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5.07.24 20:42:47]
[중앙일보 박현영] ''불량주부''가 보통명사로 통용되는 시대다. 아이를 키우거나 집안일을 전담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6월 현재 집에서 가사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의 수는 12만 명에 이른다. 여성 취업이 늘고 맞벌이 부부가 일반화되면서 집안일은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를 경험한 30대 젊은 남편들에게서 불량주부의 애환과 보람을 들어본다.-어떻게 육아.출산휴직을 결심했나.
강필구=공무원이 된 뒤 1996년 은행원이던 아내와 결혼했다. 97년 12월에 첫딸, 99년에 아들을 낳았을 때 아내가 두 차례 휴직했다. 외환위기 직후라서 아내도 눈치가 보였던지 복직할 무렵 차 안에서 "당신도 육아휴직 한번 내지 그래요"라고 말했다. 처음엔 "말도 안 돼"라며 펄쩍 뛰었다. 그러다가 위기가 왔다. 어린이집에 애들을 맡기고 맞벌이를 하다가 큰애가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아 입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행정자치부에서 처음으로 남성 육아휴직 신청을 냈다.
박병건=아이가 셋이다 보니 집사람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97년 직장생활을 한 이후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었다.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어 나름대로 충전의 시간도 갖고 싶었다. 회사를 두 번 옮겼을 때도 다음날 새 직장에 출근해야 할 만큼 빡빡한 생활을 했다. 셋째애를 낳은 뒤 한 달 보름 동안 출산휴가를 냈다. 내가 두 아이 돌보는 일을 전담하고, 부인은 처형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김수일=지난해 5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쉬었다. 자동차 정비학원에 다니며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짬짬이 살림을 해 보는 건 어때?"라고 물어왔다. 전업주부였던 아내가 대신 할인마트에 나가 바깥일을 했다. 얼마 전 내가 다시 취업할 때까지 1년4개월간 전업주부 역할을 했다.
-주변 눈치는 안 보였나.
강=함께 힘들게 일하는 동료에게 어찌 미안한 마음이 없겠는가. 이러다간 일보다 가정을 우선하는 팔불출로 찍히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직장 상사에게 사실대로 사정을 털어놨더니 의외로 흔쾌히 들어줬다. 총무과에 육아휴직원을 제출한 다음날 바로 휴직 명령이 났다. 내가 떠난 자리에는 다행히 지방 근무를 하던 분이 곧바로 충원돼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박=외국계 회사라서 업무만 제대로 인수인계하면 문제가 없었다. 마침 적당한 후임자가 있었고, 다른 부서원들도 도와줬다. 지금은 자신들도 다음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출산휴직제도 혜택을 누린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무급이라서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이 있으면 굳이 휴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김=처음엔 양가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다. 남편이 그런 일 한다고. 그래도 부부가 협력해 잘하면 그게 가족이 잘되는 지름길 아니냐고 말씀드리니 결국 이해해 주셨다.
-집안일을 직접 다 했는가.
강=밥하고 빨래도 했다. 작은애는 처음에 면 기저귀를 쓰다가 나중에 빨기가 너무 힘들어 1회용 기저귀로 바꾸었다.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업고 해서 병원도 가고 수퍼에 가서 장도 봤다. 다들 엄마가 오는데 아빠가 대낮에 애들을 데리고 다니니깐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곤 했다.
박=당연한 일 아닌가. 평소에도 맞벌이여서 내가 청소하면 아내가 음식을 만들었다. 아이들 유치원 행사에도 갔는데 처음엔 어색하다가 곧 익숙해졌다. 요즘에는 엄마 대신 아빠가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아 외롭지 않았다.
김=아내가 출근한 뒤 오전 8시 반쯤 아이들을 깨워 씻겼다. 아침을 먹여 어린이집에 보내고 틈을 내 학원에 다녔다. 오후 4시쯤 돌아오면 청소하고 빨래하고 저녁거리를 장만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 먹이고 있으면 오후 7~8시쯤 아내가 퇴근했다. 아내의 저녁도 내가 차려줬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강=때마다 정해진 시간에 이유식이나 밥을 먹이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달래기도 하고 밥 안 먹고 도망가면 쫓아가 혼내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퇴근한 아내가 "뭐한다고 애들 제때 밥도 안 먹이느냐"고 지청구를 할 때는 내가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나도 마찬가지다. 특히 아이들이 떨어져 있는 엄마를 찾을 때가 힘들었다. 식사 장만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책 보고 만든 뒤 먹이고 치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사준 간식을 마다하고 "컵 케이크를 만들어 먹자" "빵 구워 먹자"고 할 때는 난감하더라. 사실 음식을 같이 장만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도 많고, 그런 게 교육이 되는 건데.
김=애 둘을 데리고 병원에 갈 때다. 꼭 하나가 아프면 다른 애도 따라서 아프기 일쑤였다. 하나는 업고 하나는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데, 병원까지 차 타기에 어중간한 거리라서 고생이 많았다. 청소도 애를 먹었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도무지 티가 안 난다. 아이들이 무섭게 어질러 대는 통에 하루에 청소를 몇 번씩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잔소리만 늘었다. 아내한테 애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 사이에 내가 똑 그 꼴이더라.
-육아와 집안일을 해 본 소감은.
강=이래 봬도 내가 경기도 양평에서 27개월간 군대 현역을 마친 사람이다. 그런데 1년간 집안일 돌본 것과 비교해 보면 군대에서 빡빡 기는 것보다 가사 노동이 훨씬 힘들었다. 가정주부의 고통을 십분 이해하게 됐다.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육체도 힘들었다.
김=정말 쉽지 않더라. 걸레 삶다가 냄비 몇 개는 태워 먹었다. 세탁기에 빨랫감을 한꺼번에 넣는 바람에 낭패도 봤다. 겉옷.속옷.수건.걸레가 뒤섞이다 보니 온통 하얀 보풀이 묻어 있었다. 마르면 떨어지겠지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그날 하루 종일 테이프로 빨래에 붙은 보풀만 떼어 냈다.
-보람이나 기쁨은 없었나.
강=1년간 함께 뒹굴다 보니 지금도 애들이 나를 잘 따른다. 시간에 맞춰 분유 타고 애를 안고 먹일라치면 젖병을 쪽쪽 빨아대는 아이에게서 생명의 신비감을 느끼며 전율했다. 이 애들이 정말 내 새끼구나 하는 생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박=출산휴가 한 달 반 동안 애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낮에 공원에도 가고 온종일 함께 지내고. 그 뒤로는 사실 내가 많이 변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고된지 알고 나서 요즘은 되도록 아내를 도우려고 한다. 이제는 집에 들어가면 아내에게 "힘들었지"라는 말을 꼭 빼놓지 않고, 아이들과 하루 한 번은 전화통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김=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한번은 병원에서 큰애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바로 뒤쫓아갔는데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참 헤맨 끝에 화장실 세면대에서 물장난하고 노는 애를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또 한번은 밥상에 놓은 찌개에 데어 딸애가 제법 큰 화상을 입었다. 내가 다친 것보다 더 속이 상했다.
-남자 혼자 육아와 가사노동을 해도 충분한가.
강=힘에 부쳤다. 그래서 육아휴직 한 달 정도 지나 염치불고하고 한 달간 친가에 빌붙었다. 휴직이 끝난 뒤에도 애들이 어려 장모님과 처제에게 번갈아 신세를 졌다. 애들을 어린이집에 맡겨도 나나 집사람이나 퇴근시간이 들쭉날쭉해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 사회는 맞벌이 부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맞벌이하지 않고 생활이 잘 유지되는 사회도 아니지 않은가.
김=남자들이 힘은 더 세지만 섬세함이 모자라 집안일이 어려웠다. 매일 똑같은 반찬을 할 수는 없지 않나. 뭘 해 먹어야 하나가 큰 고민이었다. 애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도 보통이 아니었다. 무조건 예쁘기만 할 것 같았는데 한 시간만 지나도 고통이다. 애들은 잘 때가 제일 예쁘다. 천사가 따로 없다. 그래도 키워 준 정성 때문인지 요즘 큰딸애는 울 때도 "아빠~아빠~"하면서 운다.
-다른 남성들에게 육아휴직을 권하고 싶은가.
강=힘들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내 인생에 단 한번뿐인 소중한 시간여행이었다. 아이를 키우기보다 내가 아이들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도 자신의 인생이 있다. 육아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접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내가 도와줬기 때문인지 지금 아내는 과장 승진을 바라보고 있다.
박=출산휴가보다는 2~3개월 휴직을 권하고 싶다. 무급이라도 한 달에 5만원씩 육아휴직용 적금을 들어 두면 부담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샐러리맨이 이럴 때 말고 가족들과 몸으로 부딪쳐 볼 기회가 별로 없지 않은가. 1년 육아휴직도 괜찮지만 사회가 워낙 빨리 변하니 회사원으로서는 선택이 쉽지 않을 것이다.
김=가사와 육아를 서로 미룰 게 아니라 누가 하는 게 더 나은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남자가 바깥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가질 필요가 없다. 아이도 함께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아내가 뭐라고 하던가.
강.박.김=(이구동성으로) 고맙다고 했다. 가장 필요로 할 때 옆에서 도와줘서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육아휴직 때문인지 그 이후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정리=박현영 기자▶ 강필구=행정자치부 공무원 / 40세 / 2000년 10월부터 1년간 육아휴직▶ 박병건=쌔스코리아 금융사업본부 차장 / 36세 / 2004년 8월부터 한 달 보름간 출산휴가▶ 김수일=자동차 정비업체 근무 / 30세 / 2004년 3월부터 1년4개월간 집안일 전담▶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journalist.asp- ''나와 세상이 통하는 곳''ⓒ 중앙일보 & 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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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와글와글] 가사·육아 전담해 본 세 남편의 경험담
펌글 조회수 : 601
작성일 : 2005-08-05 16:17:58
IP : 210.118.xxx.2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음...
'05.8.5 4:33 PM (59.23.xxx.51)음...공감이 갑니다.
서로 상대의 고충을 알 수 있는 그런 경험들이 필요할꺼 같아요.
육아휴직동안 가사와 육아를 좀 맡아보면,남자들도 생각이 좀 바뀌겠지요.
아내를 이해하고 고마워하게될꺼에요.2. 이런분들이
'05.8.5 8:24 PM (220.75.xxx.187)더 이상 기사 거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현실이 되는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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