.7.2 10:30 PM (119.196.xxx.98)정말 눈물이 쏟아지네요. 그 때 함께 못했던 1인 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마음의 부채를 덜기 위해서라도 그 때 그 분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내려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승리의 그 날까지 끝까지 함께해요!7. ...
'08.7.2 11:59 PM (122.32.xxx.129)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그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세대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많으니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을 꼭 지켜내야한다고 다시한번 다짐합니다.8. 한양대
'08.7.3 10:21 PM (211.207.xxx.85)전 88학번입니다..그때 한양대에 있었답니다..
지금도 그생각하면 정말이지 꿈만 같네요
전 노래패라 미리 한양대로 가있어서(담넘어서) 그 뚝섬대첩은 얘기로만 들었는데.. 굉장했어요
그날밤 임수경이 평양갔다는 얘길 듣구요 다들 엄청 놀라구..
잠도 강의실 맨바닥에 신문깔고 잤네요
그담날 전경들이 쳐들어와서는.. 최루탄에 지랄탄에 백골단들.. 완전 아비규환..
눈앞에서 막 곤봉을 휘두르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초인적인 힘이 생기더라구요
그때 우리동아리 후배 한명,선배 한명 잡혀갔었어요
가방도 못가져오구 겨우 몸만 빠져나와서는 달리고 달려서 건국대까지..
저글 쓰신분 어쩜 그리 기가막히게 잘쓰셨는지..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런시절도 견디어 냈는데.. 그까이꺼 이명박..
우리 지치지말구 싸워 나가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