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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노무현과 조중동 갈등의 뿌리(옛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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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07-01 23:54:46
노무현과 조·중·동 갈등의 뿌리

역사적으로 한국의 신문은 권력과의 싸움에서 패배와 굴종, 승리와 군림을 경험해 왔다. 혹독한 탄압도 경험했지만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 창출에 결정적 동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50여 년간 역대 정권과 신문은 늘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물리력으로 제압당했고 민간정부 시절에는 세무조사의 철퇴를 맞기도 했다. 밀월 기간도 있었지만 늘 그 기간은 짧고 불안정했다.

역대 정권은 신문의 효과적 통제 없이는 국정운영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신문은 신문대로 정권을 압박하면서 경쟁적으로 독자를 늘렸다. 정권의 이해와 신문사의 이해관계가 부닥칠 때는 과감하게 붓을 휘둘러 신문사의 이익을 옹호했다. 여론을 장악한 신문은 문민시대 이후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며 또 하나의 권력, 지금 노무현 정부가 규정한 대로 ‘제4부’의 반열에 올랐다. 그 신문의 위력, 정치권력과 ‘맞장뜨는’ 위치에 오른 한국 메이저 신문들의 대명사가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를 일컫는 이른바 ‘조·중·동’이다.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정권과 메이저 신문 간에 새로운 종류의 긴장을 형성했다. 역대 어느 정권도, 신문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DJ 정권도 집권 기간 내내 조중동과 긴장을 유지했지만 그는 야당 시절부터 메이저 신문의 도움 없이는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신문의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 입문과 동시에 신문과 전쟁을 벌였다. 그는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싸움을 통해 특정 신문들에 대한 인식을 굳혔다. 그는 선거 기간중 “메이저 신문과 화해하자”는 참모들의 의견을 물리쳤다. 그는 오히려 일부 참모들을 설득하고 질책했다. “그런 진부한 생각으로 나를 도우려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참모들은 ‘노무현과 조중동의 역설’에 대해 말한다. 조중동과 타협하지 않고, 조중동에 맞서 싸움으로써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그는 메이저 신문과의 싸움을 통해 서민·진보진영의 대표주자라는 아이덴티티를 확보했고 신문과의 싸움을 쟁점으로 전환시켜 젊은층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조중동이 더 이상 여론 주도의 핵심 세력이 아니며 확고한 언론정책을 밀고나가면 새로운 판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노무현은 조중동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 신세진 것이 없으니 굴종할 필요도 없다. 언론은 언론의 길을 가면 되고, 정부는 정부의 길을 가면 된다.”
노무현 정부가 소위 조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세 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지난해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조중동이 발휘하던 막강한 여론 형성과 의제 설정 기능은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 인사는 ‘트라이앵글’(삼각형)의 비유를 든다.

“트라이앵글은 구조적으로 견고한 도형이다. 견제와 협력을 통해 3개의 축은 굳건한 정체성과 균형적 힘을 발휘한다. 동시에 트라이앵글은 취약한 구조다. 한 축이 무너지면 나머지 두 축도 위태롭다. 조중동은 여전히 강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이번 대선때 그 축의 일각에 균열이 생겼다.”

트라이앵글의 비유?묘한 여운을 일으킨다. 과거 3대 재벌로 꼽혔던 삼성-현대-LG가 그렇고 학벌사회의 트로이카 서울대-연세대-고려대가 그렇다. 진입의 여지를 주지 않는 KBS·MBC·SBS의 굳건한 방송 3사가 또한 트라이앵글이다. ‘보수적 신문’ 카르텔, 재벌, 명문 학벌이 모두 3각체제이고,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이 3개의 ‘기득권 집단’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중동이 과연 ‘기득권 집단’이냐를 논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조중동이 여전히 ‘여론시장’의 강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신문시장을 지배하고 국정의 의제를 제기하며 대중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심지어 정권의 창출까지 기획하는 존재’라는 것이 조중동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이다.

실상 신문시장을 지배하는 조중동의 위력은 막강하다. 조중동이라는 말 자체가 신문시장에서의 점유율 순에 기초한 명명이었다. 도합 500만부가 넘는 3사의 판매부수는 시장점유율 70%를 상회하고, 3사의 매출액(2002년 기준)은 1조3,000억원, 순이익은 900억원을 넘겼다.

10개의 중앙 종합일간지 중 조중동을 제외한 7개 매체의 매출액을 모두 합쳐도 조중동 중 3위 매체의 매출액과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해 흑자를 기록한 종합일간지는 조중동을 제외하고는 1억3,000만원의 순이익을 남긴 ‘한겨레’가 유일하다.

조중동은 상류 보수층의 거의 전부, 중산층의 절반 이상을 독자로 아우르는 거대 매체군이다.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조중동을 보지 않으면 “뭔가 신문을 읽지 않은 느낌이 든다”는 고백을 하며, 마이너 매체를 구독하는 독자의 상당수가 조중동을 함께 구독한다. ‘여론 형성과 의제 설정 기능이 현저히 약화됐다’는 진단은 그래서 ‘체감적’인 것일 수 있어도 아직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경기가 가라앉을수록 광고 역시 조중동에 몰린다. 광고주들은 조중동 독자의 볼륨과 구매력에 주목하며 불경기일수록 효과가 높은 조중동의 광고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광고비의 기회비용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서다. 신문시장은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의 사이클을 순환하고, 현 정부가 어떤 정책적 수단을 동원하든 조중동의 아성과 영향력을 단기간 내에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은 지난한 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조중동과의 갈등이 보수와 진보세력의 갈등이면서 동시에 세대 간의 갈등이며 여야간 갈등의 양상을 띠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갈등은 조중동이 표방해온 보수적 정치관, 보수적 대북·대미관, 재벌관과의 싸움이며 지역주의, 학연주의, 정실 및 보스주의, 패거리주의, 기회주의와의 싸움으로도 인식하고 있다.

노대통령에게도 그러나 딜레마가 있다. 그는 개혁 세력의 ‘짱’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이제는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서 있다. 대북·대미 관계의 해법을 통한 한반도 분쟁 방지, 경제안정, 성장 기조와 병행하는 사회적 개혁, 그를 뽑아준 시민사회와 대한민국의 보수·주류사회를 조화시켜야 한다. 상반된 두 축의 부담을 동시에 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조중동은 그래서 공격과 배제의 대상이면서 타협과 협조를 구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전체 언론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언론판 전체를 쥐고 흔들었던 5공의 언론정책과 달리 노대통령의 언론정책은 한정된 전선의 한정된 매체를 향할 수밖에 없다. 조중동 3개 매체를 싸잡아 공격하기보다 ‘합리적 보수’와 ‘맹목적 보수’를 가르고 장기적으로는 3개 매체의 사회적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신문시장 재편’을 구상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중동 3개 메이저 신문을 바라보는 시각은 중층적이다. 3개의 매체는 동일성과 함께 차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일성에 대해 우선 이야기한다. 2001년 11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지지자 단합대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특권을 누리는 수구언론들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일어나 싸우고 있습니다. 대통령선거의 과정은 ‘신문만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대선의 전 과정에서 언론개혁을 위해 저는 싸울 것입니다.”

그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그 주된 대상을 ‘신문’으로 한정하고 있다. 대선 가도의 적(敵)으로 신문을 상정했으며 여기서 신문이란 ‘조중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언론개혁의 주체는 ‘권력’이 아니다. 그는 여러 차례 ‘정부가 언론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국민과 시민단체를 언론개혁의 주체로 상정한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일조한 진보적 시민단체가 바라보는 조중동은 어떤 신문인가.

노무현이 보는 조중동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최민희 사무총장은 한국 메이저 신문의 문제점을 ▷상업주의 ▷권력지향 ▷보수주의 ▷사대주의라고 지적한다. 광고聆?눈치를 보며 ‘장사’를 위해 선정적 기사를 양산하는 상업주의, 신문의 힘으로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권력지향, 이데올로기의 극단을 추구하는 극우적 논조, 친미적 세계관을 유포하는 사대주의적 시각을 조중동 3개 매체가 일정부분 공유하는 것이다.

조중동이라는 용어를 처음 언론에 쓴 정연주 KBS 사장은 한겨레 논설위원 시절인 지난 2000년 10월에 쓴 칼럼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img2R“…군부독재 정권에 빌붙어 온갖 굴종과 왜곡으로 군부독재 정권의 수명을 떠받쳐온 수구언론, 조폭의 왕초처럼 제왕적 권력을 누리면서 조폭적 행태를 일삼는 세습 수구언론의 사주(社主)들, 이들 사주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중간보스들의 노예 근성과 이들이 휘두르는 붓의 폭력성, 조폭의 관할 영역 확대를 위한 피투성이 싸움처럼 판매부수 1위를 위해 벌이는 살인적 판매경쟁 양태, 이런 조폭 수준의 신문들이 신문시장의 60% 이상을 장악하면서 이 땅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이 처절한 상황….”

당시 ‘조선’과 ‘동아’를 주 타깃으로 삼아 쓴 이 기사는 ‘조폭언론’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는 몇 가지 문제를 동시에 제기했다. 메이저 신문의 과거사, 세습사주, 즉 족벌체제의 문제, 편집 간부와 기자의 의식 문제, 파행적인 신문시장에 관한 문제가 그것이다. 당시 그가 제기한 문제점으로만 보면 조중동 3개 매체는 거의 ‘악의 축’이나 다름없는, 없어져야 할 언론매체였다.

메이저 신문 매체를 조폭언론으로 정의한 정연주 씨가 KBS 신임 사장으로 선임된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방송과 신문, 방송과 조중동간 매체 갈등의 또 다른 시작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는 가운데 정연주 사장의 최근 발언이 주목을 끈다.

“신문의 경우 자전거 경품을 나눠 주고 1년에 수백억 원씩 판촉비로 쓰고 있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전공이 ‘독과점’ 관련 내용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다. 불공정한 경쟁은 자본주의를 파괴한다. 우리 사회 모든 부분에서 독점, 독과점, 불공정 등이 존재한다. 반드시 넘어가야 할 장애물이다. 분명히 신문시장에는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

KBS를 운영함에 있어 “나 개인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정사장의 전제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신문시장 재편’ 논리와 이념이 방송 보도 프로그램 제작의 이슈로 등장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MBC와 KBS가 이념적 카르텔을 형성하고 조중동이 지배하는 신문시장의 이념적, 경제적 판도에 충격과 변화의 화두를 제기하리라는 것은 무리한 전망이 아니다.

조중동을 바라보는 노대통령의 심리 기저에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노대통령의 언론관은 특정 신문사와의 악연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는 지난 4월2일 취임후 첫 국회연설에서 그 피해의식의 일단을 드러냈다.

“몇몇 족벌언론은 군사정권이 끝난 뒤에도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끊임없이 박해했다. 나 또한 부당한 공격을 받아 왔고,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피해’를 가슴에 담고 언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그가 입은 상처의 크기와 깊이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가르샤 효과’라는 심리학적 용어로 그 피해의식을 설명한다. ‘가르샤 효과’란 우연에 의해 일어난 자극적 경험이 유기체의 행동이나 생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것이 하나의 분명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말한다. 황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img3L“쥐에게 음식을 먹인 후 복통을 일으키는 전기쇼크를 계속 주면 쥐는 아무리 좋아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게 된다. 그 행동을 보인 쥐는 전기쇼크를 받기 얼마 전에 그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특정 신문사와의 악연은 정치인 노무현이 경험한 언론사와의 누적된 억울한 사건들에 의해 지속적이고 강한 불신으로 남게 된다.”

정치인 노무현이 보는 3개 신문의 성격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는 중앙의 합리적 보수성을, 동아 기자들의 기자정신에 주목한다고 말한다. 논조와 구성원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2000년 2월1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앙일보도 보수지이지만 그건 인정해야 한다. 보수지라고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보수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동아일보에는 기자정신이 살아 있는 기자들이 상당수 있다. …동아일보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전통이 있다.”

당시 노무현 민주당 고문의 이런 발언은 다분히 ‘전략적인 측면’이 있다. 조선일보를 제외한 나머지 두 신문을 견인 내지 중립화하려는 대권전략이었을 수 있고 3개지와 동시에 전선을 꾸릴 수 없었던 당시 노 고문의 힘의 한계를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 한 정치인이 신문의 이름을 거명하며 자신의 관점에 매체의 장래성이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당시 분노하는 언론인이 적지 않았다.

어쨌거나 노대통령이 조중동의 ‘서로 다름’을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 조중동 매체의 본질적 차이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같음’에 더 주목하는 측면이 있다.

“조중동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는 인식 속에는 지난 대선 기간 위력을 발휘했던 인터넷 매체의 놀라운 영향력, 방송과 마이너 신문 매체가 보여준 ‘상대적 우호’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있다. 노대통령은 조중동의 같음과 다름에 주목하면서 같음의 근거가 되는 3개지의 독과점 체제의 해체를 자신의 언론정책의 핵심적 관건으로 생각하고 있다.

노대통령에게 ‘주적’(主敵)은 역시 조선일보다. 그러나 노사모의 대표였던 명계남 씨의 2002년 5월 발언은 그 문제에 관한 또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
“조폭언론이 여럿 있지만 ‘운동 동력상’ 조선일보를 목표로 한다. 앞으로 (대선 전까지) 조선일보 50만부 절독운동을 벌이겠다.”

‘운동 동력상’이라는 표현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술적 카드를 의미한다. 트라이앵글의 한 축을 집중 공격한다는 의미에서 조선일보가 공격 대상이 됐지만 메이저 신문 전체가 ‘잠재적 적군’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보수적 신문 카르텔 혁파

노후보도 노사모의 이런 전술에 공감을 표시했다. 그는 명씨의 발언 3일 후에 열린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노사모의 특정 신문 50만부 절독 운동에 동의하느냐”는 한 패널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중동 트라이앵글 체제의 속성에 대한 정권 핵심부의 판단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권내 한 언론 관계자는 조중동의 목표와 갈 길이 제각각 다르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일보는 반노(反盧) 세력의 결집으로 인한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노정부가 조선일보를 공격하면 할수록 그 반사이익이 커질 것이다. 조선일보의 목표는 그 반사이익을 토대로 한 1위 고수가 목표다. 그래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논조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중앙일보는 조선일보의 뒷북치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중앙은 다른 행보를 취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홍석현 회장이 ‘조선 따라가기’를 하지 말라는 지시를 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정부와 채널이 없는 조선일보에 비해 중앙일보는 더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

동아일보는 정부와 이념적 대립에 별로 관심이 없다. 동아의 목표는 2위 탈환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논조의 변화와 진폭도 큰 편이다. 정부와 근본적인 갈등관계에 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노정부는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있고 거기에 맞게 대처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중동을 바라보는 시각, 그가 생각하는 ‘보수적 신문 카르텔의 혁파’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문화적·정서적 양상을 띠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메이저 신문 손보기가 세무조사를 통한 압박이었다면, 노무현 정부의 메이저 신문 개혁은 아직 본격적인 수단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그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제도 개혁을 통한 언론개혁은 여소야대 국면에서는 불가능하다. 입법부의 법률 개정이 필요한데 당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소수파이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 이후 정치지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현 정치구도 하에서 정간법 개정을 통한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 등의 조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중동과의 싸움에서 노무현 정권이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은 이렇듯 현재까지는 한정돼 있다. 정권내 언론 담당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점을 인정한다. 이른바 ‘권언유착’이 깨지고 마이너 매체, 대안매체가 떠오르고 있지만 점유율 70%가 넘는 조중동의 판매부수는 오히려 신장세에 있다.

기자실 폐쇄나 정부 부처 취재 관행의 조정도 본격적인 제도 개혁이라기보다 소프트웨어상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제도 개혁이 아직 불가능하다면 취재 문화와 관행에 충격을 주자는 것이 노무현 정부 초기의 언론 대책이다.

“적대적 언론까지 수용하라”

그러나 이 같은 문화적 충격 요법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정권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다. 이창동 장관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추진한 기존 취재 관행 혁파가 전체 언론의 불만과 항의에 봉착해 있고 당초의 기획으로부터 상당히 후퇴했기 때문이다. 후보 시절 언론특보단에 속해 있던 한 여권 인사는 이렇게 우려했다.

“전선이 방만해졌다. 노대통령이 마치 전 언론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 같은 오해를 사고 있다. 대통령의 불쑥 던지는 발언들, 소위 ‘언사(言辭)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로 전선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졌다.”

그러나 대통령이 일관된 언론정책을 임기 내내 밀어붙였을 때의 결과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과거처럼 독자들이 메이저 신문이 주입하는 정보와 견해에 계몽되기보다 ‘비판’하고 비판을 ‘표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김재홍 경기대 교수는 미디어의 ‘파워 시프트’(힘의 이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대선에서 거대 신문의 집중포화를 받은 노 후보가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조중동이 노후보를 깎아내릴수록 여론조사에서 노후보의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갔다. 노후보의 지지자들은 온라인 안에 있어서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대안매체의 힘이 미디어판의 ‘권력의 이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와의 싸움을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언젠가 사석에서 “조선일보와 싸우지 않는 정치인은 애국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특정 신문과의 싸움을 국정의 화두로까지 삼는 것이 과연 대통령의 바른 태도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과거 참모들 중에는 “차라리 무시하고 포용하라”고 조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체제를 유지하는 두 개의 중요 시스템인 정부와 신문이 감정적 싸움에 골몰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서강대 신방과 이효성 교수는 정부와 메이저 신문과의 신뢰 회복을 이렇게 주문하고 있다.

“정부와 언론 간의 건설적 긴장관계를 위해 참여정부와 언론은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선의와 취지를 존중해야 한다. 정부는 하루빨리 비밀주의를 타파하고, 정보공개제를 확립하고, 진솔하고 효율적인 브리핑 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는 자신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태도, 심지어 적대적 태도조차 수용하는 아량을 지녀야 한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질긴 氣싸움
■‘딸배’소송 사건

1988년 13대 총선에서 42세의 팔팔한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무현. 그는 마침 그해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 예리한 질문과 격정적인 대쉬로 증인들을 몰아붙이며 단시간에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마침 불어닥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열풍 속에 자연스럽게 그런 노의원에게는 그동안 사회 곳곳에서 숨죽여 살던 ‘힘없는’이들의 발길과 하소연이 이어졌다.

1989년 중반 무렵 어느날 국회의원회관의 노의원 사무실로 허름한 차림의 20대 청년 몇 사람이 찾아왔다. 일행 중에는 10대로 보이는 앳된 소년도 있었다. 당시 노의원 보좌관이던 이호철(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 씨와 이광재 씨가 이들을 맞았다. 그들은 당시 한 일간지 배달업소의 종로지국에 속한 ‘딸배’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딸배는 당시 신문배달원을 가리키는 비속어였다.

사연인즉 자신들이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생활하며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데 자기들 권익을 찾아줄 수 있는 길이나 방도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보좌진의 안내를 받아 노의원을 만난 딸배들은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아도 노의원이 우리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언론사를 등에 업은 지국장들과 싸우고 있는지 현장에 한번 와 보기나 해 달라”고 했다. 이미 국회의원이 되기 전부터 ‘아스팔트의 사나이’로 불리며 일이 있는 현장을 쫓아다니는 데 이골이 난 노의원은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딸배들의 안내를 받아 종로의 한 동네에 있는 그들의 합숙소를 찾아간 노의원은 현장에서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목격하고 사연을 들었다. 허름하고 좁은 한옥에서 그들은 지국(支局)측 관리인에 의해 모든 생활을 ‘관리’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딸배들이 ‘인간다운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하자 지국측은 합숙소의 전기를 끊고 폭력배를 동원해 폭력을 휘둘렀다고 이들은 증언했다. 더욱이 투쟁에 나선 일부 딸배들은 일방적으로 해고당한 상태였다. 법조인 출신답게 노의원은 그 자리에서 관리인을 불러 불법사항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문제의 신문사 기자가 의원회관의 노의원 방으로 찾아왔다. 정치권에서 신문기자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세가 당당하던’시절이었다. 기자는 노의원에게 다짜고짜 “정치인이 정치나 잘 하면 되지 왜 그런 일(딸배들의 권익투쟁)에 참견이냐”고 했다. 기자의 그런 말에 초선의원이 감히(?) 되받아쳤다. “기자면 기사나 잘 쓰라”고. 이호철 비서관의 기억.

“노대통령이 그 일에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배달원들에게 변호사도 소개해 주고 그러면서 결국 지국을 상대로 소송까지 들어갔어요. 한 3년 끌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의원 스타일이, 줄곧 그 일에 간여했고 결국 배달원쪽이 승소했죠. 배달원들의 생활조건이 달라졌고요. 하지만 노의원은 큰 적을 만든 셈이었습니다. 3년을 끄는 동안 신문사쪽에서 노의원을 곱게 보았을 리 없고요. 또 노의원 역시 그때 메이저 신문과 처음 공식적으로 대립하게 됐죠. 그때 아마 메이저 신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깊이 하게 됐을 겁니다.”

정치인 노무현과 이른바 조·중·동으로 축약표현되는 메이저 신문의 첫 만남 장면은 이런 것이었다. 3년이나 소송을 끌었고 더욱이 끝내 화해 없이 판결로 승부가 Ⅷ홱募?점, 이런 점에서 송사를 벌인 양쪽은 한국적 정서상 어떤 심정들을 갖게 될까. 특히 딸배쪽이 아니라 막강한 메이저 언론사를 배경으로 업은 지국쪽이 졌다면, 지국과 신문사쪽은 상대방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주간조선, 그리고 요트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 사건은 처음 ‘발생’후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될 때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음으로 양으로 곤혹스럽게 했다. 기사를 읽지 않았을 독자들을 위해 당시 ‘주간조선’ 우종창(현 월간조선 취재2팀장) 기자가 작성한 이 기사 중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기사 제목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1년 전 정가에 나돈 얘기는 노의원이 겉으로는 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재에 밝아 재산이 상당액에 달하며, 인권변호사로서의 역할도 상당부분 과장돼 있다는 것이었다. 또 요트 타기를 즐겼을 뿐 아니라 노사분규 중재 과정에서 ‘재미’를 보았다는 말도 있었다. … 1년 전 이미 ‘상당한 재산’과 ‘요트’등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노의원이 이번에 프로필 해명 문제로 다시 한번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 노무현은 돈을 벌기 위해 (판사) 사표를 냈기 때문에 1978년 5월 부산에서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낸 뒤 주로 한 일은 민사사건이었다. … 그러면서도 그는 ‘등기사무’에도 손을 대 부산지역 사법서사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등기사무는 변호사 업무에 속하기는 하나 관례상 사법서사들의 몫으로 인정돼 돈이 되는 줄 알지만 변호사들은 맡지 않았다. … 부산 법조계에 따르면 변호사가 등기업무에 관여한 것은 노의원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 노의원의 말대로라면 1987년 7월경 그의 재산은 40여 평짜리 아파트 한 채, 콘도 회원권 하나, 친구에게 투자한 1억5,000만원이 전부인 셈이다. 본인 스스로 1985년부터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단했기 때문에 재산 증식이 멈췄다고 했으나 그 이후 그의 재산은 줄지 않고 늘었다. … 눈여겨볼 대목은 그의 형 노건평 씨의 재산이다. 건평 씨는 약 10년간 세무서에 근무했다. 그후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부동산에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 건평 씨는 고향인 진영뿐만 아니라 부산·마산·창녕 등지의 논밭·임야·잡종지·대지 등 가리지 않고 투자했다. … 지번으로 따져 그가 사고 판 부동산 개수는 40여 개에 육박했다. 이 중 어떤 부동산은 은행에 수십억 원의 근저당이 설정될 만큼 고가였다. 뿐만 아리라 건평 씨의 부인도 한때 수만평의 부동산을 소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가타부타 말이 없던 노의원쪽에서 기사가 나간 한 달쯤 뒤인 그해 11월12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명예훼손 소송을 전격 제기했다. 국회의원이라지만 40대 초반의 야당 소속 정치초년생과 정치권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힘들다고 인식돼온 메이저 신문사의 지루한 법정투쟁, 아니 전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형국으로 보면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이 메이저 언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됐을까’를 짐작할 만한 대목들을 따로 정리해 보자.

■멍투성이 법정 승리

먼저 소장(訴狀)을 접수한 다음날 노의원측은 그 사실을 주요 신문·방송에 모두 알렸다. 지금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 됐지만 당시로서는 이름난 국회의원이 그리고 야당 대변인이 신문사와 법정싸움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대단히 큰 기삿거리였다. 그러나 중앙 일간지와 주요 방송은 일제히 노무현을 외면했다. 누가 먼저 그러자고 말은 안 했지만 서로 알아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 것이었다. ‘당신이 노무현이라면’그런 언론, 언론사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됐을까.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 소송이 중도 화해로 끝나지 않고 결국 판결까지 갔다는 점이다. 물론 1차 판결 후 조선일보측이 화해를 제의하고 노의원측이 이를 받아들여 소송은 취소됐지만 그래도 1차 판결까지 끌고간 것이다. 그것은 이 송사가 한 국회의원의 혹은 한 신문의 ‘자기 힘이나 기분을 내보이기 위한 강경한 제스처’가 아니라 저마다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본질적인 자존심 대결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적 상황에서 민사상 ‘판결’이란 ‘단기적인 문제 해결’을 의미하기 십상이다. 대신 ‘두고두고 메워지지 않을 감정의 골’을 소송 당사자들 간에 파놓게 마련인 것이다. 어쨌든 1년여에 걸친 공방 끝에 법원(당시 이진영 판사)은 1992년 12월 노의원쪽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당신이 노무현이라면’ 이쪽에서 명백하게 진실을 밝히는데도 1년여에 걸쳐 당신을 몰아대는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할까.

뿐만 아니다. 법원이 1차 판결에서 노의원의 손을 들어주고 또 나중에 조선일보측이 화해를 제의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노의원측이 완승(完勝)을 거뒀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은 가려진 채 이 기사의 내용(특히 요트 부분)은 어떤 정치적 계기가 있을 때마다 상대방쪽에 거듭 인용되면서 노의원을 괴롭혔다.

당장 판결이 내려지기 전 법정공방이 한창이던 1992년 3월24일 제14대 총선. 노의원이 부산 동구에 출마하자 민자당 허삼수 후보가 이 기사를 인용해 노후보를 공격하고 나섰다. 노후보는 낙선했다. 1995년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노씨가 부산시장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민자당 문정수 후보가 이 기사 내용을 들고나왔다. 노씨는 거듭 낙선했다. 2002년 3월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때도 이 기사 내용은 노후보와 경쟁하던 이인제 후보측에 의해 다시 들먹거려졌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메이저 언론은 ‘상대방이 요트 운운 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을 뿐 ‘그것은 이미 판정이 끝난 일’이라고 보도한 곳은 없었다. ‘당신이 노무현이라면’그런 언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이와 함께 법정공방이 진행되는 동안 그 이면에서 벌어졌던 일도 언론에 대한 노무현의 이성과 감정에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느 조직에 속한 사람이든 자신의 일로 조직이나 조직의 장(長) 등 윗사람에게 일이 번지고 ‘심려’가 끼쳐진다면 그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사건에서 노무현이 그랬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일보측이 당시 노의원의 소속당인 통합 민주당과 당 고위 인사들을 압박했던 것이다.

당시 민주당 대표비서실장 조승형 의원의 얘기.

“(조선일보 민주당 출입기자가) 비서실장실로 나를 찾아와서는 혹시 노의원이 대표와 미리 협의하고 소송을 낸 것으로 의심하더라고. 그래서 함께 김대중 대표실에 가서 내가 보고했더니 초문이라고…. (기자가) 대표실 가기 전에는 ‘노대변인이 소송을 계속 유지하면 우리는 우리대로 공격하겠다’고 그러더라고. ‘무슨 공격?’ 했더니 ‘위에서 야권통합이 흡수통합이었다는 기획기사를 자꾸 쓰라고 해대서 고민’이라고 하더군. 우리가 파악해 보니 그쪽 위에서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말’ 1991년 12월호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명예싸움’에서 인용)

당시 세(勢)로 보아 대(大)정당과 미니 정당이 합친 것이었지만 양당 지도부는 야당이 통합했다는 뜻을 내세우는 터였다. 그래서 행여 언론이 이를 ‘흡수통합’쪽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저어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출입기자가 대변인인 당사자를 우회(迂廻)해서 당을, 대표와 비서실장을 흔들 경우 ‘당신이 노무현이라면’ 조직의 아랫사람으로서 그런 언론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될까.

정치초년생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자마자 부닥친 이런 사건을 시작으로 정치인 노무현은 이후 2002년 12월 대통령이 될 때까지, 아니 200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해 오늘까지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메이저 언론과 긴장 및 갈등관계(건강한가 아닌가를 떠나)를 유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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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의 전쟁 불사” “메이저 언론 국유화”

노무현과 ‘맞짱을 뜬’ 조선일보는 물론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등 메이저 언론이 노무현에 대해 어떤 기사들을 내놓아 왔는지, 거꾸로 노무현은 또 그런 조중동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응해 왔는가는 지면제약으로 여기서 일일이 옮겨 따지기는 어렵다(이에 관해서는 노무현과 조중동의 관계를 보여주는 별도 박스기사 ‘말말말’참조). 많은 사례들 가운데 특히 노무현과 조중동이 직설(直說)과 사설(社說)로 정면 충돌한 대표적 사건은 두 가지다.

둘 다 노무현의 ‘입’이 원인(遠因)이었다. 하나는 그가 해양수산부 장관일 때 발언한 “언론과의 전쟁 불사”파문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이인제 진영에서 제기한 것으로 이른바 “메이저 언론 국유화 및 동아일보 폐간” 발언 파문이다.

앞의 파문을 일으킨 단초는 2001년 2월6일 생겼다. 이날 노장관은 친분이 있던 기자 몇 사람과 점심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노장관이 했다는 발언이 이틀 뒤인 2월8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어디서 새나갔는지 노장관이 “언론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한 발언이 도하 언론에 기사화돼 나간 것이었다.

가뜩이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연초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사 세무조사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언론과 권력간 대결 국면이 벌어져 정치권 인사는 여야를 막론하고 너나 없이 언론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려고 입조심하던 시점이었다. 물론 노장관은 그런 여느 인사들과 달리 기회 있을 때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마땅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던 터였다.

2월8일 그 같은 발언 내용이 보도되자마자 이튿날인 2월9일자 조선·중앙·동아일보와 한국일보는 일제히 사설을 통해 노장관의 발언을 문제삼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노무현 씨의 언론전쟁’, 중앙일보는 ‘언론이 적인가’, 동아일보는 ‘권력의 길, 언론의 길’, 한국일보는 ‘언론과의 전쟁불사라니’라는 제목이었다.

노장관이 “정치권력이 언론과 전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 시민이나 정치인이 언론에 너무 굽실거리지 말고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하고 언론의 횡포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라고 분명히 발언의 진의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언론의 사설은 ‘권력과 언론의 전쟁’쪽으로 내용을 잡아 비판했다. 며칠 동안 노장관은 이 발언과 관련, 당시 보좌진이 보기에도 “정치생명이 끝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중동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와 비슷한 일이 1년쯤 뒤인 2002년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도 일어났다. 이 해 4월4일 역시 경선에 나선 이인제 후보의 김윤수 공보특보가 기자들에게 “노후보가 지난해 8월1일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기자 5명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내가 집권하면 메이저 신문들을 국유화하겠다’고 발언했다”고 공개한 것이 발단이었다.

김특보는 또 “노후보가 ‘언론사주들의 주식보유 제한도 필요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거부할 경우 동아일보를 폐간시키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더욱이 이날 밤 TV토론에 참석한 이인제 후보가 노후보에 대해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수호할 위치에 있는데 언론을 국유화하자고 한 것에 대해 해명하라”고 밀어붙이면서 사태는 증폭됐다. 사실이라면 실로 메가톤급 뉴스였다.

메이저 언론이 이 같은 뉴스(?)를 가만히 놔둘 리 만무했다. 이 발언의 진위에 대해 노후보에게 해명할 것을 촉구하는 비판성 사설을 싣고 연일 관련 기사를 게재해 나갔다. 특히 이 문제는 민주당 경선 과정과 맞물리고, 앞서 이 문제를 터뜨린 이후보측과 노후보측의 진위 공방까지 어우러지면서 사태가 날로 확대됐다.

언론은 연일 이 문제를 다루면서 노후보의 언론관에 대해 공세를 퍼부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입장을 달리해서 그처럼 집중포화를 맞던 노무현 캠프쪽에서는 어떤 시각으로 언론을 보았을까. ‘아이고, 이거 벌집을 잘못 건드렸구나. 앞으로 조심해야겠다’였을까.

■“초록은 동색, 최고사령부는 조선일보”

그렇지 않았다. 오랫동안 노무현을 보좌하다 지금은 지역구 출마 준비를 하고 있는 유종필 전 언론특보의 얘기.

“메이저 언론 국유화 발언 파문이 나왔을 때 노후보는 지방에서 경선 유세를 돌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 있었어요. 내가 언론을 맡고 있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거예요. 깜짝 놀라 노후보와 연락해 대책을 취하느라 분주했죠. 그런데 노후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마음은 담담한 거예요.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도 터무니없고, 어이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사실을 밝혀라, 뭐 어떻게 하라면서 신나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별로 아프지 않더라고요. 분명한 사실은 그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쪽에서는 ‘야, 저 신문들(조중동을 지칭)이 정말 초록은 동색이로구나’ 그런 것을 절감했죠.”

국정홍보처 정순균 차장도 같은 맥락의 ‘노무현의 언론관’을 전한다.
“긴 말로 수식어를 달 필요도 없이 노무현 대통령은 한 마디로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조중동,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는 아예 신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노무현 자신은 어떤가. 그동안 조중동이 그에 대해 보도했던 내용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그가 메이저 언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일별해 보자.

먼저 그는 “언론과의 전쟁 불사”발언이 있기 전인 2000년 4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언론개혁과 관련 “구체적인 얘기를 하면 파장이 일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대중매체의 지배구조, 기사가 실리는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으며 편파성이 있다”면서 “이런 것을 시정해 서민들이 대중매체에 자기들 주장을 좀더 당당하게 실을 수 있는 여건을…”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은 까닭에 당시 이와 관련해 별다른 ‘파장’은 없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이듬해 ‘전쟁 불사’발언을 필두로 노무현은 언론과 관련, 연일 ‘구체적인 얘기’를 하면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전쟁 불사’ 발언 파문 직후 조중동의 집중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가진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노씨는 “언론이 사회의 보편적 공론을 형성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내리치고 있기 때문에 ‘조폭적 언론’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고 했다. 이어 6월7일자 ‘미디어오늘’과의 전면(全面) 인터뷰를 통해서는 “수구세력 선봉에 조선일보가 서 있다”고 ‘정말 구체적인 얘기’로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언론에 대한 자신의 속생각을 강도 높은 표현으로 표출해 나갔다. 6월24일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청와대에서 열린 고문단회의에 참석해 “언론개혁은 제2의 ‘6월항쟁’이며 수구언론은 개혁의 저지세력, 반통일세력”이라고 직설했다. 한 달 뒤인 7월25일 민주당 확대간부회의에서는 “언론은 최후의 독재권력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8월1일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민주당 국정홍보대회 연설에서는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을 그대로 두고는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개혁은 없다”고 역설했다. 공당(公黨)에 몸담고 있는 중견 정치인의 발언이 아니라 거의 대학 운동권에서나 나올 수 있을 정도의 분명한 ‘언론관’이며 언론 비판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노무현의 비판 대상이 ‘조중동’혹은 ‘메이저 언론’에서 ‘조선일보’로 구체화, 단일화되기 시작한다. 그 같은 변화(?)와 관련해 노무현 스스로는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사람은 자부심도 있었고 떳떳할 수 있었으나 언론에 찍힌 사람은 여론의 비판을 받기에 명예를 난도질당하는 더 가혹한 고통을 받는다. 1980년대 반독재 운동때 느꼈던 부담감보다 지금 수구언론에 부담감이 더 크다. … 수구세력 선봉에 조선일보가 서 있다. 조선일보는 민주당 정권재창출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조선일보식 정치구도를 만들고 있다. 내가 조선일보를 상대로 버거운 싸움을 하는 것은 개혁세력 방어를 위한 전략이며 몸부림이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차기 정권을 좌지우지하려 들지는 않는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나 유연해질 수 있으며 이들의 보수적 시각에 합리적 책임감을 더한다면 합리적 보수신문, 건강한 보수언론으로의 변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방씨 일가가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2001년 6월7일자 ‘미디어오늘’인터뷰)

■조선일보와의 政爭(?)

img3L 이런 와중에 2001년 9월12일 노무현이 불쑥 성명을 하나 내놓았다. ‘조선일보의 특정인 후보 만들기 음모에 대한 입장’이라는 긴 제목의 성명이었다.

나는 일찍이 ‘조선일보는 이회창 기관지’임을 선언한 바 있다. … 조선일보와 이회창 총재는 수구·냉전·특권세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조선일보가 사리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민주당내 특정인 대세론을 전파하는 이유는 ‘특정인 후보 만들기를 통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전략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 이회창의 영남 지지기반을 일거에 허물 수 있는 민주당 후보의 등장을 봉쇄하기 위해 특정인 후보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또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친일 행적 및 독재와 결탁한 어두운 과거를 TV토론을 통해 폭로할 수 있는 민주당 후보의 등장을 극도로 불안해 하기 때문에 특정인 후보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 이 성명은 그보다 이틀 전인 9월10일자 조선일보의 ‘여, 이인제 후보 굳히기 시작됐나’라는 기사를 보고 내놓은 것이었다. 기사의 요지는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 주류가 이인제 의원을 밀고 있으며 그쪽으로 대선 후보가 정해지는 것이 대세’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노무현측은 ‘이회창의 영남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고 조선일보의 과거를 문제삼는 노무현을 떨어뜨리려고 이인제 대세론을 기사화했다’고 해석한 것이었다. 기사의 내용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기사의 ‘저의’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 성명 내용은 노무현이 왜 메이저 언론 중에서도 조선일보를 ‘최고사령부’로 삼았는지 추측하게 해준다. 나아가 이는 정치인과 언론의 기사 내용을 둘러싼 대결이 아닌, 기사 의도를 놓고 벌인 ‘정쟁’(政爭)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어 그는 조선일보가 그해 가을부터 릴레이 보도를 시작한 민주당 경선 주자 연쇄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11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보팀 이름으로 ‘최근 조선일보에서 대선 주자 연쇄 인터뷰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저희에게도 조선일보측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으나 위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며칠 뒤 11월19일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이유와 앞으로 조선일보와 실제 싸움에 돌입할 것이라고 강도 높게 치고 나왔다.

“조선일보가 반민주적인 특권집단이라는 본질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일보의 권위와 신뢰를 높여주는 어떠한 인터뷰도 응할 수 없다. 나는 조선일보의 장삿거리가 되지 않겠다. … 조선일보의 불공정, 왜곡 보도가 계속될 경우 대통령선거 기간이라는 열린 공간을 활용해 지지자들과 함께 조선일보 불매운동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전개할 것이다. 예상되는 조선일보의 보복을 능히 극복할 수 있고, 이에 대한 대비도 확실히 하고 있다.”

노무현은 이와 관련, 2002년 3월 전주경선을 위해 열린 TV토론에서 “대통령이 된 뒤에도 특정신문과의 인터뷰를 계속 거절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한 지금까지도 노대통령은 조선일보, 나아가 조중동과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다.

■노무현과 조선일보, DNA가 다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조중동이 노무현과 ‘기사’를 통해 부딪치지 않았다면 그들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나 충돌이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설사 그렇더라도 인간 노무현과 메이저 언론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서로 본질적 기질이 달라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조중동과 노무현은 유전적 기질(DNA)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잠깐 언급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이런 시각의 대표주자는 최근 고양시 덕양구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된 유시민 씨다. 그는 자신의 저서(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2002년)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내놓고 있다.

“우리는 지난해 봄 이후 유력한 대통령 후보와 자칭 대한민국 1등신문 사이에 벌어진 정언(政言)충돌을 목격하고 있다. 이 싸움이 본격화한 것은 2001년이지만 그 서막이 열린 지는 이미 10여 년이 지났다. … 이 싸움의 두 주역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관전자에게는 더욱 흥미로운 싸움이 된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일보의 개성, 나아가 힘을 이렇게 정리한다.

“조선일보는 어떤 신문인가. 조선일보가 얼마나 막강한 정치적 존재인지는 조선일보 사람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 조선일보가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이유는 뭘까. 첫째, 많이 팔리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광고 효과가 크니 광고 판매 수입도 많다. … 두번째 이유는 사주가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과 편집국장, 논설위원과 기자들이 사주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다면 힘이 있을 수 없다. 조선일보는 국가적 현안이나 중요한 정치적 쟁점에 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사주에서부터 경영진과 데스크, 일선기자와 외부 필자까지 일사불란하게 그 입장을 따른다.

… 조선일보 회장이 힘이 센 또 하나의 이유는 모두가 조선일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신문에 찍히는 바람에 반쯤 ‘죽어나간’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의 한완상 통일부총리와 김정남 대통령교육문화수석, 김대중 정부의 최장집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공세에 밀려났다. 외국어대 이장희 교수는 조선일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린이 통일교육 교재를 썼다가 용공분자로 몰려 치도곤을 당했다. 이석현 국회의원은 명함에 ‘남조선’이라는 한자를 병기(倂記)했다가 소속 정당을 떠나야 했다. 조선일보, 이렇게 무서운 신문이다.”

언론 관련 단체에 근무하다 퇴직한 한 기자는 그 같은 조선일보의 특징을 한 마디로 ‘기득권’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조선일보의 근본적인 힘은 역시 위로는 회장에서부터 아래로는 말단사원까지 똘똘 뭉치는 데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이념, 한 가지 철학, 한 가지 태도로 똘똘 뭉쳐 신문을 만드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그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그 구조에서 이념이나 철학이 다르거나 사주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은 뽑지도 않거니와 만약 있다면 쫓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그처럼 ‘조선일보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조선일보 기자 중 서울대 출신 비율이 가장 많기 때문에 서울대처럼 ‘엘리트 의식’이 큰 요인이라고도 한다. 아니면 ‘이른바 보수적인 국가주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전적으로 ‘돈’, 곧 조선일보가 자기 식구들에게 지불하는 보수 덕분이다. 조선일보에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회사가 직원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보상해 주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보수체계는 신문사 가운데 가장 높으며 특히 1990년대 이후 직원들에게 매년 지급하는 특별상여 액수는 ‘전설적인 규모’로 소문난 지 오래다. 생각해 보라. 그렇기 때문에 조선일보사 입사(入社)와 동시에 신입사원들 자신도 오래지 않아 곧 스스로 기득권층이 된다. 전체 구성원이 기득권 세력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는 것이다. 당장 중앙일보나 동아일보 출신들과 비교해도 조선일보 출신 가운데 DJ와 노무현 캠프쪽으로 들어간 사람이 누가 있는가. 또 자신을 기득권 세력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회사를 위해, 그런 사주를 위해 그야말로 충성을 다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조선일보는 ‘그 자체가 기득권 세력이며, 우리 사회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힘을 쓰고 나아가 조선일보가 유지, 추구하려는 이념이나 철학에 맞지 않거나 기득권에 도전하는 상대는 응징(?)한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어떤 ‘DNA’의 소유자인가.

한 마디로 그는 ‘겁 없이 기득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분류된다. 지난해 5월31일 경기도지사선거때 진 념 후보 지원유세에 나선 노무현은, 마침 자신과 조선일보를 이렇게 비교하는 연설을 했다.
“… 저는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땅의 가난하고 힘 없고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앞에서 본 ‘딸배’소송사건, 주간조선과의 명예훼손 소송 등 메이저 언론을 상대로 줄곧 법정투쟁을 벌인 일, 당내 기반 없이 경선에 나서서 후보로 선출된 일, 지역갈등을 깨 보겠다고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에서 두 차례나 도전한 일(14대 총선과 부산시장선거), 정몽준과의 단일화 과정에서 불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몸을 던져 자신이 단일후보로 서게 된 일(대선), ‘일찌감치 승부는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회창 후보와의 대선에서 9회말 역전 등 아닌게아니라 노무현은 줄곧 ‘다윗’의 입장에서 ‘골리앗’과 맞서온 경력이 대부분이다.

음모와 물밑거래, 돈과 세력이 판치는 정치판, 정치인과의 관계에서 늘 갑(甲)의 위치에 안주해 온 언론, 그리고 몸을 던져봐야 자신만 깨진다고 믿고 있는 지역감정의 장벽…. 이미 우리 사회에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득권층과 고정관념을 깨면서 성장한 그를 정신과의사이자 남성심리 전문가인 정혜신 박사는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무엇이 정말 두려움인가를 아는 배짱이 두둑한 남자”라고 분석한다. 이 같은 논의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노무현은 기득권에 도전하는 DNA를 가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 메이저 언론, 그리고 옳지 않은 기득권에 대해서는 배짱으로 도전하는 노무현. 그 양자가 만난 시점은 3김씨로 대표되는 구체제의 기득권이 허물어져 가는 때였다. 3김을 잇는 새로운 정치엘리트로서의 노무현이 만약 자신의 선배들처럼 일찌감치 정치적 기득권을 온몸에 지닌 인물이었다면 그는 언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 월간중앙 2003년 05월호
IP : 122.32.xxx.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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